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화. 황실기(皇室旗)
각국으로 돌아간 군왕들은 사전에 말을 맞춘 것도 아니건만 멀리 카자흐부터 바다건너 동일본까지 모두 똑같은 정책 한 가지를 시행했다.
그것은 바로 황제의 신격화였다.
광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서였다. 이시대의 왕은 신성해야 했고, 왕권은 존엄의 대상이어야 했다.
당연히 그 왕권 위에 군림하게 된 광해의 존재는 신 그 자체여야 했던 것이다. 그래야 신에게 위임받은 통치권이 신성해지고, 존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근거도 있었다. 이미 광해는 여진인들에게 있어 천둥과 번개를 부리는 신인이었으니까. 한 번에 그친 것도 아니다.
철산 단지가 확대될 때마다 부족해진 자철석을 마련하기 위해서 광해가 벌인 천제는 10여 차례에 달하고, 그때마다 하늘에선 번개가 광해가 원하는 곳에 내리쳤으니까.
숨어서 한일도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행된 일이었다. 종래엔 태왕이 번개를 부리기 위해 천제를 지낼 것이라는 공표가 나면 그걸 보기위해 먼 길을 마다치 않고 오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가장 최근에 벌어진 천제는 2년 전이었고, 해외 5도에서도 구경 온 이들이 있을 정도로 조선에선 이름난 행사였다.
당연히 목격자들이 수천, 수만 명이 생성되는 이적(異蹟)이었다.
목격자들의 눈앞에서 이적을 행하는 광해는 하늘이 내린 신인이었다. 최근엔 단군왕검의 신화와 겹쳐, 천신의 아들이란 소문이 팽배했다.
말 그대로 천자였던 것이다. 요사인 중원 통일 황조의 옥새가 광해의 손에 들어간 일로 인해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 하늘이 진정한 천자를 내렸다는 소문으로 발전 중이었다.
광해가 나온 이래로 그의 치하에 들어간 백성들이 모두 배부르게 사는 것은 기정사실이었기 때문에 그 소문은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북원의 반발은 그 시점에서 벌어졌다. 막 황제의 신격화가 대한 제국 전반에 걸쳐 일어나던 바로 그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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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을 선포하면서 광해는 일단의 반발을 예상하기는 했다. 전투를 통해 점령하여 선포한 제국도 문제가 생길 판국에 피를 흘리지 않고 세운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힘에 눌렸다는 것은 같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이들의 마음은 결코 같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이다. 적어도 한두 개 국가 안에서는 반대파와 국왕파 간의 내전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예상했고, 조선군을 파견할 각오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이렇게 빨리, 그것도 북원에서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국가의 기틀이 아직 완벽하지 않은 탓에 반대파가 문제를 삼고 싶어도 저항이 가능할 정도의 병력을 동원할 능력이 안 되기 때문이다.
한데 그런 북원이 가장 먼저 반발의 기치를 걸었다. 그것도 왕에서 시작해 북원의 모든 부족들이 그 기치아래 모였다.
물론 처음부터 제국 성립에 대한 반발은 아니었다. 사소한 충돌이 비화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북원이 내세운 기치에 제국에서의 탈퇴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다른 제후국들의 시선이 북원에 쏠렸다. 특히 자신들의 영토가 침범당한 것은 북원과 마찬가지였던 후금의 시선이 가장 가까이 붙었다.
북원을 어찌 할 것인지 직접 물어보는 사신을 보내왔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후금만큼이나 모든 제후국들의 군왕과 백성들이 황제가, 조선이 이제 어찌 나올지 지켜보고 있었다.
회의석상에 모인 이들의 입은 조개처럼 다물려 있었다.
외교부 장관도, 이번 사태의 중심에 서 있는 포도청장도, 또 군을 대표하는 이순신과 권률, 이억기도.
광해가 그런 이들을 일별하고는 입을 열었다.
“원인이 어디에 있든, 누구의 잘못이든 저들이 대화가 아니라 군사적 대응을 천명해 온 이상 진압한다. 이 원수.”
광해의 부름에 이순신이 답했다.
