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8화. 춤을 추다
전례가 없는 왕들의 소집이었다.
일국의 왕이, 아무리 상국일 지라도 다른 나라 왕의 부름을 받고 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자국 내에서의 위신 실추와 권력의 누수가 수반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명을 어길 수 없기에 순순히 응했던 6대 칸국과 남진, 나고야도 굴욕적이란 말들이 적지 않았던 연유였다.
더구나 황제의 나라에서 왕의 나라로 내려앉은 명은 당혹, 그 이상이었다.
당장 거부해야 한다는 말들이 나왔지만 누가 그 소식을 가지고 조선으로 갈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모두가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함구했다.
자칫 그 행보가 명의 운명을 파국으로 치닫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연유로 들어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고위 장수들을 중심으로 따라야 한다는 의견이 점차 힘을 받고 있었다.
아니면 태왕의 명을 정면으로 거부해야 하는데, 그럴 경우 절대로 조선군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그들의 위협적인 주장은 결국 만력제를 조선으로 향하는 수레에 태우는 결과를 만들어내었다.
명의 사서가 전하길 이때 만력제가 수레 안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명이 비교적 큰 내홍 없이 결정을 내린 반면 후금은 격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결단코 따를 수 없다는 둘째 아들 다이샨과 태왕의 명이니 당연히 따라야 한다는 첫째 아들 추옌의 주장이 극명하게 부딪쳤다.
두 아들의 의견 중 하나를 택해야 했던 누르하치가 미적거리면서 양측의 의견 충돌은 서로를 지지하는 장수들과 그들이 거느리는 병력의 대치로까지 이어졌다.
자칫 후금이 둘로 쪼개지게 생겼다는 말이 나왔을 무렵에서야 누르하치가 둘째 아들 다이샨의 손을 들어주었다.
후금이 조선 태왕의 명을 거부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 사실이 조선에 알려져 조선군이 움직이기도 전에 추옌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를 따라 연합군으로 참여했던 만주팔기와 몽골팔기의 대부분이 그렇게 군세를 일으킨 추옌의 편에 섰다.
자국군의 3분지 2가 추옌의 편에 섰다는 것에 누르하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추옌의 편에 선 군대를 지휘하는 노장들의 경우 누르하치가 신임하던 이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이샨과 그를 지지하는 장수들이 황급히 병력을 모았지만 추옌의 병력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급한 대로 한족팔기를 다시 소집했지만 그들은 냉큼 추옌에게 붙어버렸다.
과거 연합군으로 함께 참전했던 추옌과의 의리에다 종래엔 조선군을 상대할 수도 있다는 말에 공포에 질린 한족팔기가 누르하치의 편에 설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애써 병력을 불러 모아 추옌의 군사력만 늘여놓은 꼴이 되어버린 다이샨은 결국 누르하치에게 결사 항전을 권유했다.
이기지 못할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 담긴 그 소리를 들은 누르하치가 한참의 고심 끝에 홀로 추옌의 군막으로 향했다.
아비가 아들을, 아들이 아비를 죽이는 일도 비일비재한 권력다툼에서는 목숨을 거는 위험한 일이었다. 그런 일을 감행한 누르하치를 추옌은 생각 외로 정중히 맞이했다.
상석까지 양보하고 곁으로 물러난 추옌에게 누르하치가 물었다.
“조선이 그리 무섭더냐?”
“무섭기만 하다면 차라리 싸우자고 하였을 것입니다.”
“하면?”
“조선은 우리가 닮고 배워야 할 나라입니다. 그들의 뛰어난 전술과 기술을 배우지 못한다면 우린 거대한 제국을 세웠다가 얼마못가 흩어지고 무너진 몽골처럼 될 것입니다.”
“설사 그렇다 해도 조선은 우리와는 다른 나라다.”
“부왕께서 언젠가 하셨던 말처럼 저들은 선조의 나라입니다. 과거엔 우리의 조상과 함께 말을 달려 제국을 이루었던 나라 말이옵니다.”
“하나 그들은 우리를 황무지에 버렸다.”
“그들이 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나라를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그때의 나라는 우리의 나라이기도 했으니까 말입니다.”
