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서쪽으로 향하는 마지막 징검다리
희망봉 점령을 위해 해병 강습함대가 출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거제 건선단지에서 증기기관과 무장 장착을 끝낸 증기 철선이 완성되어 진수되었다.
광해가 직접 참석한 그 진수식에 모습을 드러낸 거함은 그 웅장한 자태만으로도 사위를 압도하는 위압감을 풍겼다.
증기 철선은 시험선체인 까닭에 운항시험과 전장 적응시험을 거쳐 수정사항을 일일이 점검하여 제식 증기 철선의 설계에 반영될 예정이었다.
광해가 거제에서 돌아온 다음 날, 미래회의가 끝이 났다. 일전의 군왕들이 그러했듯 미래회의가 끝난 후계자들을 위한 시찰이 있었다.
한양 시내, 장원, 철산 제철단지, 거제 건선단지로 이루어지는 시찰에 후계자들은 먼저 시찰했던 각 제후국의 군왕들만큼이나 흥분했다.
자신들의 나라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모습에 경악이라 표현해야 할 정도로 놀랐고, 그 기술들의 상당수가 조만간 자국으로 이전되어 실행될 것이란 것에 흥분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각 제후국에서 보낸 대규모 수송대가 조선에 도착했다. 일총의 1차 보급을 위해 5천정씩을 실어갈 수송대였다.
직전에 반란이 일어났던 북원까지 빠트리지 않고 11개 제후국에 도합 5만5천정의 일총이 분출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일총을 실은 각 제후국의 수송대와 함께 후계자들이 귀국했다. 그들은 부푼 꿈과 희망을 안고 자국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후계자들이 귀국한 직후, 조선은 천도열도에 대한 점령 작전을 개시했다.
신세계를 향한 징검다리가 될 천도열도(쿠릴열도)와 웅다 반도(캄차카 반도), 그리고 현월열도(알류산열도)에 대한 점령 계획의 일환이었다.
이순신 함대와 제11수송함대가 동원된 이 작전엔 해병 5여단과 6여단이 참여해 점령 작전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상륙 작전을 담당하게 되었다
포항에서 대기하던 해병 5여단과 6여단을 태운 11수송함대를 호위한 이순신 함대의 선도로 일명 ‘징검다리 원정단’이 동북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북해도에 잠시 들려 보급을 마친 후 곧바로 천도열도에 대한 점령 작전에 돌입할 예정이었다.
6월 초순부터 시작된 이 점령 작전은 꽤나 단순하면서도 반복적인 점령전을 수반하고 있었다. 56개의 섬과 바위들이 북해도 연안에서 웅다 반도까지 줄지어져 있는 천도열도의 특성 때문이었다.
그것들을 일일이 상륙하여 점령하고, 그곳에 조선령이라 새겨진 비문을 세우는 일은 꽤나 지난하고 오랜 시간을 잡아먹는 일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간혹 유인도가 있을 경우 그곳에 거주하는 아이누들과의 충돌도 감수해야 하는 일이어서 긴장을 늦출 수도 없었다.
지리원의 관리들이 함께 상륙해서 섬을 실측하여 지도를 만드는 일을 지원하고, 섬에 식수가 있는지도 조사해야 해서 상륙병력의 업무는 더 느리고 더디게 진행되었다.
함대의 전진도 무조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지리원의 관리가 탑승한 선도함을 앞에 두고 해도를 그려가며 진행해서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것이 이 별것 없는 상륙작전에 한 달이라는 시간이 소요된 연유였다. 그러는 동안 식수원을 찾은 두개의 작은 섬에 보급기지를 건설했고, 그곳에 각기 높새와 굽바자란 이름을 붙였다.
높새는 점령당시 북동풍이 하도 거세게 불어 붙여진 이름이었고, 굽바자란 작은 나뭇가지로 엮어 만든 얕은 울타리를 뜻하는 순 조선말에서 따온 명칭이었다.
그렇게 징검다리 원정단의 천도열도 점령 작전이 마무리되어갈 시점에 해병강습함대는 희망봉에 접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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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봉 인근에 도착한 원정단은 기동함대가 희망봉 해역 전체를 봉쇄한 가운데 5척의 해모수급 전열함과 10척의 왕건급 호위함으로 이루어진 해병 강습함대 호위함들을 투입 30척으로 이루어진 포르투갈 함대를 격멸했다.
포르투갈 함대의 결연한 의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순식간에 끝나버린 전투였다.
포르투갈 함대가 장비한 초선포로는 3천보의 사거리를 가진 이포를 장비한 조선군 함대를 당해 낼 수 없었던 것이다.
