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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131화 (131/325)

제131화. 조선 21개 도(道)

3월의 첫날에 열린 대전 회의에서 광해가 점령지의 분할을 선언했다.

“남간도의 규모를 키우고, 만주 지역을 4개 구역으로 나누어 각기 남간도, 북간도, 서간도, 동간도라 칭한다.”

만주 4도라 불리게 되는 이 지역은 대규모 농업 생산단지로써 키울 예정이었다.

물론 남간도엔 철산 단지를 중심으로 한 철강 산업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북간도는 송눈 평야를 통한 농경을 대대적으로 장려하여 대규모 농장지대를 건설하기 위한 개척 사업이 진행 중이었다.

동간도의 경우는 이미 삼강 평야의 개척이 끝나서 경작이 시작되어서 대량의 소출이 일어나고 있었다.

문제는 기후의 영향으로 경작 가능기간이 짧고, 작물에 제한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첫해 시범 생산의 소출량이 기존의 조선14개 도에서 나오던 모든 소출에 버금 갈 정도로 대량이 생산되었다.

서간도의 경우에도 요하 평원을 개척하여 대규모 농장지대를 건설하도록 했다.

물론 각도마다 대규모 목축사업이 병행 되었다. 광활하게 펼쳐져있는 초지를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광해의 명에 영의정이 물었다.

“하오면 명나라 땅이었다가 우리 조선의 영토가 된 곳은 어찌 하옵니까?”

“혼란을 만들 필요는 없겠지. 그대로 옛 지명을 따서 하북도, 산동도, 강소도라 칭하라.”

하북과 산동, 강소 모두 평야지대가 적지 않고, 경작 가능 지역도 상당해서 농업도 발달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광산도 가지고 있어서 다양한 광물이 채굴되었다.

그러한 경제여건 하에서 서부 3개도라 불리게 되는 하북, 산동, 강소 모두 명나라 시절부터 상당한 부를 축적해온 지역이었다.

문제는 이 지역으로 후금의 침입으로 대량의 피난민이 몰려들었다는 점이었다.

현재 서부 3개도의 인구는 천만을 훌쩍 상회한다. 아직 자세한 인구조사를 하지 못했지만 대략적인 조사 결과 조선의 나머지 지역을 모두 합한 정도의 인구가 이 3개도에 몰려있었다.

이로 인해 조선의 인구는 2천만을 훌쩍 넘어가게 되었다.

인구의 폭증은 당연히 곡물의 대량 소비를 동반한다. 다행히 조선은 작년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삼강 평야의 소출로 그 대량의 인구증가를 소화해 낼 수 있었다.

더구나 앞으로 송눈 평야와 요하 평원의 소출까지 더해지면 더 이상 조선이 곡물로 어려움을 겪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광해의 선언에 영의정이 물었다.

“하오면 저들이 북경이라 부르며 황도로 썼던 곳은 어찌 하오리까?”

“그 명칭을 서경이라 고치고, 황궁은 행궁으로 쓸 것이니 보수하여 보존하라. 아울러 북간도의 최대도시가 된 합이빈(哈尔滨, 하얼빈)을 동경, 관서도의 대판(大阪, 오사카)을 남경이라 칭하여 행궁을 설치하고 중히 다루게 하라.”

이로써 서부 3도, 만주 4도, 해외 5도의 큰 도시에 각각 행궁이 설치되게 되었다. 어느 한쪽도 홀대하지 않으려는 배려였다.

그것에 대해 영의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행궁을 설치하라는 말씀은 그곳으로 행차하실 요량이시옵니까?”

“매년은 어렵겠지만 격년으로라도 행궁으로 나아가 그 지역을 가까이서 살필 것이다.”

“길이 멀고 험하여 존체를 상하실까 우려되옵니다. 재고하소서. 폐하.”

영의정의 걱정에 광해가 고개를 저었다.

“짐을 생각하는 영의정의 걱정을 안다. 하나 멀어서 안가고, 길이 험해서 발길을 않으면 결국은 도태되고 떨어져나간다. 멀어도, 험해도 찾아가 살피고 또 보살펴야 그곳의 백성이 온전히 왕실과 조당을 섬기는 조선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짐과 그대들 모두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명심 하겠나이다.”

허리를 깊게 숙이는 대신들을 바라보며 광해가 말했다.

“이번에 점령한 대만에 해남을 통할하여 대만도라 칭하고, 홍콩을 그 대만도에 부속하여 경영한다. 이로써 조선을 21개 도로 나누어 다스리리라.”

광해의 선언에 영의정인 이덕형이 외쳤다.