추옌의 답에 누르하치는 한동안 말없이 그를 바라만 보다 입을 열었다.
“만대의 수치로 남을 것이다.”
“만대로 영광을 누릴 날들의 시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찌 왕이 다른 나라의 왕의 부름에 달려가 고개를 숙이는 일이 영광이 된단 말이더냐?”
“조선의 기술과 조선의 전술을 받아들여 발전을 시작하는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올곧이 우리를 쓰려할 거라 믿더냐?”
“속국을 자국처럼 대하는 나라는 없나이다. 하나 조선은 한나라로 여긴다 하는 것이 아닙니까? 믿고 기다려보소서. 그것이 안 된다면 칼은 그때 뽑아도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때가 온다면?”
“소자가 먼저 칼을 뽑아 조선을 겨눌 것입니다.”
추옌의 답에 한참 그를 응시하던 누르하치가 일어섰다.
“조선으로 갈 때 네가 보필하라.”
“기쁘게 따를 것입니다.”
고개를 숙이는 추옌을 다시 한 번 일별한 누르하치가 그의 군막을 떠났다. 그것으로 내전 직전까지 갔던 후금의 일이 다행히 큰 환란 없이 마무리 되었다.
*****
명, 후금과 달리 동일본은 완곡한 거부의 의사를 개진했다. 길이 멀고, 배가 없어 갈수 없다는 뜻을 사신을 통해 조선으로 전한 것이다.
광해는 그 동일본 사신을 이순신 함대에 태워 돌려보냈다.
배가 없다 했으니 이순신 함대를 타고 오라는 뜻이었다. 아울러 그것마저 따르지 않을 경우엔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도쿄만 연안에 정박한 이순신 함대와 그곳에서 내린 사신의 보고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해야 했다.
결국 왜왕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순신 함대에 올랐다.
이순신 함대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며 땅을 치고 눈물을 흘리는 일본 대신들과 국민들이 적지 않았다.
광무3년 12월 15일.
북풍의 차가운 바람을 가르고 달려온 6대 칸국의 칸들과 후금과 명, 남진, 나고야, 동일본의 왕들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한성에 모두 도착했다.
11개국의 군왕들은 대전의 태왕좌에 앉은 광해를 향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고개를 조아려 예를 갖추어야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스승에 대한 예를 따라 9번 절하는 것으로 그 예를 표하였다.
모든 이들의 예가 끝나자 광해가 말했다.
“먼 길을 오느라 고생들 하였다. 짐이 너희를 부른 것은 너희와 함께 너희의 나라들과 조선의 미래를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마른 침을 삼키는 이들 사이로 광해의 음성이 이어졌다.
“조선과 너희 11개의 나라를 하나로 합쳐 제국을 이루려 한다.”
순간적인 정적이 흘렀다. 개중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던지 눈을 꾹 감는 이도 있었다. 그런 왕들의 반응을 확인하고는 작게 미소 지은 광해가 말을 이었다.
“하나 너희의 왕위는 빼앗지 않는다. 자치권도 또한 빼앗지 않는다.”
나라를 하나로 합친다더니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던 왕들의 시선이 태왕좌를 향했다. 그런 왕들의 시선을 받으며 광해가 말했다.
“너희의 나라와 조선을 합해 하나의 제국을 이루되 각각의 나라는 제 왕실을 갖고 스스로 통치할 권리를 보장 받을 것이다.”
“하오면 달라지는 것이 있나이까?”
조심스러운 나고야 왕의 물음에 광해가 답했다.
“매년 일정 인원의 군대를 보내야 할 것이다. 그들은 3년 후부터 매년 너희 나라로 돌아갈 것이다. 또한 너희 11나라와 조선을 합해 모두가 적용받는 법에 따라야 할 것이다.”
“법을 하나로 한다면 사정이 저마다 다른 나라들에서 자칫 혼란이 오지 않겠나이까?”
남진 국왕의 물음에 광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세하지 않을 것이다. 큰 규범만을 만들어 강제할 뿐 세세한 것은 그 나라마다 특성이 맞춰 자국의 법에 따라 처결하면 될 것이다.”
“그러한 일은 지금도 가능한 것으로 아옵니다. 굳이 하나로 합치시려는 연유를 모르겠나이다.”