직후 호위함들이 해안가로 가까이 다가가 해안포대와 항구 접안시설에 대한 포격을 실시했다.
그 사이 해병 강습함대에 소속되어 있는 조선무역선들에서 내려진 2백 척의 강습상륙선들에 해병대원들이 탑승하기 시작했다.
40명을 태울 수 있는 강습상륙선 2백 척에 탑승한 병력의 수는 5천명이었다. 거기다 추가 상륙을 위해 강습상륙선들을 몰고 조선무역선으로 돌아갈 이들까지 탑승해도 정원이 남아돌았다.
하지만 강습상륙선은 빼곡히 자리가 들어찼다. 정원에 미치지 못하는 인원을 태웠음에도 자리가 없었던 것은 해병대원들이 장비한 구포와 최초의 기관총인 현식총에 있었다. 그것들과 포탄, 여분의 탄창들이 부피를 차지한 것이다.
현재 장원에서 한창 생산중인 현식총을 보급 받은 부대는 해병대가 유일했다. 그로인해 현식총의 경우엔 이번 전투가 최초의 실전 투입인 셈이었다.
마찬가지로 나총에 사용되는 금속제 탄피가 사용된 총탄을 보급 받은 것도 해병대가 처음이었다. 따라서 금속제 탄피를 가진 총탄도 이번 전투가 최초의 실전 투입이었다.
포격의 지원 속에 해변에 상륙한 해병대원들은 곧바로 구포를 설치하고 내륙을 포격하기 시작했다.
해병들이 해안가에 상륙한 것을 확인되자 안전상의 이유로 함포사격은 중지되었다. 그것을 확인한 해병대원들이 안쪽으로 돌격했다.
현식총의 사거리는 나총의 사거리와 같다.
포르투갈군이 마차를 엎고, 상자들을 쌓아 만든 진지의 4백보 거리에 거치된 현식총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분당 5백발의 발사속도를 가진 현식총이 불을 뿜으면서 포르투갈 진지에선 비명소리가 난무했다. 실전에 적용된 현식총의 화력은 무자비 그 자체였다.
일대에 총알세례를 퍼부어 상대를 완전히 제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분대 지원화기로 지정된 현식총은 백인대라 불리는 1개 대에만 4정이 배치되었다. 거기에 백인대당 2문씩 배치된 구포까지 합세하면서 포르투갈군의 저항은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구포, 현식총, 수탄, 나총으로 연결되는 조선군의 근접전 화력에 밀려 포르투갈군은 제대로 된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사살되거나 항복했다.
상륙 후, 1시간 만에 희망봉 일대의 포르투갈군의 저항이 완전히 제거되는 것으로 조선군의 점령 작전이 끝났다.
이날의 전투는 희망봉 항구에 보급을 위해 정박해 있던 수많은 유럽의 상선들과 상륙해 있던 선원들이 직접 목격했다.
검은색 군복에 방탄조끼를 덧입고 철모를 쓴 조선군은 그들의 눈에 완전히 다른 세상의 군대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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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열도에 대한 상륙작전을 마친 징검다리 원정단은 곧바로 웅다 반도에 대한 점령 작전으로 전환했다.
해병들이 상륙하고 일대에 거점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작은 냇가를 낀 채 해안을 등지고 작은 요새가 먼저 건설되었고, 연결된 해안가에 이내 접안 시설을 갖춘 포구가 만들어졌다.
직후 일대에 대한 추가 점령 작전이 개시되었다.
5여단 병력이 내륙으로 퍼져서 올라가면서 진행한 이 점령전에는 다수의 아이누들이 발견되었다. 북해도 아이누 출신 조선해병이 그들과 대화를 시도해 합류를 설득했다.
다행히 설득이 먹혀 합류하면 지원체계를 갖추어주지만 저항을 선택할 경우엔 필연적으로 전투가 수반되었다.
솔직히 해병들에게 아이누들과의 전투는 위험요소는 아니었다, 워낙 원시 무기체계를 갖춘 그들은 실질적인 위험요소는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방치할 수도 없는 것이 방비가 되어있을 때난 위험요소가 아니지 무방비 상황일 때는 저들의 돌칼도 살을 파고들어 목숨을 끊어 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리원의 관리들과 함께 지도를 그려가며 전진한 5여단은 캄차카 반도와 대륙을 연결하는 목 부분에서 전진을 멈추고 점령 작전을 종료했다.