“태왕 폐하의 치세가 조선 스물한개도에 골고루 뻗쳐 만 백 년을 이어갈 것이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신들이 일제히 외쳤다.

“만세, 만세, 만세!”

이래서 간신들이 들끓게 되는 모양이란 생각이 들었다. 예전엔 이런류의 아부를 들으면 몸이 꼬이고 솜털이 곤두섰는데 이젠 기분이 좋으니 말이다.

그 생각을 털어내며 광해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대들의 노력이 배가되어야 할 것이다.”

“신명을 다 받치겠나이다.”

“믿는다.”

광해의 답에 허리를 깊숙이 숙이는 대신들 속에서 영의정 이덕형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로의 확충이 너무 과하다는 공조의 의견이 나오고 있나이다. 살펴 주소서. 폐하.”

요사이 미뤄두었던 북방 제1도로가 착공되었다.

함경도 강계에서 출발해 침양(沈阳, 선양)을 거쳐 통료(通辽, 퉁랴오)로 향하는 북방 제3도로도 착공 되었는데 이 도로가 완성되면 서간도를 관통하는 도로가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아울러 의주를 출발하여 발해만의 여러 도시를 거쳐 서경으로 연결되는 발해로도 착공되었다.

각각의 도로가 모두 조선구도를 관통하는 도로의 길이와 맞먹는 규모였기에 공사기간도 길고, 소요되는 재정도 막대했다.

하지만 광해는 그 대규모 토목공사를 가장 우선시했다. 도로의 완비가 모든 산업의 기초가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각지에서 나오는 소출이 다른 지역으로 원활하게 이동되지 않는 한 상업도, 또 그걸 떠받치는 산업도 발전하지 않는다는 것을 현대를 살았던 광해가 누구보다 잘 아는 까닭이었다.

물론 대규모 재정의 소요는 상당한 부담이었다.

실제로 온성에서 출발하여 연해주를 거쳐 백력으로 연결되어 동간도를 관통하는 북방 제1도로 같은 경우에는 부족한 재원으로 수년간 착공이 미루어져왔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채굴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사도가 섬의 금광에서 금 생산이 본격화 되면서 재정적인 부담이 크게 완화되었다.

그것이 광해가 대규 재정소요가 동반되는 대규모 도로 건설을 3개씩이나 동시에 시작할 수 있었던 연유였다.

광해가 도로 건설에 목을 매는 것은 기반 시설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점령지에서 발생하게 되는 대규모 유휴 노동력을 가장 수월하게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도로 건설과 같은 대규모 토목 사업이라는 점도 작용했던 것이다.

만주 4개도만 보아도 그것은 분명했다.

유목 생활을 하던 여진 제부족들과 일부 몽골족, 그리고 야인들이라 불리던 퉁구스계 부족들과 다양한 소수 부족들이 조선의 정책에 따라 정주 생활을 시작하면서 대량의 유휴 노동력이 발생했다.

현대시대로 말하자면 대량의 실업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것을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것이 도로와 같은 대규모 토목 산업이었던 것이다.

그것으로 초기 노동력을 소비하고, 이후 그 과정에서 형성된 경제력으로 다른 고용처로 노동력을 이동시키는 것이 광해가 추진해온 조선의 경제 개발의 형태였다.

그 형태가 이번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규모의 피난민들로 대량의 실업사태와 빈곤 상태를 겪고 있는 서부 3개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서부 3개도 내의 도로 정비사업이 개시된 것이다.

‘관도’라 하여 제법 도로체계가 갖추어져 있던 명나라였기에 서부 3개도 내부의 도로망 정비 사업은 상당히 빠르게 진척되었다.

총 연장 길이로 따지면 북방 도로나 발해로 만큼이나 길었지만 이미 건설되어 있던 도로가 많아서 공사는 훨씬 수월했다.

물론 좁거나 도로가 끊어진 곳도 있고, 산을 돌거나 다리를 놓아야 하 경우도 있었지만 풍부한 경험을 가진 조선 건설단이 투입되면서 그런 공사들이 큰 문제로 작용하지 않았다.

다만 이미 말했듯이 그런 공사를 진행하면서 막대한 재정이 소요되고 있는 것은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지금 시대의 사람들의 눈에 하루에 마차 몇 대밖에 다니지 않는 지역까지 막대한 자금을 들여 도로를 뚫어놓은 공사가 불필요해 보일 수는 있었다.

하지만 광해는 안다.

그렇게 뚫린 도로가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대량의 교통량이 몰리게 되어 종래엔 좁게 느껴진다는 것을.

