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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129화 (129/325)

제129화. 오라비의 서신

“서안 공주님입니다.”

“서안 공주? 그래. 그 아이가 있었지.”

“그렇습니다. 서안 공주께 서신을 보내소서. 조선의 태왕을 설득하여 화의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이옵니다.”

“병부상서의 말이 옳다. 서둘러 지필묵을 가져오라. 내 서안에게 서신을 쓸 것이다.”

살아날 구멍이 보였던지 다 죽어가던 만력제의 얼굴에 활력이 돌아오고 있었다.

만력제의 서신이 한성의 궐에 도달한 것은 해가 바뀐 광해13년 1월 초엿새였다.

광해는 아직 환궁하지 않았다. 그는 상해에 머물며 점령 작전을 펼치고 있는 조선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궐을 떠난 태왕의 친정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인지 조선 전체가 명나라 점령전에 온 신경이 몰려있었다.

매년 열리던 문무 백관회의도 상해의 행궁에서 열렸다.

전쟁의 와중인지라 각지에 주둔하고 있던 지휘관들은 참석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지만 조선14개도의 관찰사들은 모두 상해로 이동해 회의를 열었다.

한성 조당의 대신들도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태왕이 머물고 있는 상해로 이동해 그 회의에 참석했다.

만력제의 서신이 중전인 서안 공주에게 도착한 것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였다.

조카가 태어난 것도 모르는지 온통 명나라의 위기와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자신이 행해야 하는 일들로 가득채운 오라비의 서신엔 타국으로 시집을 간 여동생의 안부를 묻는 작은 인사조차 없었다.

다정했던 어릴 적 오라비의 모습을 떠올린 서안 공주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하아······.”

중전의 한숨소리에 상궁들이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괜찮으시옵니까?”

“괜찮다.”

“혹여 힘이 드시면 왕자 아기씨는 소인에게 맡겨주소서.”

유모상궁의 말에 중전의 고개가 저어졌다.

“되었다. 전하께오서 내가 직접 돌보라 명을 하셨으니 그리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말과 함께 내려 보는 중전의 품엔 작고 앙증맞은 아기가 강포에 싸여 안겨 있었다.

그랬다. 광해는 아이의 양육을 유모에 맡기지 말라고 부탁했다.

광해는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외로움의 시작이 어린 나이에 어미의 품을 떠나 유모 손에 자라야 했던 진짜 광해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현대의 자신이 기억하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중전에게 왕자를 직접 양육하도록 부탁했던 것이다.

그가 아는 양육은 어머니가 사랑으로 키우는 것이라는 생각이 확고했다.

설사 그것이 나라를 이어받을 왕자일지라도 말이다.

중전인 서안 공주는 그런 광해의 부탁을 흔쾌히 수용했다.

어린 시절을 부모와 떨어져 유모의 손에 자라며 외로움을 느낀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늦은 나이에 갖은 고생을 해서 낳은 아이를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는 것도 마음이 놓이지 않기도 했고.

그런 중전이 중궁전 큰상궁 곁에 조용히 앉아있는 상궁을 불렀다.

“오란.”

중전의 부름에 명나라에서부터 따라와 명나라 시녀에서 조선 상궁이 된 여인이 공손히 답했다.

“예. 중전 마마.”

“가서 두 교위를 들라하라.”

“예. 중전 마마.”

공손히 답한 오란이 나가자 중전이 중궁전 큰상궁을 바라봤다.

“조 상궁.”

“예. 마마.”

“가서 예부에 남은 관리들 중 가장 높은 자를 데려오라.”

“육조의 상서 영감들과 다수의 관리들이 상해로 나가고 참판들이 남아있다고 하오니 하면 예부 참판을 들라 이르오리까?”

“그리하라.”

“예. 마마.”

중궁전 큰상궁마저 명을 받고 나가자 서안 공주가 오라비인 만력제가 보낸 서신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네 삼촌이 살려 달라는구나. 이 어미는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서안 공주의 말에 아기가 방긋이 웃었다. 그런 아기를 보며 서안 공주가 미소 지었다.

“너는 싸움과 분란이 없는 세상에서 살았으면 좋겠구나.”

