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화. 제국 조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유성룡이 광해의 물음에 답했다.
“광동을 손에 쥐소서.”
“광동이면 홍콩이 속한 곳이 아닌가?”
“예, 전하. 그 광동을 쥐시면 명의 남부에 비수가 아니라 폭탄을 들여놓은 셈이니 저들이 감히 준동치 못할 것이옵니다.”
명나라의 한개 성이면 조선의 도급을 상회하는 규모였다. 당연히 조선군제에 의해 조선군 2개 병단이 상시 주둔할 것이다.
1개 단, 또는 몇 개 단이 주둔할 홍콩의 위협도와는 완전히 다른 수준의 위협이 명나라 남부에 상존하게 되는 셈이니 유성룡의 주장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것에 대해 고심하는 광해에게 유성룡의 말이 이어졌다.
“또한 조공을 과하게 물리소서.”
“조공을 과하게 물리라?”
“예. 저들이 강남이라 부르는 곳을 차지하게 되는 이상 그곳의 풍부한 물산으로 헛된 야망을 품지 못하도록 매년 많은 것을 바치도록 하소서.”
대신들도 생각이 같았던지 모든 이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그리하소서.”
그런 대신들을 내려다보는 광해의 시선에 고뇌가 깊었다.
*****
명이 살아날 길을 찾느라 분주할 때 후금은 남부로 진격할 군병을 모으고 있었다.
조선과의 강화 어디에도 명을 도모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은 없었다. 누르하치의 입장에서는 서둘러 물산이 풍부한 남부를 정벌해 조선과 맞상대할 힘을 챙겨야 했다.
그 후에 누르하치는 책봉을 거부하고 조선과 다시 맞대결을 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누르하치의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북부에서 타타르 일족이 후금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와 있던 몽골 부족과 충돌한 것이다.
실제역사와 달리 대규모의 이동이 발생하면서 몽골 고원에 남아 생활하던 타타르 일족이 위기를 느낀 것이다.
타타르는 몽골 부족들 중에서도 질기고 강하기로 소문 난 족속이었다.
더구나 그들과의 충돌이 커져 북부 먼 땅에 거주하는 타타르 족이 지원을 나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그르니 타타르 일족과의 충돌은 누르하치도 감히 태만히 할 수 없었다.
기껏 남부로 진격하기 위해 모아놓았던 5만의 대군 중 3만을 이끌고 누르하치가 직접 북부로 출정을 떠났다.
그 사이 서안 공주가 보낸 서신이 만력제에게 도달했다.
그 서신엔 고단한 상황에 처한 오라비에 대한 안부와 위로, 그리고 작은 조언을 담고 있었다.
“채, 책봉이라니······.”
달라는 물자는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땅을 떼어 달라고 해도 그리할 수 있었다. 얼마간은 각오도 하고 있었고.
하지만 책봉은 이야기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이 주는 의미는 더 이상 명 황실이 칭제할 수 없음을 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큰 충격을 받은 듯한 만력제와 달리 대신들은 다행이란 생각을 하는 듯 보였다.
당장 누르하치가 대군을 모으고 있다는 소리가 연일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가 칼날 위를 걷는 기분이었던 대신들로서는 황실의 체면과 위엄이 다소 손상되는 일이 있어도 지금 당장은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물론 일부 대신들은 감히 책봉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면 방방 뛰었지만 대세는 아니었다.
일부 대신들의 반발과 만력제의 불만이 있었지만 결국 명나라 조정은 서안 공주의 조언을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그와 같은 내용을 담은 국서를 마카오에서 돌아와 있던 조필이 직접 가지고 상해로 떠났다.
여전히 만력제와 명나라 조정은 조필을 신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성 조당의 대신들과 각도의 관찰사들이 명나라 처리의 문제를 논의하느라 예정보다 길게 상해에 남아있었던 까닭에 그 서신은 곧바로 상해 임시 행궁에서 열린 문무백관회의에 붙여졌다.
“먼저 책봉과 조공 청한 것으로 보아 저들도 급하긴 한 모양이옵니다.”