주변의 돌을 이용해 국경석을 길게 늘어트리고 큰 돌에 조선령 웅다 반도란 비문을 세워 조선의 강역임을 분명히 했다.
후일 이곳까지 진출할 러시아인들에게 조선의 점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사전에 광해가 지시한 일이었다.
웅다 반도 점령이 끝난 직후 징검다리 원정단은 웅다 반도에 몇 군데의 기지를 건설했다.
그중 가장 큰 곳은 3곳으로 첫 번째는 웅다 반도의 서쪽 남단인 강하(江下 : 아직 발견될 시점이 아니라서 글쓴이가 지은 이름으로 강이 바다로 흘러나가는 출구하는 뜻으로 지어짐, 연재의 오제르놉스키, Ozernovskii)다.
천도열도에서 나오면 이곳이 가장 가까운 기지였다, 강이 있어 식수를 구하기 용이해서 선정된 위치였다.
두 번째는 웅다 반도의 동쪽 중부에 위치해 현월열도가 시작되는 지역인 현월첨(弦月尖 : 아직 발견될 시점이 아니라서 글쓴이가 지은 이름으로 초승달의 끝이란 뜻으로 지어진 이름, 현재의 Ust-Kamchatsk, 우스티 캄차츠크)이다.
세 번째는 웅다중(熊多中, 페트로파블롭스크 캄차츠키, Petropavlovsk-Kamchatsky)으로 웅다 반도남쪽에 위치한 웅다중만(아바차만) 안쪽의 평원에 세워진 요새였다.
징검다리 원정단은 이 웅다중을 웅다 반도의 중심 요새로 삼아 조금 더 크게 건설했다. 향후 웅다 반도 주둔군과 함대가 배치되면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할 것이었다.
요새들의 건설이 끝난 후, 병사들에게 휴식이 주어졌다. 그사이 지리원 관리들은 부족한 지도를 보완하여 마무리 지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런 연유로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지리원의 관리들은 더 분주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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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가 막 지나간 8월 하순 희망봉 점령이 완료되었다는 보고가 한성에 닿았다. 보고를 받은 광해는 해군 21원정함대와 육군 5전대에 주둔 함대와 주둔군을 파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받은 21원정함대는 휘하의 1개 전대를 선발하여 파병준비를 갖췄다. 육군 5전단도 마찬가지 절차를 밟았다.
5전단에서 해외영토 파병주둔군을 관장하는 것은 55병단이었다. 해외영토 파병주둔군의 경우 가능한 지원병으로 구성하는 기조에 따라 55병단장은 희망봉에 대한 파병지원을 받았다.
현재 해외영토 파병주둔군은 말라카와 마드라스에 각기 1개 단씩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희망봉의 경우엔 상황이 달랐다. 안정화 단계를 거친 말라카와 마드라스와 달리 희망봉의 경우엔 실지회복을 위해 포르투갈의 군사도발이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두 배인 2개단 2천을 보내기로 한 55병단장은 지원병 모집을 확대했다.
21원정함대 휘하의 각 전단은 본래 3척의 해모수급 전열함과 5척의 왕건급 호위함으로 구성되어있었다. 하지만 주둔군의 수송과 보급품의 적재를 위해 최근 조선무역선 5척을 추가로 배속 받았다.
이번에 투입되는 215원정전대에는 현재 말라카와 마드라스에 주둔 중인 전대에 배속될 조선무역선들이 따라붙었다.
그로인해 15척으로 늘어난 수송선엔 55병단 소속 2개단, 2천의 병력과 대량의 보급품 실려 있었다. 해당 조선무역선들은 그대로 215전대와 함께 희망봉까지 진출했다가 병력과 보급품을 내려놓고 철군하는 원정단과 함께 돌아오다 마드라스와 말라카에서 분할될 예정이었다.
서쪽, 유럽으로 향하는 징검다리의 마지막 돌인 희망봉을 향해 215전대와 55병단 병력이 9월 초닷새에 부산포를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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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희망봉 점령완료 소식을 들었을 때 포르투갈도 희망봉 실함 소식을 들었다.
포르투갈은 물론이고, 에스파냐도 그 소식에 들끓어 올랐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에 올라탄 포르투갈 귀족들과 상인들은 복수를 원했다.
공식적으로는 평화주의자, 왕을 좋아하지 않던 일부 귀족들과 상인들로부터는 겁쟁이라고 소문나있던 펠리페 3세조차 그 분위기에 휩쓸려버렸다.
그 결과 여전히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을 함께 통치하고 있던 펠리페 3세는 말라카를 잃었을 때와는 달리 군사적 행동에 나서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