“도로는 산업이 발달하고, 상업이 번성하는데 가장 기초적인 기반 시설이다. 과함이란 없다. 지금 당장 과해보일 수는 있으나 그것이 미래에도 과하다는 것은 아니다. 당장 조선 구도의 도로를 보라. 건설 당시만 해도 너무 과하다는 말이 많았으나 요사이는 좁아 확장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을 상기하라.”

실제로 가장 먼저 발전하기 시작한 조선 구도의 물동량이 폭증하면서 요사이 도로의 폭이 좁아 정체가 많이 되고 있었다.

그로 인한 도로 확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그것을 광해의 지적으로 이해한 영의정을 비롯한 대신들의 허리가 깊숙이 숙여졌다.

“명심 하겠나이다.”

그렇게 허리를 숙이는 대신들 속에 철고 은행장의 모습이 보였다.

최근 광해가 철고 은행을 국책은행으로 지정하면서 은행장이 대전회의에 참석할 의무와 권한을 받았던 것이다.

그에게 광해가 물었다.

“새로 조선의 땅이 된 곳에 화폐를 유통하기 위해 대량의 화폐가 발행되었다고 들었다. 문제는 없는가?”

태왕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철고 은행장이 한발 앞으로 나서 고개를 숙였다.

“예, 폐하. 대량의 화폐가 제작되면서 상당량의 동이 소요되었으나 여러 곳에서 동광산을 확보하여 물량 수급에 지장은 없었나이다.”

“가치의 보존은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인가?”

“폐하의 명으로 사도가 섬에서 채굴된 금 중 상당량을 발행하는 화폐의 가치만큼 쌓아두고 있나이다. 또한 이전에 발행 된 화폐의 가치만큼의 금도 추가로 쌓아 가치의 변동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올 듯하옵니다.”

광해가 금으로 화폐가치를 보존하는 정책을 시작한 것이다.

철고 은행 금고에 화폐의 가치를 보존할 만큼의 안정적인 금을 쌓은 후에는 시중에 나머지 금을 유통시켜 금본위제를 조선에 안착시킬 요량이었다.

그 생각을 굳히며 광해가 철고 은행장에게 물었다.

“하면 이전에 쌓아두고 있던 은은?”

“은화로 제작하여 화폐의 유통량에 섞어 배포하고 있나이다.”

철고 은행장의 답에 광해가 걱정했다.

“너무 많은 양의 은이 풀리면 가치가 흔들릴 수 있다. 대응책은 시행하고 있는가?”

“예. 이전에 폐하께오서 지시하셨던 은의 기본 가치체를 실시하여 시중의 철고 은행 어느 지점이라도 동일한 가치로 교환이 가능하도록 하였습니다.”

은의 가치 폭락은 주의해야 할 일이었다. 실제역사에서 명도, 유럽도 겪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화폐의 가치가 폭락하면 단순히 화폐가치의 폭락으로 끝나지 않는다. 향후 화폐 제도 전반에 걸친 신용도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애써 이룩해놓은 화폐경제를 실수로 무너트릴 생각이 광해는 없었다.

“유념하여 화폐의 가치보존에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명심 봉행하겠나이다. 폐하.”

실제로 철고 은행장의 답처럼 조선의 각 철고 은행 지점들은 은의 가치를 보장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철고 은행이 발행한 은화나 은괴에 한한 것이었다.

그로인해 유럽 상인들과 거래하며 받았던 은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하락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조선 은화와 은괴에 비해 안정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조선 상인들이 무역을 위해 조선을 찾은 유럽 상인들에게 철고 은행이 발행한 조선 은화 또는 조선 은괴를 거래 대금으로 요구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것을 지원하기 위해 개항한 항구마다 외환 거래소가 설립되어 있었는데 여기서는 교환되는 유럽 은의 가치의 비율을 낮춰 조선 은 대 유럽 은의 가치를 3대2로 두었다.

다만 금의 경우는 최근 철고 은행에서 발행하기 시작한 금화나 금괴와 동일한 가치를 부여해 교환해 주었다.

이것은 신세계를 통해 대량으로 유입되고 있는 금을 조선으로 유입하기 위한 유도정책이었다.

그로 인해 유럽 상인들이 상품을 사기 위한 대금으로 은 대신 금을 가지고 오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었다.

그렇게 조선은 연일 변화하고 발전하고 있었다.

“새로 시작된 일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따져야 할 것들이 지천이고, 챙겨야 할 것이 태산일 것이다. 힘들어도 모두가 태만치 말고 정성으로 돌봐야 할 것이다.”

“명심하여 봉행하겠나이다. 폐하.”

깊숙이 허리를 숙여 복명하는 대신들을 바라보며 광해는 머릿속으로 지금의 경제 발전을 가속화할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것을 위한 첫 걸음이 장원으로 확대 개편된 증기연구소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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