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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136화 (136/325)

제136화. 에케 바카투루

11월, 서리와 함께 명나라 내부 반란 소식이 조선의 한성으로 전해졌다.

방해군이 광동을 기점으로 거병을 하여 명나라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는 소식이었다.

다만 그 반기가 즉각적인 무력행사를 통한 남창 조정의 붕괴를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아서 아직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고 있었다.

물론 그런 상황이 언제 전투로 악화될지 알 수 없었던 홍콩시 주둔 조선군 제62병단은 비상대기에 들어갔다.

아울러 해당 사실을 상위 부대인 6전단에 보고했다.

홍콩의 보고를 받은 6전단은 해당 사실을 한성의 육군 총사부에 보고하는 동시에 대만섬에 주둔 중이던 6전단 예하 63병단 일부병력을 홍콩으로 증파하기 위해 해군에 수송함대의 지원을 요청했다.

수군은 부산포와 홍콩 간 보급수송을 담당하고 있던 133수송전대를 보내 해당 작전에 투입시켰다.

해모수급 전열함 1척과 왕건급 호위함4척, 조선무역선 10척으로 이루어진 133수송전대의 병력 수송능력은 최대 3천명이다.

그들이 대만섬과 홍콩을 3번 왕복하여 5천의 병력을 수송하고, 대규모의 장비와 보급을 실시했다. 이로써 홍콩엔 62병단과 63병단의 일부를 포함해 1만5천의 중무장 조선군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게 되었다.

그 상황에서 명의 반란은 남창의 조정도, 심수의 방해군도 움직이지 않는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

동북아의 질서가 조선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재편되던 시기, 유럽도 상당히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잉글랜드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1년 전인 1603년에 사망했다. 그녀는 후계자를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를 마지막으로 튜더 왕조가 단절되었다.

왕위는 튜더 왕조의 피가 섞인 스코틀랜드의 국왕, 제임스 6세가 이었다. 잉글랜드의 왕으로는 제임스 1세였기 때문에 그가 잉글랜드의 국왕이 된 이후는 주로 후자로 불렸다.

그렇게 스코틀랜드의 국왕이면서 잉글랜드의 국왕이 된 덕에 그는 최초로 영국 섬을 온전히 모두 통치하는 왕이 되었다.

이전에 아일랜드가 이미 잉글랜드에 복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통일, 또는 통합을 이룬 것은 아니었고, 유럽 특유의 동군연합 형태의 통치였다. 과거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가 별도의 주권 국가였던 포르투갈을 동시에 통치했던 것과 같은 형태였다.

그렇다 해도 최초로 브리튼 섬 전체를 통치하는 군왕이었기 때문에 기대가 컸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전임자인 엘리자베스 1세의 역량에는 미치지 못하는 듯 보였다. 물론 아직 재위기간이 1년을 조금 넘기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예단하기는 이르다는 말들도 있었지만 유럽 각국의 평가는 그를 좋지 않았다.

그런 야박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는 30년간 끌어오던 에스파냐와의 전쟁을 끝내는 런던 조약을 이끌어 내었다,

끈질기게 이어오던 에스파냐와의 전쟁을 끝냈지만 그 조약으로 잉글랜드가 독립을 지원해오던 네덜란드를 버렸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런 제임스 1세 치하의 잉글랜드에서 중요한 발명이 이루어졌다.

솔직히 이것을 잉글랜드의 주장대로 ‘발명’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복제’란 말이 아마 가장 알맞은 말일 터였다.

잉글랜드가 발명했다고 주장한 것의 정체가 폭발탄이었기 때문이다. 마카오의 한 주점에서 우연히 알링턴 선장이 불발된 조선 폭발탄을 발견해 가져오면서 시작된 폭발탄 복제가 드디어 결실을 맺었던 것이다.

잉글랜드는 복제한 폭발탄의 파괴력에 굉장히 만족했던지 복제와 거의 동시에 대량 생산하여 자국의 함선들과 지상군에 공급했다.

자신들의 불법적인 폭발탄 복제에 대해 종주국인 조선의 반응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잉글랜드는 이 사실을 가능한 숨기기로 작정했다.

