제164화. 위장된 연회
펠리페 3세로써도 더 이상 동방항로에서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영향력 축소를 방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방항로에서 거두는 이익에 연관이 깊은 상인들의 지원을 받아 펠리페 3세는 1백 척의 대함대를 구성하고, 1만에 달하는 포르투갈 육군을 동원해 배에 태웠다.
칼레 해전의 패배를 되갚기 위해 잉글랜드를 향한 복수의 칼을 들었다 두 번이나 태풍으로 실패한 이후, 단일함대로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구성한 최대, 최강의 전력이었다.
함선은 모두 포르투갈 해군이 보유한 최신 포인 초선포로 무장했으며, 육군도 초선포를 장비하고 있었다.
그 함대에 대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기대가 어떠했는지는 함대에 붙은 이름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르마다(Armada).
한 때 전 세계 바다를 주름잡던 에스파냐의 함대에 붙었던 별칭이 공식적인 함대의 명칭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 아르마다가 포르투갈을 출발해 희망봉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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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포르투갈에서 아르마다가 출발하고, 부산포에서 215전대가 희망봉으로 출항하던 날과 같은 날, 꿀 같은 휴식을 마친 징검다리 원정단이 현월첨을 떠나 현월열도에 대한 점령 작전을 시작했다.
신세계로 향하는 동쪽의 징검다리를 완성하기 위한 작전의 재개였다.
현월열도의 경우엔 강한 해류가 많아서 함선의 조함에 애를 먹었다. 결국 선도함에 타고 있던 지리원 관리들의 해류 실측이 끝난 후에나 이동하는 형태로 함대의 전진이 이루어졌다.
현월열도도 천도열도와 마찬가지로 다수의 섬과 바위들이 알라스카까지 길게 늘어서 있는 형태여서 수많은 점령전이 수반되었다.
다시 지루한 점령과 전진이 시작된 것이다.
거의 한 달 동안 징검다리 원정단은 겨우 현월열도의 중간쯤에 위치한 섬에 도달했다. 원정단이 도달한 섬은 지나온 현월열도의 섬들 중 가장 큰 섬으로 원정단은 그 의미를 붙여 대도(大島)라 지었다.
이 대도는 현대시대에 어널래스카(Unalaska)로 불리는 섬으로 실제로도 현월열도(알류산열도)에서 가장 큰 섬이었다.
원정단은 이곳에서 수원지를 찾아내 기지를 짓고 항구 접안 시설을 구축했다.
대도까지 도착하는 동안 원정단이 기지를 세운 곳은 한곳으로 아이누 원주민들이 겨울에도 바다가 얼지 않는 섬이라 부르는 부동섬(애투섬, attu island)이었다.
그곳에서 원정단은 웅다 반도에서 합류한 아이누들과 약간의 교류를 가지고 있던 알류트 원주민들과 최초로 접촉했다.
그들은 웅다 반도에서 합류한 아이누들의 설득으로 조선군에 협조하기로 했다.
하긴 이 순박한 원주민들은 천둥소리를 내며 먼 거리의 동물을 죽이는 천둥막대를 가진 조선군에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으니 달리 방법도 없었다.
그들 중 일부를 길잡이 삼아 대도까지 왔던 것이다. 알류트 원주민의 말에 의하면 아직도 절반은 더 가야 큰 땅, 그러니까 대륙에 닿는다니 아직 갈 길은 먼 셈이었다.
징검다리 원정단이 대도에 기지를 완성한 10월 중순. 희망봉 앞바다에서 조선 해군과 포르투갈의 아르마다가 충돌했다.
215원정전대와 55병단 소속 553, 555단에 주둔군 임무를 인계하고 기동함대와 해병강습함대가 막 철군하기 직전에 벌어진 이 전투엔 조선의 기동함대와 215원정전대, 그리고 해병 강습함대 소속 호위함들이 참여했다.
온바다를 가득매운 채 포르투갈 아르마다의 선공으로 시작된 포격전은 오히려 공격받은 조선 함대의 일방적 승리로 귀결되었다.
함당 무장한 함포의 수도, 함체의 급수도 모두 조선군 함대의 우위였던 데다 폭발탄의 파괴력은 목재선인 범선엔 치명적이었기 때문이다.
