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2화. 조선군의 전통(傳統)
제7기동전단이 떠난 직후, 이순신이 참모를 불러 포로로 잡힌 몽골 기마대를 뒤져 고위 장수와 부족장들을 한자리에 모으도록 지시했다.
조선군엔 한 가지 전통이 있다.
사실 오래된 것이 아니니 전통이라 부르는 것이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조선군은 이것을 전통이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았다.
이 전통은 두만강변의 야인 여진과 전투를 거치며 처음 생겼고, 정왜 전쟁을 통해 완전히 자리를 잡았으며, 후금을 만주에서 몰아내며 그 결실을 맺었다.
조선군이 전통이라 부르는 이 행위는 점령지의 백성과 군대를 조선의 백성이자 아군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으로 조선군은 적지에서 보급을 얻고, 충성스런 군대를 충원할 수 있었다. 이것에 재미를 들였던 것이 신립이고, 정왜 전쟁 내내 그 효용을 유심히 지켜보았던 것이 이순신이었다.
그는 그 전통을 몽골에서도 이어가고자 했다.
포로들 속에서 찾아낸 고위 장수들과 부족장들의 수가 무려 서른이 넘었다. 수십 개도 넘는 부족들이 참여한 까닭이었다.
실제로는 이들보다 더 많았지만 전투의 와중에 죽거나 다친 고위 장수와 부족장들이 적지 않아서 모을 수 있는 이들은 이것이 다였다.
그렇게 불려나와 잔뜩 굳은 표정으로 모여 있던 고위 장수들과 부족장들에게 이순신이 다가왔다.
중무장한 호위병들과 수많은 참모들이 함께 따라온 탓에 단박에 상대의 지위가 상당히 높음을 알아차린 몽골 장수들과 부족장들의 긴장감이 높아졌다.
그들에게 이순신이 말했다.
“전투에서 사로잡힌 포로의 처우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순신의 말을 함께 온 한 몽골 부족 출신 장수가 통역했다. 통역병을 쓰지 않고 장수를 활용한 것은 몽골 출신이어도 조선군에선 중하게 쓴다는 것을 은연중에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포로로 잡힌 몽골 고위 장수들과 부족장들은 조선군 장수 복장을 한 이가 몽골말을 하는 것에 꽤나 놀란 눈치였다.
그런 포로들에게 몽골출신 조선군 장수가 자신의 부족과 고향을 이야기하고, 거기다 더불어 직급을 말하자 포로들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병단장이 뭐요?”
“1만의 병력을 지휘하는 자를 말한다.”
“마, 만인장! 조선군이 몽골 장수에게 만인장을 맡긴단 말이요?”
“나 말고도 두세 명이 더 있다. 조선에선 출신을 따지는 것이 어명으로 엄격히 금해져 있다. 그러니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몽골 출신 조선 장수의 답에 포로들 속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그런 이들을 향해 이순신이 말을 이었다.
“따라서 너희들도 어찌 될 지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순신의 말이 통역되자 술렁거림도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조선군이나 다른 연합군의 처리방식은 잘 모르겠지만 몽골군의 포로 처리방식은 세 가지다.
노예로 삼거나, 재미삼아 죽이거나, 아니면······. 동료가 되거나.
각자의 상념에 잠겨있던 몽골 포로들에게 이순신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의 방식도 너희의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따라서 너희에게도 기회는 있다. 뜻을 함께하여 우리와 동료가 되면 된다.”
다시금 술렁임이 일었다.
그런 이들에게 이순신이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거짓으로 합류한 이들의 부족은 세상 끝까지 추적하여 모두 불태우고 부족민 전원의 목을 베어 효수할 것이다.”
고집스레 굳게 내려앉은 눈빛은 그것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대변하고 있었다. 포로들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강권은 하지 않는다. 너희 같은 약졸들은 있으나 없으나 내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다만 태왕 폐하의 어명이 계셨기에 묻는 것일 뿐이다.”
이순신의 말에 여기저기서 이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세상천지에서 몽골 제부족들에게 약졸이라 말하는 이를 처음 본 탓이었다. 그로 인해 자존심이 상했지만 달리 반론을 펴는 이들은 없었다.
실제로 자신들이 부딪쳐본 연합군은 그들이 그간 상대해온 그 어떤 군대보다 강하고 특이했기 때문이다.
그런 포로들에게 이순신이 말을 이었다.