후금의 왕으로 참석한 누르하치의 물음에 광해가 답했다.
“군대를 두어 제국의 안녕을 도모할 것이며, 세수를 하나로 합쳐 균등한 발전을 이루게 할 것이다.”
“세, 세수를 하나로 합치신다함은······. 세금을 상국으로 걷어 가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그 어느 때보다 당황한 빛이 역력한 누르하치의 물음에 광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할 것이다. 하나 그렇게 걷힌 세수를 적절히 나누어 써야 할 곳에 잘 쓸 것이다. 어느 해엔 동일본에서 걷힌 세수보다 덜 투입되겠지만 그 해엔 더 필요한 후금에 그 돈이 쓰일 수도 있을 것이고, 다음해엔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오나 그리되면 각국은 어찌 운영하옵니까?”
“세수의 절반을 남겨 각국의 재정으로 쓸 것이다.”
그 말은 다시 말해 나머지 절반을 빼앗아 간다는 소리로 들렸다. 이후로도 아무리 자세히 설명하고 다시 설명해도 왕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이 보였다.
하긴 현대의 세금 정책과 예산 배분을 몇마디 말로 이해시킨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
그렇게 부족한 이해를 돕기 위해 호조와 예조에서 각국의 군왕들을 보좌해온 대신들을 상대로 별도의 공간에서 조선 연합이 실시하려는 세금과 군대. 정치 체제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날 밤, 각국의 군왕들과 대신들은 이화관에 내어준 각자의 방에서 태왕이 하고자 하는 조선 연합의 성격에 대해 이해하는 시간을 갖고 그것에 대해 논의했다.
다음 날 열린 회의에서는 다소 전날 보다 경직이 풀린 군왕들이 이것저것 물음이 많아졌다. 그런 각국의 왕들은 상국인 조선이 자신들의 것을 그저 뺏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한 듯이 보였다.
이틀간의 대전 회의가 끝난 후, 각국 군왕들과 대신들에 대한 한성 시찰이 시행되었다.
자신들의 나라와는 하늘과 땅차이가 날만큼 발달한 조선의 문물과 사회를 보며 그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다양한 물산과 제품이 늘어선 시장의 활기참에 깊은 인상을 받기도 했다. 특히 누르하치를 수행해온 추옌의 놀라움이 컸다. 상상보다 조선의 사회상이 훨씬 대단했기 때문이다.
특히 시험구간에서 운행하는 증기기관차를 탑승해 보고는 그것이 조만간 조선 각지를 달리게 될 것이라는 말에 휘둥그레 떠진 눈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은 11개국의 왕들도 다를 것이 없었다. 커다란 쇳덩이가 쉭쉭 소리를 내며 기다란 철로 위를 달리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는 이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군왕들을 수행해온 몇몇 대신들은 놀라서 주저앉기도 했을 정도로 그들에겐 충격 그 자체였다.
방직공장을 방문했을 때는 증기기관으로 순식간에 옷감을 대량 생산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고, 그 옷감을 재봉틀을 활용해 다양한 기성복으로 대량 생산해내는 조선 의류사의 공장을 견학 했을 때는 너나 할 것 없이 찬탄을 금치 못했다.
그날 밤, 광해가 궐에서 연회를 열었다.
낮에 본 조선의 선진 문물에 놀라고 흥분된 마음은 좋은 술과 다양한 음식들에 크게 들떴다. 그런 각국의 왕들이 흥분해서 조선의 문물을 찬탄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흥이 동했는지 아니면 술에 취했던지 광해가 마당으로 나서 풍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있어본 적이 없던 태왕의 모습에 조선의 대신들이 놀라 당황했지만 그 춤에 유목민족을 기반으로 한 6대 칸국의 칸들이 참여하고, 나고야와 남진의 왕까지 끼어들자 종래엔 누르하치가 흥을 참지 못하고 그 속에 섞여 들었다.
일어서 함께 춤을 추지 못한 것은 명국의 왕과 동일본의 왜왕, 그리고 대신들과 함께 뒤에 앉아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뿐이었다.
하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 자리에 낄 자격을 얻지 못했으니까. 추고 싶어도 출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것일 테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