1백 척의 아르마다에서 80여척이 격침당하고 10여척은 반파된 채 백기를 걸었다. 그리고 나머지 10여척만이 상처투성이의 함체를 이끌고 전장에서 이탈해 도주했다.
그들의 도주를 알고 있었지만 조선 함대는 추격에 나서지 않았다. 굳이 결론이 난 전투를 질질 끌 필요까지는 없다는 기동함대 제독 정경달의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조선군 함선들은 연락선과 강습상륙선을 내려 바다위에 떠있는 포르투갈 선원들을 구조했다. 아직 부산포 수용소에 있는 포르투갈 선원들의 귀국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으니 그렇게 붙잡혀 있게 되는 숫자만 늘린 셈이었다.
정경달은 해병 강습함대만을 귀환시키고 기동함대는 잠시 희망봉에 남기로 했다. 포르투갈이 어떻게 나올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0월 20일 해병대와 포르투갈 포로들을 태운 해병 강습함대가 마드라스와 말라가에서 분열할 조선무역선 10척과 함께 희망봉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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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말에 들어서면서 현월열도엔 바람이 강해지고,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며 바다도 날카로워진 탓에 항해는 거의 불가능했다.
징검다리 원정단은 겨울을 대도에서 나기로 하고, 10척의 해모수급 전열함으로 이루어진 전대를 분리해 조선으로 보냈다.
그들은 대도에서부터 조선까지의 항로를 점검하는 한편 원정단이 대도에 머물게 된 연유를 설명하는 원정단장의 장계를 소지하고 있었다.
그 장계가 조선의 한성에 도달하는데 걸린 시간은 20여일이었다.
광해는 명을 내려 여전히 전장 적응 시험 중이던 증기 철선을 대도로 보내 혹한에 대한 증기철선의 운항 가능성을 시험하도록 명령했다.
증기철선을 보조하기 위해 보고를 위해 돌아왔던 이순신 함대소속의 전대는 증기철선과 함께 대도로 다시 향하기로 했다.
아울러 다량의 석탄이 사용되는 증기철선의 특성상 석탄을 가득 실은 12수송함대 소속 조선무역선들이 10척이나 따라붙었다.
전대가 대도에서 돌아왔던 날로 부터 10일 후, 증기철선과 합류한 전대가 12함대 소속 조선무역선들과 함께 다시 대도로 향했다.
증기철선이 대도로 출발한 날로부터 다시 12일이 흐른 날, 해병 강습함대가 희망봉에서 포항으로 돌아왔다. 광해가 곽재우를 포항으로 보내 그들의 귀환을 환영하고 노고를 치하했다.
같은 시간 만신창이가 된 10여척의 함선이 긴급수리만을 행한 채 포르투갈로 돌아왔다.
그로써 아르마다의 패전을 알게 된 포르투갈은 난리가 났다. 분노한 백성들 사이에선 복수를 위해 다시 함대를 보내야 한다는 소리가 드높았지만 펠리페 3세도, 또 귀족들과 상인들도 조선 함대를 바다에서 이길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이미 조선의 강대함을 알고 있었지 않느냐는 의견까지 대두되면서 패전의 책임 소재가 포르투갈 정부 내에서 심각하게 다뤄졌다.
조선 함대의 저력을 알기 때문에 말라카를 빼앗겼으면서도 화평을 맺은 것이 아니었냐면서, 그럼에도 함대를 내보내 수많은 함선과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몬 책임을 지우려는 움직임이 일었던 것이다.
그 중심에 선 이들은 대체로 그간은 포르투갈 정치의 변두리에 머물던 지방귀족들이었다. 그들의 거센 공격에 내몰린 중앙 귀족들이 돌파구를 찾아 분주히 움직였다.
그런 이들 중 한사람의 눈에 리스본 항구에 정박해 있는 조선 무역선단이 들어왔다. 조선과 전쟁 중인데 버젓이 조선의 무역선단이 포르투갈의 리스본 항에 정박해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것은 조선의 정경분리 원칙에 의한 것이었다. 임진왜란 중에도 조선과 왜가 교역을 한 것에서 출발한 이 정책은 정치와 경제, 그러니까 교역을 완전히 분리해서 대응하는 것이었다.
포르투갈은 조선과의 교역이 시작되었을 때 이런 조선의 정책에 동의했다.
