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화. 대한제국(大汗帝國) 선포!
오후에 장원에서 일단의 연구원들이 총기 몇 자루를 가지고 궐로 들어왔다.
궐내에 있는 내금위 훈련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11개국 군왕들과 수행원들에게 그들이 가져온 총기가 공개되었다.
광해가 제공하겠노라고 밝혔던 일총이었다.
각국의 군왕들과 수행원들이 충분히 살펴본 후 내금위 총병들이 일총을 잡고 시험사격을 벌였다.
활을 쏘던 곳이라 길이가 딱 1백보인 사격장 끝에 목표대가 놓였다.
그곳을 향해 종이탄피로 만들어진 범용탄을 장탄한 총병들이 사격했다.
타다탕.
세 명의 총병이 쏜 세발이 세 개의 목표대에 모조리 명중했다. 그 결과에 11개국 군왕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모두가 만족하는 표정이었다.
사격시험이 끝나고 잠시 휴식을 가진 후 대전에서 다시 속행된 회의에서 5년마다 각국을 순회하며 열리는 제국 최고회의가 확정되었다.
회의는 올해와 달리 이동의 편의를 위해 5월에 열기로 하였다. 또한 이 자리에서 차기 회의는 5년 후인, 광무 8년 5월에 명에서 열기로 했다.
조선의 태자와 각국의 왕세자들이 2년마다 모여 여는 회의를 미래회의라 칭하였고, 내년 5월에 첫 회의를 조선의 한성에서 갖기로 하였다.
태자나 왕세자가 정해지기 이전이라면 태왕이나 국왕의 전권을 위임받은 이가 참석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아울러 광해가 제안한 제국의회의 구성이 전원의 동의로 결정되었다. 이 제국의회는 제국 전체에 걸쳐 적용되는 법률을 만들어 내는 조직으로 각국이 2명씩 보내 구성하기로 하였다.
또한 각국의 이익을 대표하는 이들로써 제국대사를 임명해 조선으로 보내기로 했다. 이들이 자국의 국왕을 대리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내기 위해 제국 정부와 협상하기로 했다.
각국은 내년 5월 조선으로 모일 왕세자들과 함께 초대 제국의원과 전권대사들을 보내기로 했다. 각국의 제국의원과 전권대사는 2년의 임기를 가지며 1번 이상의 유임은 불가능하게 했다.
권력의 중심인 조선, 그것도 궐과 밀접하게 연결될 제국의원들과 전권대사들이 세력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따라서 그들은 2년에 한번 열리는 미래회의 때에 맞춰 교환을 원칙으로 했다.
조선은 그들이 머물 제국의회당과 의원들의 집무실, 관저, 대사관 건물과 관저를 책임지기로 했다. 반면에 각 의원집무실과 대사관에서 근무할 수행원들과 대사관 내부 경비 병력은 각국이 보내기로 했다.
조선은 제국의회당과 각국의 대사관, 그리고 관저의 외부경비를 맡기로 하였다.
이 자리에서 조선의 천도가 발표되었다.
실사단의 현장 확인 보고를 받은 광해가 지리원의 권고안대로 의주 남쪽에 새 도읍을 정해 천도하기로 한 것이다.
광해는 실제역사대로 그 지역을 신의주라 칭했다.
범위는 신의주만이 아니라 강건너 진흥, 단동시, 그리고 룡천일대 전체가 신의주로 명명된 것이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평안도와 서간도에 걸쳐있었으나 태왕명에 의해 왕도로 따로 떼어내었다.
그것을 11개국 군왕들에게 모두 통보한 것이다.
제국의 선포는 다음 날인 새해 첫날에 공식적으로 하기로 하고 그날의 회의를 파했다.
다음 날, 궐에 천단을 쌓고 떠오르는 새해 첫해와 함께 천제를 지냈다. 천단 앞에서 제국의 성립을 세상의 모든 신과 하늘에 고하는 제문을 읽는 광해의 뒤로 11개국 군왕들과 수행원들, 그리고 조선의 대신들이 정연하게 서있었다.
천제를 마친 광해가 뒤를 돌아 11개국 군왕을 비롯한 이들을 바라보며 엄숙한 음성으로 말했다.