더구나 공교롭게도 이 시기엔 잉글랜드 군과 해상이나 육상에서 대규모로 충돌한 유럽의 군대가 없었기 때문에 잉글랜드의 의도대로 폭발탄 복제 사실은 조용히 묻히는 듯싶었다.

폭발탄 시험발사를 참관하고 온 한 해군 사관의 입방정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베이트라는 이름을 가진 이 잉글랜드 해군의 고위 사관은 외부에 발설 하지 말라는 엄명에도 불구하고 술에 취해 그 사실을 떠들어댔다.

물론 여러 사람이 모인자리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 한 것은 아니었고, 평소에 친분이 있던 한 상인에게 자랑삼아 떠들어 댔던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떠들어 댄 상대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중요 인사였다는 것이었다.

이 정보에 기대어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에스파냐라는 공동의 적을 상대하며 다져진 잉글랜드와 인맥을 동원하고,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어 복제한 폭발탄을 여러 발 빼오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핵심인사들은 그 폭발탄이 동방의 조선이란 나라에서 처음 발명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조선이 만들어낸 초선포라는 신무기를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생산해 내고 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조선의 포탄은 조선의 포에서 쏠 때 제대로 된 파괴력을 낼 것이란 생각이 나왔고, 그들은 제작기술자들을 납치해오는 극약처방까지 벌이면서 초선포의 제작기술을 확보했다.

어차피 네덜란드는 에스파냐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 정도로 과감한 시도가 가능한 이유였다.

초선포 제작 기술을 확보한 네덜란드는 곧바로 잉글랜드에서 빼내온 폭발탄의 재복제에 임했다. 그것이 성공하면 유럽에서 유일하게 초기 조선의 화포 기술을 모두 구비하는 국가, 또는 집단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

전투를 벌이기엔 가장 좋지 않다는 12월. 반기를 들었던 방해군이 결국 군사적 행동에 들어갔다. 5만의 병력을 명국의 조정이 자리를 잡고 있던 남창을 향해 진군 시킨 것이다.

겨우 2만의 병력만을 보유하고 있던 남창 조정은 급히 그 병력으로 방어선을 형성하면서 조선에 청병 사신을 보냈다.

현재 상황에서 그 어디보다 빠르게 군대를 투입할 수 있는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기 때문이다.

반란 당사자가 홍콩과 마주한 심수를 장악한 방해군이었기 때문에 가장 빠르게 조선과 접촉할 수 있었던 홍콩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명나라의 청병 사신은 공교롭게도 후금의 청병 사신이 발이 묶인 채 기다리고 있던 강소도의 상해로 보내졌다.

쾌속선과 파발을 연계한 상해의 장계를 받은 광해는 고심했다.

사실 명은 국운이 다해 어차피 사라질 나라였다. 후금처럼 외부의 위협을 받은 것도 아닌데 굳이 개입해서 억지로 그 운명을 늘일 생각이 없었다.

다만 중전이 마음에 쓰였다. 누가 뭐라 해도 명은 그녀가 태어나 자란 곳이었고, 명의 왕은 그녀의 오라비였으니까.

비답을 미룬 광해가 중전을 찾았다.

조심스러운 광해의 이야기에 중전이 답했다.

“저는 명국의 공주이기 전에 조선의 중전입니다.”

그 말이 담고 있는 뜻을 알기에 대견하고 기쁘면서도 중전의 마음이 측은했다. 그것이 광해로 하여금 한 가지 약조를 하게 만들었다.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명국 국왕의 신변엔 문제가 업도록 하겠소.”

“저는 그것이면 족합니다.”

슬프게 웃는 중전을 가만히 안아 등을 토닥거린 광해가 상해로 비답을 보냈다.

명 내부의 권력 다툼에 개입할 생각이 없으니 알아서 해결하라는 내용을 담은 비답이었다. 그 답을 들은 명의 청병사신은 노랗게 뜬 얼굴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바로 곁에서 지켜봐야 했던 후금 청병사신들의 불안감이 높았다. 자칫 자신들의 요청도 일언지하에 거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2월 중순. 외몽골로 투입되었던 2111대 요원들이 돌아왔다. 마랍지타 준사 등 일부는 남아 지속적인 첩보를 수집하기로 하고 일부만 돌아온 것이다,

최대한 빨리 전달해야 할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당 정보는 곧바로 2전단을 통해 육군 총사부로 보고되었다.