당시에는 먼 동방의 나라인 조선과 척을 지고 전쟁을 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또한 조선기술과 대양항해술을 주고, 철포 기술을 이전받을 만큼 가까워진 사이였기 때문에 양측의 충돌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바뀌었다.
조선 무역선단을 유심히 지켜보던 귀족이 돌아간 직후, 중앙 귀족들 사이에서 조선 무역선단을 나포하자는 주장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을 나포하여 희망봉에서 격침된 함선들의 피해를 복구하고, 전사한 장병들의 유족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하자는 주장이었다.
자신들의 책임소재를 피할 수 있다는 것에서 중앙귀족들이 그 주장에 힘을 싣기 시작했다.
펠리페 3세도 은근히 그 주장에 관심을 보였다. 백성들의 빗발치는 원성이 신경 쓰이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위로금을 왕실이나 국가의 재정이 아니라 나포한 조선 무역선단을 처분하여 마련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구미가 당기기도 했다.
문제는 조선과 맺은 약조였다.
해당 약조에 대해 외교를 담당하는 관리들은 조약이나 협약이 아니라며 지켜야할 의무는 없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중앙귀족들의 농간에 의한 해석이었다.
그것을 막아야 했던 지방귀족들도 국왕의 마음이 이미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에 그것을 물고 늘어질 수 없었다.
그러 상황에서 내려진 결정이었다.
조선 무역선단을 나포하라는 펠리페 3세의 명령서를 받아든 리스본 주둔 포르투갈군 지휘관들은 난감했다.
조선 무역선단은 여느 상선단들보다 무장이 탄탄했고, 호위함들의 수나 수병들의 질도 높았다.
조선의 경우 무역선단까지 해군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호위함의 근무자들은 모두가 현역 조선 해군 장병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지키고 있는 조선 무역선단을 나포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리스본 주둔 포르투갈군 지휘부는 몇 가지 꾀를 내었다.
그 꾀들이 조용히 실행되기 시작했다.
조선 무역선단엔 한 가지 전통이 존재했다. 기항지에 들릴 때마다 선원들과 호위함의 수병들에게 상륙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대략 절반정도의 선원들에게 상륙이 허가되는데 기항 시간이 길다면 1박2일씩 돌아가면서 전원이 상륙의 기회를 갖도록 배려한다.
이것은 장거리 항해가 잦은 조선 무역선단의 선원들과 수병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상륙한 수병들과 선원들은 소규모의 상품을 팔아 돈을 벌거나 항해로 지친 심신을 선술집에서 술로 달랜다.
사창가의 출입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이 당시만 해도 매독에 대한 치료제가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내의원은 푸른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군율을 위반하고 사창가를 다녀왔다는 것이 밝혀지면 군법에 회부되어 불명예 전역은 물론이고, 전역 후 약속된 보상은 단 하나도 받을 수 없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것으로 인해 사창가를 찾는 수병이나 선원들의 경우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런 전통에 따라 리스본에서도 상륙이 허가되었다. 규칙대로 절반의 병력에 내려진 허가였다.
한데 그게 갑작스런 일로 변경되었다.
최근에 벌어졌던 양국 사이의 좋지 않았던 일을 털어버릴 겸 리스본 상인회가 연회를 개최하겠으니 가능한 많은 선원들과 수병들이 참석해서 우의를 다져지길 바란다는 리스본 시장의 서신이 전해진 것이다.
조선 무역선단은 상선단임과 동시에 조선군이었고, 외교의 첨병이었다.
그런 자신들의 입장 상 리스본 시장의 초대를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괜히 어렵게 마련된 양국 간 화해의 장을 어그러트리는 결과를 가져올까 걱정되기도 했다.
결국 조선 무역선단의 단장이 남아있던 절반의 선원과 수병들 중 다시 그 수의 절반에 대해 상륙을 허가했다.
그리고 단장을 비롯한 다수의 장교들과 지휘자들도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리스본 항구로 상륙했다.
그날 밤 상인회가 개최한 연회가 성대히 벌어졌다. 화려한 등불들과 기름진 음식들, 그리고 술이 대량으로 풀어져 흥겨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조선 무역선단의 선원들과 수병들이 그 분위기에 취해 긴장감을 내려놓고 술잔을 들었다. 그런 자신들을 차갑게 빛나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