“짐은 하늘의 뜻에 따라 명, 후금, 남진, 북원, 할하, 준가르, 위구르, 티베트, 카자흐, 나고야, 동일본 열한 개 나라와 조선을 합하여 제국을 세운다. 제국의 이름을 대한이라 하여 칸 중의 칸인 카간의 나라임을 만 천하에 고한다. 따르는 자 광영을 함께 나눌 것이고, 배덕한 자 창칼로 도려내 끝을 보리라.”
광해의 선언에 11개국 군왕들이 우렁차게 외치며 부복했다.
“따르는 자 광영을 함께 나눌 것이고, 배덕한 자 창칼로 도려내 끝을 보리라. 궁 기둥에 새기고, 또한 뼈에 새겨 명심하여 충성을 맹세합니다. 충!”
마지막 충자에 모조리 머리를 바닥에 대어 지극한 충성을 맹세한 11개국 군왕의 모습 위로 찬란한 새해의 햇빛이 내려왔다.
해가 떴으니 당연한 자연의 이치였지만 사람들은 상서로운 현상이라 입을 모았다.
그렇게 광무4년, 서기1606년 1월 1일. 조선 한성에서 대한 제국 설립이 공표되었다.
조선의 태왕을 황제로 옹립하여 11개국 군왕들이 충성을 맹세하고 하나의 제국을 이루었음을 천지신명께 고하였다.
그 자리에서 조선의 태왕과 11개 국 군왕들은 유목민족의 예를 따라 백마를 죽여 그 피를 묻히고, 농경민족의 예를 취해 결의주를 나누어 마셨다.
이후의 세계역사를 주도하게 되는 대한제국이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광해는 충성을 맹세한 11개국 군왕들을 제후로 삼아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자국의 통치를 일임하는 책봉을 다시 내렸다.
각국에 대한제국 명국 국왕식의 형태로 시작하는 책봉칙서와 새로 제작된 옥새가 내려졌다.
그렇게 내려진 책봉칙서에 찍히는 대한제국의 옥새는 조선과 명, 그리고 원의 옥새가 각기 반쯤 파묻힌 형태의 손잡이를 가지고 있었다.
형태를 보존하여 정통성을 살리고, 하나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명분을 살려 제작된 제국의 옥새는 3개의 옥새를 하나로 품는 과정에서 상당량의 쇳물이 사용된 까닭에 굉장히 무거워 광해가 두 손으로 움켜잡고 써야 했다.
그런 옥새가 찍힌 책봉칙서를 받아든 각국의 군왕들은 공손히 받아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명실상부한 대한제국 황제의 신하가 된 것이다.
그 모든 절차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제외되어 있었다. 그는 동일본의 실질적인 지도자일지는 모르겠으나 동일본의 왕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제는 그런 지위까지 흔들렸다. 대한제국 황제가 동일본의 통치자로 왜왕을 지명하는 칙서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인지 처음 조선에 왔을 때와 달리 총기가 살아난 왜왕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광해가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오후 대궐에서 대한제국의 성립을 축하하는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많은 이들이 진심으로 연회를 즐겼다.
하지만 몇몇은 그러지 못했다. 다른 이들이 모두 이화관으로 돌아가는 시간, 광해가 그런 이들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로 불렀다.
“장군. 세상이 참 빨리 변한다고 생각지 않는가?”
“...”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광해가 말했다.
“왕정복고가 시도될 것이다. 그것을 그대가 무력으로 막으면 그것이 동일본이 끝나는 계기가 되겠기에 불러 알린다.”
광해의 말에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입을 열었다.
“막부를... 닫으라는 말씀이십니까?”
“합의점을 찾으란 말이다. 이전보다 더 많은 것을 주어야 하겠지만 그러지 않고 버티다 나라를 말아먹은 망국지자로 역사에 기록되는 것보다는 낫겠지.”
“일정부분은 막부의 통치를 인정해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너희 나라의 제도가 그러하니 내가 일순간에 뒤엎으라 하지 못하는 것일 뿐. 나아갈 길은 너희가 찾아야겠지. 다만 한 가지. 황명을 어기지 말라. 첫 본보기는 언제나 혹독한 법이니.”
유달리 차가운 광해의 음성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잠시 망설이다 허리를 굽혔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그럼 물러가라.”
광해의 명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심스럽게 뒷걸음질 쳐 돌아갔다.