서안 공주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걸까? 아기는 다시금 방긋방긋 웃었다.

중전의 부름으로 들어온 두사충이 본실 앞의 별실 문 앞에 엎드렸다.

“찾으셨사옵니까? 마마.”

“명이 위기에 처했다한다? 맞는가?”

“그리 들었사옵니다.”

“어느 정도의 위기인가?”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패망의 기운이 보인다 하옵니다.”

“패망이라······. 살아나려면 어찌 해야 하는가?”

“조선과 손을 잡는 방법 외에는 없는 것으로 아옵니다.”

두사충의 답에 중전이 물었다.

“내 듣기로 후금이 약조를 어기고 조선의 뒤를 치는 것을 명이 거들었다고 들었다.”

“소신도 그리 들었나이다.”

“하면 조선이 명의 손을 잡아줄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런 것으로 아옵니다.”

중궁전 상궁들이나 나인들이 물어다 주는 이야기의 진위를 파악하고자 물은 것이었다.

두사충의 말 대로면 들려온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란 뜻이었다.

“알았으니 물러가라.”

중전의 명에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잠시 주춤거렸던 두사충은 이내 포기했는지 고개를 조아렸다.

“예. 마마.”

그가 할 말을 짐작하기에 서안 공주는 모르는 척 그대로 두사충을 물렸다.

하긴 두사충이 일가를 데려왔다고는 하나 친척들은 모두 명에 남았다고 들었다,

그런 그가 할 말은 오라비의 서신에 담긴 이야기와 크게 차이가 없을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심란한 모습인 중준에게 중궁전 큰상궁의 음성이 들려왔다.

“마마, 예조 참판이 들었나이다.”

“뫼시어라.”

중전의 허락에 문이 열리고 예조 참판 또한 본실 앞의 별실 문턱 앞에서 예를 올리고 물러나 앉았다.

왕자를 생산한지 얼마 되지 않은 중전이었다. 거기다 그렇게 태어난 왕자가 품에 안겨 있었다.

한 돌이 지나기 전에 외인의 접근은 불허되었다. 이 시대의 의료수준 탓이었다.

그런 예조 참판에게 서안 공주가 물었다.

“어려움에 처한 명이 살아날 길이 조선의 도움을 받는 것뿐이라고 들었습니다.”

“상황이······. 예. 그러한 것으로 아옵니다.”

“명이 한일이 있으니 조선이 그 손을 잡아줄 이유는 없을 것이나 그럼에도 잡아줄 수 있다면 무슨 조건이어야 하겠습니까?”

만력제의 서신은 조필을 통해 홍콩을 거쳐 조선에 닿았다.

당연히 공식적인 파발 경로를 거쳤기에 궐에 있는 모두가 중전이 만력제의 서신을 받은 것을 안다.

감히 열어보지는 못했으나 만력제가 중전에게 했을 이야기는 뻔했다.

그것을 알기에 예조 참판은 중전인 서안 공주의 물음이 무슨 의미에서 하는 것인지 알아들었다.

“후금의 예를 보면 조선의 책봉을 받고, 전마 1만 필을 매년 조공으로 바치는 것으로 갈음이 되었나이다.”

“책봉과 조공이요.”

“예. 마마. 물론 태왕 전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달라지긴 하겠습니다만 그 정도면 전하를 설득을 하실 수는 있지 않을까 하옵니다.”

“그 정도면 대신들이 이해할 수준이 되겠습니까?”

“책봉을 받자면 칭제를 버려야 하는 일이니······. 그 정도면 대신들도 반대치 않을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마마.”

“알았습니다. 오늘의 조언은 내 잊지 않겠습니다.”

“언제라도 불러 하문하소서. 마마를 전하 대하듯 하라시는 태왕 전하의 어명이 계셨나이다.”

광해의 마음 씀이 고마웠던 서안 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것이지요. 알았습니다. 이마 물러가세요.”

“예. 마마.”

깊게 절을 한 예조 참판이 물러가자 잠이든 왕자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서안 공주가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상해에 있는 광해가 아니라 남창에 머물고 있는 오라비에게 보내는 서신이었다. 서안 공주는 오라비의 명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신이 나서 광해에게 부담을 주는 대신, 명이 스스로 상해의 광해에게 숙이고 들어가길 바랐던 것이다.