“결정의 시간을 오래는 주지 못한다. 괜히 시간을 낭비하는 건 원하지 않으니까. 거부는 자유다. 알겠지만 점령하고, 나아갈 길은 먼데 포로의 수가 너무 많다. 함께하지 않는 이들 중 부상자는 목을 베고, 나머진 노예로 삼아 연합국 각국으로 보내질 것이다. 결정은······. 2시간 후에 확인하겠다.”
통역을 맡은 몽골 출신 조선군 장수가 1시진 후에 결정을 듣겠다고 말하자 포로들이 술렁거렸다. 그들에게서 너무 짧은 시간이라는 말들이 나왔지만 이순신은 요지부동이었다.
그 말만 남겨둔 채 이순신이 떠나자 고위 장수들과 부족장들로 이루어진 몽골 포로들 사이에 깊은 침묵과 갈등이 내려앉았다.
그런 이들을 뒤에 두고 돌아가면서 후금군을 지휘하고 있던 추옌이 이순신에게 물었다.
“설득을 하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까? 상장군.”
“등을 맞댈 동료를 찾음에 있어 조선군은 기회는 주어도 구걸은 하지 않소이다.”
“하나 저들은 불안할 것이고, 위협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 때라면 돌아서기 보다는 죽기로 마음먹을 가능성이 더 높다 봅니다만.”
“상황에 따라 바뀔 마음이라면 처음부터 받지 않는 것이 낫소이다. 이래서, 또 저래서 바뀌는 마음은 믿을 수 없기 때문이오.”
이순신의 답에 추옌은 상당히 놀란 표정이었다. 실제로 후금은 몽골 제부족들을 합류시킬 때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설득작업을 벌였다.
조선처럼 기회만 던져주고 선택을 강요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다는 몽골족의 특성 때문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뛰어난 전술을 가진 이, 조선군 상장군의 이번 계책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추옌은 생각했다.
몽골군과 대치해본 경험을 가지고 있는 후금이나 명, 남진군의 장수들은 추옌처럼 생각하는 이들의 수가 많았다. 물론 동일본이나 나고야 왕국 장수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지만 말이다.
그들에게 패장은 승자의 선택에 복종할 의무가 있었다. 그게 싫었다면 할복을 청하던가, 아니면 자결해야 했으니까.
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이 모인 연합군 장수들만큼이나 뒤에 남겨진 몽골군 장수들과 부족장들의 생각도 복잡했다.
그 중에서 가장 크게 차지하고 있던 것은 몽골이 더 이상 저항을 이어나갈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이었다.
이번 일에 몽골 제부족이 동원한 군세는 25만에 달했다. 아직 각각의 부족엔 전사들이 남아있었다. 원정을 떠나면서 모든 전사를 데리고 나오는 법은 없으니까.
그러니 추가적인 병력 동원의 여력은 있었다.
문제는 남아있는 부족민들이 어찌 받아들일 것이냐는 점이었다.
자그마치 25만을 동원하고서도 서전에서 수만을 날려먹고, 나머지도 대회전에서 풍비박산이 났다. 종래엔 살아서 도주한 병력은 채 1만이 되지 않았다.
그런 처참한 패배의 상대는 여전히 20만에 가까운 병력을 유지 중이다.
어떤 부족도 그런 상대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을 것이다. 복수? 그것에 남아있는 부족들이 자신들의 안위를 걸 것인지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던 장수들과 부족장들의 눈에 후방에 빠져있던 치중대와 후군이 합류하면서 대규모 보급이 이루어지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산처럼 쌓인 보급품에서 부서진 무기와 장구류를 손쉽게 교환해 가는 병사들의 모습에 휘둥그레 떠진 눈을 감추지 못했다.
약탈을 벌여 모은 것도 아니건만 저만한 물산이 전장에 집적되는 것을 몽골인들은 결단코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포로들이 주변을 감시하고 있던 연합군 병사들 중 몽골족 출신을 찾아내 물었다.
“저게 다 어디서 온 것이오?”
보급에 관한 사항은 기밀이다. 더구나 질문을 던졌던 자는 얼마 전만 해도 적이었던 이였다. 본래대로라면 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질문을 받은 병사는 순순히 답했다. 그들이 자신의 답에서 무언가를 느끼고 살아남을 기회를 잡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직전까지는 서로 죽이기 위해 사력을 다한 적이었다고는 해도 그들은 자신과 같은 몽골족이었으니까.