권률이 그 보고 내용을 가지고 광해를 찾은 것은 12월 24일이었다.

“할하부가 외몽골 전체를 장악한데 이어 폐하께오서 말씀하셨던 위랍특까지 복속 시킨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에케 바카투루라는 자가 카라코룸의 옛 황궁 터에 게르를 치고 몽골의 대칸으로 오른 이후 전사들을 소집하고 있습니다.”

실제역사에서는 20여년 후 위랍특, 그러니까 오이라트가 할하부를 격파하고 독립을 취해 준가르를 세우는 것인데 당장은 그 세력구도가 바뀐 모양이었다.

상념을 털어내며 광해가 물었다.

“규모는?”

“현재 오란찰포에 모여 있는 병력만 6만, 카라코룸으로 소집된 병력이 10만에 달한다고 합니다.”

“병력을 그렇게 모았을 때는 이유가 있을 터. 그에 대한 정보는?”

“몽골의 옛영광을 재현하겠다고 공표했답니다. 그것에 이끌려 서쪽으로 밀려났던 타타르까지 병력을 보내고 있어 카라코룸의 병력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는 첩보였습니다.”

아무래도 몽골은 최근 조선이 장악한 동아시아의 패권에 도전할 모양이었다. 광해는 그것을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문제는 병력이었다.

몽골의 특성상 저들의 군대는 모두가 기마대다. 현재 모여 있다는 병력만으로도 16만, 그런 대규모의 기마대가 전장을 휩쓸면 아무리 화력이 강력한 조선군일 지라도 전단급으로는 맞서기 어려웠다.

적어도 2개 전단 이상의 조선군이 필요했다. 그것은 조선이 1개의 전장에 전력을 기울인다는 의미였다. 그것도 겨우 공격에 나선 저들의 남하를 저지하는 데 필요한 전력이었다.

하지만 광해의 조선은 그렇게 수동적일 생각이 없었다.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광해가 결심을 굳히고 명을 내렸다.

“후금과 명은 물론이고, 동일본과 나고야에도 병력을 내라고 명하라. 명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방해군에 관리를 보내 군사행동을 중단하고 절반의 병력을 내놓으라고 통보하라. 거부하면 조선군이 격멸에 나설 것이라고 엄포를 놓아도 좋다.”

광해의 명에서 자신의 태왕이 동북아 연합군을 조성하여 몽골에 대항하려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권률이 격동이 가득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명을 받잡나이다. 폐하!”

자신의 명에 복명하는 권률에게 광해가 세세한 명을 추가로 내렸다. 그것을 받아든 권률이 황급히 육군 총사부로 향했다.

바야흐로 조선이 중심이 된 동북아 연합군의 유라시아 대정벌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광해의 명을 받은 예조에서 태왕의 교지를 받아든 사신이 급히 동일본과 나고야, 그리고 후금과 명으로 달렸다.

사신을 받은 4개국은 당황했다.

몽골의 침입에 직면해 있던 후금은 조금 달랐지만 멀리 떨어져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에 동원되게 된 동일본과 나고야의 입장은 당혹 그 자체였다.

특히 동일본으로써는 거부해야 한다는 의견이 쏟아질 정도로 반감이 컸다. 상황 상 어쩔 수 없이 조선의 책봉을 받기는 했으나 속국이란 생각이 옅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동일본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주재 하에 막부의 회의가 열렸다.

“조선의 요구를 거부해야 합니다! 따를 가치가 없는 요구입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저들의 요구를 수용할 아무런 연유가 없습니다.”

여기저기서 반대가 튀어나왔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에 호응하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조용히 앉아있는 하야시라잔에게 물었다.

“조선의 태왕과 마주해보았으니 그대가 잘 알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요청을 거부하면 그가 어찌 움직일 것 같은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물음에 하야시라잔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과거 한성에서 마주했던 조선의 태왕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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