“예. 폐하.”
“기동 전단을 이동시키시오. 한성을 지날 때 짐이 직접 합류하여 이끌 것이오.”
“친···정을 하실 요량이시옵니까?”
“저들이 짐에 대해 반기를 들었으니 짐이 직접 위엄을 세우는 것이 마땅할 것이오.”
“하나 폐하. 소장들을 믿으시고 기다려 주시······.”
“결정은 내렸으니 따라주시오.”
단호한 광해의 말에 이순신이 고개를 조아렸다.
“명을 받잡나이다. 폐하.”
무겁게 고개를 숙이는 이순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광해에게 외교부 장관이 물었다.
“하오면 다른 제후국들에게도 병력을 동원하라는 명을 내리 올까요?”
“그냥 두시오. 이번 반란은 일종의 본보기가 될 거요. 제국에 반하면, 조선의 의지를 시험하면 어찌 되는지 모든 이들이 확실하게 볼 수 있을 것이오.”
광해의 답에 외교부 장관이 빠르게 고개를 조아렸다.
“알겠나이다. 폐하.”
외교부 장관의 답을 들은 광해가 저만치 앉아있는 곽재우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곽재우가 고개를 숙였다.
“하명하소서. 폐하.”
“만일에 대비해 해병대에 비상령을 하달하겠소. 조선이 북원과의 전쟁에 들어갔다고 감히 준동하는 나라가 있다면 해병대가 투입되어 과감하게 밀어버릴 것이오. 하니 대비하시오.”
“충!”
굳은 목소리로 군례를 올리는 것으로 복명을 나타낸 곽재우에게서 시선을 돌린 광해가 모든 참석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위기는 또 다른 기회이고, 그 기회를 어찌 살리느냐에 따라 그 다음의 행보가 결정되는 법. 조당과 군은 가벼이 동요하지 말고, 사태에 흥분하지 말며, 차갑고 명석하게 대응한다.”
“명심하겠나이다. 폐하”
참석자들의 답을 들으며 광해가 차갑게 눈을 빛냈다.
광무4년, 서기1606년 3월. 기동 전단이 황제와 함께 친정에 나섰다. 이 친정에 이순신이 직접 동행했고, 철산 돌격기마 병단과 산악전투 병단을 참여시켰다.
사태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개마 돌격기마 병단의 경우엔 북방도로들의 순찰에 동원된 상태라 제외되었다.
다른 때 같았다면 왜 참여시켜주지 않느냐고 볼멘소리를 했을 정기룡도 이번엔 조용했다. 근신처분을 받은 자신의 입장을 알기 때문이었다.
시급을 다투는 상황도 아닌 시점에서 국경을 넘는 월경을 위해서는 상부의 허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위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살인, 약탈의 범인들을 추격하기 위해서였다는 명분이 아니었다면 근신정도로 멈춰지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조사를 담당했던 어사대에선 보직해임 이야기까지 나왔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시작된 광해의 친정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제3북방 도로를 따라 통료까지 진군한 친정군은 곧바로 후금과의 국경을 넘었다.
황제의 친정군이 국경을 넘는다는 소식을 사전에 통보받은 후금은 추옌을 보내 자국의 영토를 지나가는 황제를 영접했다.
광해는 후금의 처사를 칭찬하고선 곧바로 후금과 북원 간의 국경을 돌파했다.
철산 돌격기마 병단을 앞세우고 전진하는 친정군은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뭉개버렸다.
그것엔 겁 없이 저항해온 작은 전사 집단도 그들의 민간 부락도 구별이 없었다. 그것은 아무리 적일지라도 민간인과 군을 철저하게 분리하여 다루던 광해의 평소 기조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것으로 친정군에 참여한 장병들은 광해의 결의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 친정군을 맞아 북원왕이 이끄는 5만의 기마대가 진출해왔다.
사전 접촉, 항복 권유 등의 절차는 생략되었다. 아군의 화력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 적이 집결한 후에 전투를 시작하던 기존의 방법도 무시되었다.
