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6국 연합군
지난해부터 시작된 동북아 5개국, 아니 남진이라는 국호를 내걸은 방해군까지 6개국에 걸친 외교전으로 해가 바뀐 광무2년 2월. 명이 조선의 뜻을 좇아 남진의 건국을 용인했다.
그 덕에 명은 2만의 병력만 내놓는 것으로 태왕의 허락을 얻었다.
방해군 장수들의 추대로 마림이 국왕에 오른 남진이 그런 명의 아래쪽에 공식적으로 건국되었다. 그들이 사신을 보내 대순왕의 책봉을 받아 갔다.
조선 해군 11, 12, 13, 3개의 수송함대가 총동원되어 동일본의 요코하마와 나고야 왕국의 쓰루가(敦賀, 돈하)에서 각기 2만씩의 병력을 실어 상해로 옮겼다.
그들과 남진군 5만 병력이 명의 영토를 가로질러 행군할 때 명군 2만이 합류했다. 그들이 후금의 영역으로 접어들어 행군을 계속했다.
그들은 누르하치가 2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주둔해 있는 태원까지 진출할 계획이었다.
그쯤 광해가 이 연합군을 지휘할 최고 지휘관 인선에 고심하고 있었다.
연합군에 투입할 제7기동전단장인 신립이 가장 먼저 고려되었으나 광해는 여전히 직선적인 그의 성품이 다국적군을 지휘하기에 적당치 않다고 판단했다.
대신들이 육군 총사 권률을 천거해 올렸지만 그도 광해의 마음에 차지 않았다. 수성에는 어떨지 몰라도 공격군의 지휘에 적당한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의 고민 끝에 광해가 해군 총사 이순신을 궐로 불러들였다. 광해는 이미 환갑을 지난 역전의 노장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연합군의 지휘를 총사에게 맡기고자 하는데 맡아보겠소?”
“소신, 그것이 조선을 위하는 일이고, 폐하의 명이시라면 어디인들 마다하겠나이까. 맡겨 주소서.”
“긴 시일이 걸릴 일이오.”
“장수의 본분이 전장에 사는 일이니 괘념치 마소서.”
“바다와 같지 않을 터인데 괜찮겠소?”
“소신, 적을 맞아 싸우는 것이 육지가 바다와 다르다 생각지 않사옵니다. 전력을 기울여 신명을 다할 것이옵니다.”
“경을 믿고, 내 그대에게 연합군 총사의 직을 내리리다. 이기고, 무사히 돌아오시오.”
“명을 받잡나이다. 폐하.”
다음 날, 대전에서 열린 조회의 와중에 광해가 공식적으로 이순신을 해군 총사에서 풀어 연합군 총사의 직에 제수했다.
해군 장수에게 육군의 지휘관을 맡긴 일이었기에 재고해달라는 대신들의 간언이 있었으나 광해가 모두 물리치고 이순신에 대한 신임을 확고히 했다.
모든 문무 대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광해가 이순신에게 어검을 내려 명을 따르지 않는 자, 그가 누구라 할지라도 선참후고(先斬後告)하여 군령의 지엄함을 세우라는 명을 내렸다.
정북상장군 겸 육국연합군 총사의 직책을 내려 받은 이순신이 몇몇 참모들과 함께 서간도로 향했다. 그는 도착과 동시에 기다리고 있던 신립의 제7기동전단을 이끌고 태원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이순신이 해군 총사의 직분에서 물러난 까닭에 비게 된 자리에 광해가 부총사였던 이억기를 임명함으로써 조선 해군 최고 지휘관의 자리가 비지 않도록 했다.
광무2년, 서기로는 1605년 3월.
태원에 모인 6국 연합군은 총병력 21만에 달하는 대군이었다. 그 대군이 정북상장군 이순신의 지휘로 태원을 출발했다.
아무리 상국이라 하나 일국의 군왕이 장수의 지휘를 받을 수 없다하여 누르하치는 합비로 돌아가고, 그의 큰아들 추옌(褚英, 저영)이 대신 후금군을 지휘해 따랐다.
이당시 나이가 스물여섯이었던 추옌의 부족한 경륜을 채우기 위해 누르하치는 다수의 노장들을 참모로 딸려 보냈다.
태원을 출발한 연합군은 몽골군이 주둔중인 오란찰포와 마주한 대동(大同)까지 진출해 군영을 세웠다.