영의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광해는 궐에서 올라온 보고로 이것이 어찌 전해진 국서인지 짐작하고 있었다.
예조 참판의 조언에 의한 중전의 서신을 받고 명이 움직인 것이라고 말이다.
그 과정에서 겪었을 중전의 고뇌가 안타까웠고, 그녀의 선택이 고마웠다.
자신을 향해 직접 부탁을 해오는 것이 아니라 만력제와 명을 움직이려 노력한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결정인지 충분히 짐작하기 때문이었다.
대신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광해가 명했다.
“광동은 요구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후금과 맞대는 국경이 길고, 일부는 명과도 맞닿아 그곳을 지켜야 하는 군부의 부담이 크다. 그 상황에서 광동을 손에 넣으면 명나라 남부에 큰 위협이 되겠지만 반대로 그곳을 지켜야 하는 우리도 그에 상응한 부담을 지게 될 것이다.”
“하오시면 저들이 원하는 대로 책봉과 조공만을 받으실 것이옵니까?”
“현재 장악하고 있는 홍콩 일대와 해남을 요구할 것이다.”
“홍콩이야 그렇다하여도 해남은 큰 가치가 없는 땅이 아니옵니까?”
한때 탐라가 악명 높은 유배지로 사용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해남은 명나라는 물론이고 이전의 황조에서도 최악의 유배지로 쓰였던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해는 그곳이 현대시대에 어떤 형태를 갖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수없는 관광객이 다녀가는 관광의 보고가 될 그 땅을 떼어내 소유할 생각이었다.
아울러 대만과 홍콩을 거쳐 말라카로 향하는 길목의 징검다리중 하나로 쓸 생각이기도 했다.
그 생각을 설명한 광해의 말에 대신들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대신들의 동의에 광해가 명을 내렸다.
“명과는 그 선에서 마무리를 짓는다. 조공으로 요구할 물품들에 대해서는 예조와 호조가 상의하여 정하고 재가를 올리도록.”
“명을 받잡나이다. 전하.”
허리를 깊이 숙이는 대신들의 복명에 광해의 시선이 최근 동태평양 함대가 보급 함대와 함께 상해로 들어온 덕에 회의에 참석해 있었던 이순신에게로 향했다.
“아울러 대만에 대한 점령전을 전개한다. 수군은 해병을 전개하여 대만 점령전을 즉시 실행하라.”
“명을 받잡나이다.”
깊게 허리를 숙이는 이순신을 확인한 광해의 시선이 대신들을 훑었다.
“나라가 커지고 그에 속한 민족의 수가 더해졌다. 다름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같게 만들려 노력하지 말라. 다름은 잘못과 같지 않음이니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 방법을 찾아 조당의 대신들과 각도의 관찰사들은 신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나이다.”
크게 복명한 대신들 사이에서 영의정 이덕형이 나섰다.
“하옵고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이제 경칭을 통할하소서.”
“무슨 소린가?”
“폐하와 전하가 공존하오니 그것을 하나로 하심이 가할 줄 아뢰옵니다. 전하.”
“그러하옵니다. 더구나 명과 후금까지 속국으로 두었사오니 이제 칭제하심이 가할 줄 아뢰옵니다.”
좌의정 유성룡의 말이 더해지자 대신들이 일제히 그것이 옳다 말하며 허리를 굽혔다.
“칭제 하소서.”
대신들의 청을 들으며 광해의 가슴이 잘게 떨렸다.
자신이 칭제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왕이 칭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격동을 부른 것이었다.
그 격동을 애써 누르며 광해가 답했다.
“그리하라. 다만 경칭은 폐하로 할지라도 명칭은 태왕을 그대로 쓸 것이다. 태왕이 이미 고구려 때부터 왕 중의 왕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니 굳이 중국의 명칭을 따라 할 이유가 없다.”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태왕 폐하.”
이날 이후 공식적으로 조선 태왕의 경칭이 전하에서 폐하로 바뀌었다.
바야흐로 조선 제국의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그로인해 예조가 연호를 지어 올렸다.