또 하나, 일개 병사인 자신이 고급 정보를 알 턱도 없고 모든 병사들이 아는 그저 그 정도 수준이니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후방에서 옵니다. 치중대를 통한 보급은 모두 후방을 통하니까요.”
“매번 저리 오는 것이오?”
“초기 보급은 부대가 보유한 것을 활용하고 며칠 후면 선발 치중대가 1차 보급을 가지고 당도할 것입니다.”
“하면 매번 저리 많은 보급물자를 받는단 말이오?”
“저건 적죠. 1차 보급은 아마 저 물량의 배는 될 겁니다. 적어도 마차 수천 대 분량은 될 테니까요.”
“그 많은 물량을 도대체 어디서 만들어 내는 거요?”
“그야 각 군수기지들이겠죠? 저게 많기는 해도 별거는 아닙니다. 조선의 무역항에 가면 저거의 몇 배는 되는 물자들이 거래되기 위해 쌓여 있으니까요.”
“조선이라는 나라가 그렇게 풍족하오?”
“태왕국입니다. 세상의 중심이고, 모든 부가 모이는 나라죠. 당연한 것을 묻는 군요.”
병사의 답에 과장이 있을 지라도 눈앞에 보이는 보급물자의 양은 정말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많았다. 그것이 포로들의 갈등을 높였다.
몽골 부족들은 언제나 풍족함과는 먼 생활을 해왔다. 애초에 부족단위를 넘어 떼거리로 몰려다니기 시작했던 것도 다 먹고 살자고 주변으로 약탈을 나가면서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그것은 서쪽의 오이라트나 타타르도 마찬 가지였다. 그들이 차지한 땅은 풍족함과는 거리가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의 눈앞에 산처럼 쌓인 곡물과 보급물자가 보였으니.
시간은 금방 흘렀다.
다시 찾아온 이순신의 물음은 간결했다.
“결정은 내렸는가?”
이순신의 물음에 포로들 사이에서 질문이 나왔다.
“합류한다면 처우는 어찌 되는 거요?”
“정신 못 차렸군. 질문은 받지 않는다. 난 너희들의 답을 듣길 원할 뿐이다.”
이순신의 답에 포로들만이 아니라 연합군 장수들 사이에서도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
좋은 조건을 제시해 마음을 빼앗아야 할 순간에 면박을 주어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번엔 동일본과 나고야 장수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조건을 후하게 제시하여 마음을 돌리게 만드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슨 생각에서인지 이순신은 더 이상의 설득을 할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그것은 다른 조선군 장수들도 마찬가지여서 무표정한 얼굴들이었다.
그런 기류를 못 알아차릴 포로들이 아니었다.
대번에 그들은 조선과 다른 나라의 처분과 처우가 다를 것임을 알아차렸다. 문제는 지금 자신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조선군 장수들 속에 서 있는 몽골 출신 장수였다.
그조차도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였다는 것이 포로들의 마음을 잡아끌었다. 그런 반응이 말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조선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생각이 그에 미치자 직전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조선에선 출신을 따지는 것이 어명으로 엄격히 금해져 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를 가리켰다. 조선은 자신들을 굳이 원하지 않는다. 안와도 아쉬울 것이 없고, 오면 그만이고.
출신을 따지지 않고 중용한다면, 산처럼 쌓인 물산이 풍부한 나라라면, 굳이 자신들이 아니어도 사방에서 조선으로 몰려드는 이들이 적지 않을 테니까.
비로소 한때 내몽골, 외몽골 할 것 없이 풍족한 남쪽 나라의 소문이 돌았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실제로 그 소문에 이끌려 남쪽으로 내려간 부족이나 집단들도 있었다.
그들이 어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 후로 소식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남은 이들은 관심을 끊었고, 소문은 여전했지만 더 이상 움직이는 이들은 없었다.
그 기억이 새삼 이 순간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런 부족장들 중 한명이 물었다.
“혹, 외몽골에서 합류한 이들도 있소?”
물음을 받은 몽골출신 조선군 장수가 뒤를 돌아봤다.
“여, 2111대장. 너 찾는다.”
몽골 출신 병단장의 부름에 기라성 같은 장수들이 왕창 몰려있는 탓에 맨 뒤에 서있던 2111대장이 고개를 내밀었다.
“저요?”
그 답에 몽골 포로들의 시선이 모조리 그에게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