5만의 전단 병력 전체가 기마대와 기동보병으로 구성되어 기동화 되어있던 조선군은 급속 이동이 가능했지만 그 외 국가의 군대는 대부분이 보군이라 충분한 휴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후금군이었다.
2만의 만주팔기와 몽골팔기는 모두 기마대인데 반해 나머지 3만의 한족팔기는 전부 보군이었다. 기동성을 중시하는 후금군답지 않은 구성이었지만 조선이 요구한 병력을 채워 넣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틀을 대동에서 휴식을 취한 연합군의 군영에서 이순신이 2전단에서 지원한 2111첩보정찰대의 대장, 유림을 불렀다.
“적병이 얼마라 했더냐?”
“가장 마지막 정찰 보고에서는 15만 이었습니다.”
“모두 기마대였고?”
“예. 말의 수가 병사들의 수에 두 배에서 세배에 이른 다고 하였습니다.”
몽골군 특유의 편제다. 병사 하나가 두세 마리의 말을 끌고 달리기 때문이다.
“화포는?”
“화포에 대한 보고는 없었습니다.”
“없었다는 것이 보지 못했다는 것이냐? 아니면 저들이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더냐?”
유림은 자신들의 최고지휘관이 꽤나 깐깐하다고 느꼈다. 해군에선 임진년에 벌어진 부산포 해전을 비롯해, 마카오 해전 등 대규모 해전을 모조리 승리로 이끈 전설적인 지휘관으로 통한다는데 그것이 지상 작전에서도 통용될지 유림은 궁금했다.
“뭘 하는가? 상장군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참모를 맡은 한 장수의 질책에 상념에서 빠져나온 유림이 서둘러 답했다.
“화포를 목격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있다면 여러 차례의 정찰에서 단 한 번도 목격되지 않을 리 없으니 보유하지 않았다고 판단하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유림의 답에 고개를 끄덕인 이순신이 각국의 장수들을 쭈욱 둘러보며 말했다.
“병과를 하나로 모아 쪼갤 생각이다. 기마대와 창병, 검병, 도부수, 그리고 포병과 총병을 구분하여 하나로 모은다.”
당장 각국의 장수들이 술렁거렸다. 자신들이 보유한 군대의 지휘권이 흔들리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이순신이 어검을 앞에 세우고 바닥을 ‘쿵’하고 찍었다.
장수들이 이순신이 어검을 앞에 세웠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태왕이 어검을 내리며 상장군에게 군령을 어기면 그것이 누가 되었든 먼저 베어 버린 후 나중에 보고해도 좋다고 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합군 작전의 초기다. 자칫 본보기로라도 몇몇을 베어 군의 기강을 세울 수도 있는 노릇이었으니 감히 그것에 대항하는 이가 없었다.
그런 장수들을 바라보며 이순신이 말을 이었다.
“상대는 기마대다. 빠른 기동력과 강력한 충돌력을 가진 기마대와 전투를 치르면서 각기 찢어져 움직이면 각개 격파 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니 병과별로 모아 철저하게 연합작전으로 상대한다.”
이순신의 말에 아무도 답이 없었다. 그런 이들을 바라보며 눈가를 찌푸린 이순신이 노한 음성을 토했다.
“입이 없다면 너희와 마주 앉아 군략을 논할 가치가 없다. 다시 장수들을 보내 달라 청해야 하겠는가?”
이순신의 물음에 장수들이 뒤늦게 답했다.
“아닙니다. 상장군.”
“하면 따르라.”
“충!”
일제히 군례를 올리는 장수들을 이순신이 고압적인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직후, 명을 수행하기 위해 각자의 부대로 흩어지고 맨 마지막에 나서는 신립을 이순신이 불렀다.
“신 장군.”
“예. 상장군.”
“중심은 조선군이오. 무슨 일이든 흔들리지 마시오.”
이순신의 말에 신립이 씨익 웃었다.
“예. 걱정 마십시오. 중심 딱 잡고, 상장군의 명에 한 치의 오차도 따를 것입니다.”
생각보다 순순히 복명을 말하고 있었기에 이순신이 다행이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군과 7기동병단을 믿으리다.”
“충!”
군례를 올린 신립이 지휘막사를 나갔다.
자신이 맡아야할 자리를 빼앗겼다 느끼고 있었던지 권률은 한성을 떠나는 이순신과 마주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신립도 걱정이었는데 반응 상, 그는 다행히 잘 따를 모양이었다.