분란이 일길 원치 않았다. 큰 뜻을 품고 일으켜 세운 대한제국의 첫 출병이 동일본의 권력다툼 따위이길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경고를 주었으나 결과는 알 수 없었다. 멀어져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광해의 눈이 깊었다.
*****
광무4년, 서기1606년이 밝았다. 광해가 조선의 왕이 된 이후 새해 초하루부터 나흘까지는 누구도 궐에 출입할 수 없다는 불문율을 깨고 11개국 군왕들이 새해 문안을 왔다.
그들의 문안을 받은 광해가 덕담을 건네 새해 인사로 삼았다.
그 직후, 11개국 군왕들이 각자의 나라로 돌아갔다.
한성 외곽에 대기하던 각국 호위 병력들이 군왕들과 함께 귀로에 올랐다. 나고야와 동일본 국왕과 수행원들은 이순신 함대가 두 집단으로 나뉘어 수송했다.
복잡하던 일들이 마무리 되고 군왕들이 떠나자 궐이 다시 조용함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며칠 후인 초닷새가 되면서 각도의 관찰사들과 주요지휘관들이 대회의라 불리는 확대 문무백관회의 참석차 몰리면서 궐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더구나 올해는 관제의 변화가 예정되어있어서 더 분주했다. 광해는 육조로 되어있는 중앙관제에 변화를 주어 급격히 발전하는 조선의 현실에 적절히 대응하고자 했다.
그로인해 1월 5일 새해 첫 조회에서 발표된 중앙관제는 조선의 관리들에겐 굉장히 생소한 것이었다.
삼정승을 폐지하고 행정의 최고 책임자로 총리대신이 신설되었다. 아울러 육조를 통폐합하여 재무부, 외교부, 법무부, 병무부, 국토부, 교육부, 농업부, 산업부, 해토부(해외영토부)의 9개 부로 나누고 그 장을 장관이라 칭했다.
판소들을 사헌부를 확대 개편한 법무부에 소관시킴으로써 법원을 행정부 산하 기관으로 삼으면서 아직 삼권분립의 기초를 다지지는 못했다.
요즘 들어 확대되고 있는 소방서들을 관장하는 소방청과 조선의 치안을 담당하는 포도청은 총리대신 직할로 두어 그 중요성을 명확히 하였다.
사실 광해는 유성룡을 첫 총리대신으로 지목하길 원했으나 그가 와병 중이었기에 고사하여 이원익을 지명했다.
그간 비교적 젊은 나이에 영의정을 지냈던 이덕형이 아니라 우의정이었던 이원익을 초대 총리로 삼았던 것은 그의 식견이 조금 더 유연하도고 광해가 판단한 연유였다.
대신 이덕형은 부총리로 임명하여 총리로 보좌하도록 했다.
병무부는 과거의 병조와 마찬가지로 병력의 모병과 징병, 군수 사무를 담당케 하고, 군의 지휘와 인사는 모두 조선군 원수부에 그대로 존치하였다.
따라서 행정부는 1품의 총리대신을 기점으로 하여 2품의 부총리와 각부 장관들이 이끌어가게 되었다.
당장 광해는 새 도읍에 대한 개발과 천도작업을 지방행정과 국가 건설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국토부의 장관에게 지시했다. 이제 조선의 최우선 과제가 천도로 모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새해 첫 조회가 오전에 끝이 났다. 오후엔 대회의라 불리는 확대 문무백관회의가 열릴 계획이었다.
광해 11년을 기점으로 대회의의 성격은 완전히 변해버렸다. 임금에 대한 새해 인사를 겸해 각도의 고충을 토로하며 부족함을 채우던 회의가 완벽히 실무회의로 바뀌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육조의 관리들이 이날을 대비해서 보름가까이 야근하며 준비한다는 소기라 들릴 지경이었다. 그만큼 각도 관찰사들과 군 지휘관들의 지적과 개정요구가 빗발치기 때문이다.
그것에 답하기 위해서 육조의 실무자들이 철저히 준비를 갖춰야 했던 것이다. 더구나 회의는 태왕의 면전에서 이루어진다. 자칫 답변하나 잘못하면 그 후폭풍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점심을 마친 오후, 드디어 광무4년 전반기 대회의가 개최되었다. 각도의 관찰사, 그리고 병단장급 이상의 모든 지휘관들이 모인 확대 문무백관회의가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