광해는 북원군이 사전에 집결해 군진을 갖추고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길게 행군을 해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전군에 돌격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조선군과 함께 전투를 벌여본 경험이 많았던 북원군은 조선군의 전투 방식에 안심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집결할 동안 기다려 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광해는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광해의 명령에 철산 돌격기마 병단을 앞세운 제7기동 병단이 일제히 북원군을 향해 돌진했다. 아직 제후국들에 대한 일총의 보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장원의 무기생산시설에서 현재 생산하여 비축 중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한 나라부터 보급할 경우 자칫 특혜 논란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한 조처였다.
광해는 비축분이 각국이 제국의 요구에 의해 보유하게 되는 2만을 모두 무장시킬 양이 모이면 그때 일제히 분출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로인해 북원군은 여전히 창칼, 그리고 활로 이루어진 전통적인 살수 무장 상태였다.
그런 북원군을 향해 조선군이 돌진하며 기마총을 쏘아댔다. 8두 마차로 말 두필을 늘린 기동보군의 기동마차는 개방형에서 밀폐형으로 바뀌었다.
장갑차처럼 철로 뒤덮지는 못했지만 단단한 소나무로 지붕을 씌워 활에 대한 방호력은 갖췄다. 그렇게 씌워진 벽 사이에 만들어진 총구로 총을 내민 기동 보병의 사격도 북원군에 쏟아졌다.
젓가락처럼 길게 늘어서 전진해오던 북원군을 주먹처럼 뭉친 광해의 친정군이 두들기며 나가는 모양새가 벌어졌다.
북원군 입장에서는 도착하는 대로 조선군과 충돌하여 무너지는 형상이었고, 조선군 입장에서는 아직 전열을 가다듬지 못한 적을 각개 격파하는 상황이었다.
뒤에 떨어져 남은 이들은 뒤따라오던 산악전투 병단이 정리했다. 저항하는 자는 살려두지 않았고, 투항하는 자는 포박해 꿇려 앉혔다.
그와 같은 전투가 북원군의 행군행렬이 늘어진 30리(11Km)에 걸쳐 벌어졌다. 북원군의 대응은 무력했다.
아니 그보다는 조선군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곁을 스쳐지나가듯 총을 쏘며 달리는 조선군의 돌격 속도가 너무 빨랐던 것이다.
조선군은 달리는 말과 마차 위에서 기마총을 장탄하는 훈련을 받는다. 그것은 돌격 중 장탄이 가능함을 뜻했다.
그런 조선군의 기민함과 기동성에 안일하게 대응한 북원군은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전투는 2시간 만에 끝이 났다. 행군 상태에서 기습을 받은 셈이 되어버린 북원군은 저항다운 저항도 못해보고 괴멸되었다.
3만이 사살되고 2만이 항복했다. 맨 후미에서 따라오던 북원왕과 부족장들은 도주했다.
항복한 이들 중 장수들을 모조리 골라내어 광해가 그들을 그 자리에서 참형에 처해버렸다. 이 일도 항장을 중히 써왔던 광해의 기존 처사와는 완전히 다른 행보였다.
광해는 제국에 반하는 그 어떠한 세력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을 그렇게 밝히고 있었던 것이다.
전장을 정리한 친정군이 황실기와 삼태극이 선명한 조선기, 그리고 검은 삼족오가 그려진 조선 육군기를 앞세우고 북원 내륙으로 진입했다.
광해가 사용하는 문장은 두 가지였다.
전통적으로 조선 왕실을 상징해왔던 이화문장, 그리고 황룡과 푸를 늑대를 양쪽 발로 나누어 움켜쥐고 가운데 발로 칼을 움켜쥐고 있는 삼족오가 그려진 대한 제국 황실 문장이 그것이었다.
광해는 이번 친정에 조선왕실기가 아니라 대한 제국 황실기를 앞세웠다.
조선이 북원을 침공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에 대항하는 반도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3개의 깃발을 휘날리며 진군해오는 친정군을 피해 북원의 백성들이 모조리 도주하기에 바빴다. 군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죽여 없앤다는 소문이 퍼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