얼마 후, 각국의 군대가 병과별로 흩어져 모였다. 동일본군과 나고야군의 아시가루들이 모이고, 명군과 남진군의 창병들이 합류했다. 또한 그곳에 후금 한족팔기 중 창병들이 추가 되었다.
검병은 또 검병대로, 도부수들은 도부수들대로, 기마대도 그렇게 국가를 구별하지 않고 병과로만 모였다.
총병과 포병도 마찬가지였다. 각국의 다양한 포가 모이고 화승총이 주를 이루는 총병들도 모두 모였다.
흩어지지 않고 편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조선군뿐이었다. 상장군 이순신의 명이었기에 그것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치 못했다.
기마대는 후금군을 지휘해온 추옌에게 맡기고, 창병은 남진군을 지휘해온 정벽에게 주었다. 아울러 검병은 동일본 지휘관에게, 도부수들은 명군 지휘관에게 맡겼다.
총병과 포병은 조선군이 맡을 거라던 예상을 뒤엎고 나고야 제2병단장에게 맡겼다.
그나마 조선 군사고문단에 의해 훈련된 나고야 병단을 지휘해본 그가 가장 알맞은 지휘관으로 선택된 것이다.
병과별 분리 구성이 끝나자 대동 벌판에서 훈련이 벌어졌다. 각기 달랐던 지휘체계를 하나로 묶어 확고히 하고, 병사들이 손발을 맞추는 것에 중점을 둔 훈련이었다.
보름간 이어진 훈련으로 지휘체계가 서고 병사들이 서로의 등을 맡길 정도가 되자 이순신이 출병을 명령했다.
3월의 마지막 날, 2111대의 선도로 연합군이 몽골군이 모여 있다는 오란찰포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
오란찰포에 모여 있는 몽골군의 수는 이제 20만에 육박했다. 가깝게는 내몽골에 남아있는 몽골 부족들이 보내온 전사들에 멀게는 오이라트와 타타르 제부의 부족들이 보내온 전사들까지 뒤섞여 있었다.
그 탓에 수십 개도 넘는 지휘체계가 존재했고, 지휘관도 각각으로 난립해 있었다.
사실 오란찰포에 모여 오랜 시간 머물고 있던 연유도 그런 복잡한 명령체계를 하나로 묶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정리하고 몽골 전사들을 하나로 묶어야 할 에카 바카투루는 카라코룸에서 부족장들과 지루한 논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대칸의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힘으로 완벽하게 모든 제부를 누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특히 오이라트와 타타르의 기세가 강했다.
오이라트는 중국 땅을 차지하면 서쪽을 모두 떼어내 독립을 용인하겠다는 말에 따라나섰고, 타타르는 다시 몽골 고원으로 진출하는 것을 허용하겠다는 말에 따라 나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힘으로 복속시켜 충성을 받아낸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들이 에카 바카투루의 그런 말들에 움직였던 것은 중국 땅이 혼란으로 소용돌이 치고 있다는 이야기들을 수도 없이 들어왔던 까닭이다.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에 휘둘릴 정도로 중국이 약해졌으니 자신들이 이전처럼 저들을 찍어 누르고 중국 땅을 제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에카 바카투루가 힘으로 제압해 완전히 복속시킨 것은 중심에 서 있는 할하부뿐이었다.
나머지는 그런 에카 바카투루의 설득과 옛영광을 재현하자는 구호에 이끌려 나온 부족이었다. 당연히 에카 바카투루의 말이 잘 먹히지 않았다.
그것이 수십만의 대군을 모으고서도 여전히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지 못한 이유였다.
모여서 아직 도모도 해보지 못한 중국 땅을 어찌 찢어 가질지, 언제 오이라트는 독립을 취할지, 타타르는 언제 몽골 고원으로 돌아와도 되는지를 두고 저들끼리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끝을 보았다. 저들이 합의에 이르러서가 아니라 연합군의 진군 소식이 카라코룸에 도달한 까닭이었다.
연합군의 수가 오란찰포에 모여 있는 몽골군의 군세보다 많아 보인다는 보고에 비로소 에카 바카투루가 오란찰포로 향했다.
그런 그를 따라 다수의 족장들이 모조리 오란찰포로 향했다. 드디어 동아시아 전체가 휘말리는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