예조가 관상감에 맡겨 지어 올린 수십 개의 연호 중 광해가 광무(廣撫)를 택해 내려 보냈다.
‘넓게 어루만지다’라는 뜻을 담은 이 연호가 조선 제국의 첫 연호가 되었다.
광무1년. 그러니까 서기1604년, 광해 즉위로는 광해13년 1월 말.
조선의 국서를 가진 조필이 남창으로 향했다.
아울러 1개 병단을 상해에서 실은 조선군 동태평양 함대와 제2 수송함대가 대만으로 출발했다.
조선 태왕의 국서를 받은 명은 서둘러 조선과의 화의를 진행했다.
곧바로 황태자 주상락이 책봉을 위해 조선으로 입조하기로 하고 그를 수행할 대신들을 선발하기 시작했다.
명과 후금의 책봉이 행궁이 아니라 정궁인 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조당 대신들이 상소가 빗발쳐 광해가 상해를 떠나 한성의 궐로 환궁하였다.
그것이 광무1년 2월의 일이었다.
같은 달, 23일에 명나라의 황태자, 아니 세자 주상락이 병부상서 석성과 몇몇 대신을 이끌고 책봉사신으로 조선으로 건너와 입조하였다.
후일 만력제의 뒤를 이어 태창제가 될 주상락이 제 아비를 대신하여 태왕좌에 앉은 광해의 아래에 꿇어앉아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려 전날의 망종을 사죄하고, 종속과 복종을 고하며 책봉을 청하였다.
그에 광해가 답하였다.
“명국 국왕에게 남명왕의 직책을 내려 그가 가진 땅을 다스릴 권리를 주니 무릇 위로는 상국인 조선을 겸허히 섬기고, 아래로는 백성을 귀히 여겨 무탈하게 다스려야 할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폐하.”
크게 아뢰고 깊게 숙인 주상락의 아래로 물기가 떨어지는 것을 광해가 짐짓 모른 체 하였다.
어찌 슬프지 아니할까 싶었기 때문이다.
한때는 중국 땅 전체를 아우르던 대제국 명의 황태자가 속국이었던 조선에 고개를 숙이며 충성을 맹세하는 일이었으니.
명은 홍콩 섬과 그 일대의 조선군 점령지와 해남, 그리고 다수의 섬을 조선에 영구 할애하고 영유권을 포기했다.
또한 조선으로 매해 십만 냥의 은과 1만 필의 전마, 1만두의 소를 바치기로 하였다.
그것은 1만 필의 전마만을 바치기로 한 후금의 몇 배에 달하는 과중한 것이었다.
하지만 명은 그것을 거부할 힘이 없었다.
자신들보다 뒤늦게 화의를 맺은 명이 조선에 책봉 사신을 보내 책봉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한 누르하치는 전장에 있으면서도 조선으로 책봉사신을 보내도록 지시했다.
더 늦어서 책을 잡히면 자칫 조선군이 다시 움직일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그로인해 후금의 임시 수도인 합비에서 그의 차남 다이샨(愛新覺羅代善, 애신각라대선)이 황급히 몇몇 부족장을 대동하고 조선으로 떠났다.
이 당시만 해도 후금의 관제는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서 태자조차 정해지지 않았다.
누르하치의 장남을 포함한 다수의 아들들은 전장에 있었고, 그나마 차남 다이샨이 정사에 밝아 합비에 남아 점령지의 안정을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다이샨이 책봉을 청하는 사신으로써 조선으로 향하게 된 연유였다.
그가 명나라의 세자와 마찬가지로 태왕좌에 앉은 광해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려 복종을 맹세하고, 책봉을 청하였다.
광해는 후금의 왕에게 후금왕과 더불어 북명위지장군(北明衛地將軍)이란 직책을 내렸다.
후금의 왕이자 명나라 북쪽 땅을 지키는 장군의 위를 내림으로써 남부로 내려가지 말라는 뜻을 에둘러 명한 것이었다.
그 책봉을 받아든 다이샨이 후금으로 돌아감으로써 조선은 동북아 4개국을 속국으로 둔 명실상부한 제국으로 우뚝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