그 서신은 다시 부산포를 통해 홍콩으로, 그리고 조필의 손을 거쳐 남창의 만력제에게 보내질 것이었다.

*****

상해의 임시 행궁에서 광해는 중전에게 만력제의 서신이 닿았다는 것을 보고 받았다.

조정의 대신들이 모두 그 서신에 들은 내용을 짐작했듯이 광해도 그러했다.

회의에 참석해있던 조정 대신들과 관찰사들, 그리고 상해 인근에 배치된 덕에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던 일부 장수들을 바라보며 광해가 물었다.

“명과 화해를 하자면 어떤 조건을 걸어야겠는가?”

“명도 살려두려 하시옵니까?”

“한족은 자고로 분란이 많은 이들이다. 소수라면 모르겠으나 그들을 모두 품고 있어봐야 골치만 아프겠지. 과거 원이 끊임없는 환란에 시달렸던 것도 다 그 탓이 아니었던가.”

한족의 우월감은 끝이 없었다. 하긴 자신들이 우주의 중심이라 하여 중원이라 칭한 이들이니.

광해의 말뜻을 이해한 대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모두가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다. 일부 대신들은 달리 생각했다.

“패자이옵니다. 패자가 어찌 승자에게 저항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저들도 그것을 알 것이오니······. 부디 모두를 품어 풍요를 이루소서.”

구주도 관찰사인 고니시 유키나가였다.

하긴 해외 5도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하지만 기질이라는 것은 민족마다 다른 것을.

“그대의 충정을 안다. 하나 저들 한족은 그대들과는 또 다르니 어찌 패자의 도를 알길 바랄까. 모르는 이들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

광해의 말에도 여전히 아쉬웠는지 남간도의 관찰사인 내음타방이 말했다.

“힘으로 누르소서. 제깟 것들이 감히 신인의 군대에 저항 한들 살아날 수 있겠나이까? 그저 부수고 죽여 기를 눌러 다스리시면 되지 않을까 하옵니다.”

역시 이 또한 민족의 기질차이지 싶었다.

배달족 하나로 이루어지던 조선이 여러 민족이 섞인 다민족 국가가 되고 있었다.

그 다양성을 하나로 묶을 생각은 없었다. 그것은 또 그것대로 문제를 만들 것이기에.

그래서 광해는 다양성을 포용하고, 뒤섞어 다름을 인정하고 어울려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랐다.

“힘으로 누르는 것은 쉬운 일이다. 나의 조선은, 그대들의 조선은 쉬운 길을 가는 나라가 아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함께 가는 나라이다. 그러니 내음 관찰사. 쉬운 길은 걷지 말자. 재미없지 않은가.”

빙긋이 웃는 광해의 말에 내음타방이 크게 웃었다.

“으하하하. 신인 폐하의 말씀이 옳으십니다. 쉬운 건 재미가 없지요. 이 내음타방, 신인 폐하가 가고자 하시는 길에 발판이 되고, 돌이 될 것이옵니다. 쓰시고 밟고 가소서.”

신인 폐하.

요즘 남간도 출신 장졸들과 남간도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광해의 호칭이다.

하북의 백성들이 태왕 폐하라 외친 이후부터 존호로 폐하를 쓰는 이들이 많아졌는데 그것에 자신들이 부르던 신인을 가져다 붙인 것이다.

그것을 광해는 굳이 가르쳐 고치려 들지 않았다. 그 호칭이 아부가 아닌 순박한 존경에서 나온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내음타방의 말에 그저 광해는 빙긋이 미소지어보일 뿐이었다.

그런 광해에게 좌의정 유성룡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들의 존치를 용납하실 요량이시라면 그에 합당한 것을 받으시오소서.”

“무엇을 받으란 말인가?”

“후금의 예를 쫓으라 하소서.”

“후금의 예?”

“조선의 책봉을 받고, 조공을 바치라 명하소서.”

“책봉과 조공이라.”

예조 참판이 중전에게 했던 말과 같은 소리였다. 그것을 아뢴 유성룡이 말을 이었다.

“또한 땅을 요구하소서.”

“어디의 어떤 땅을 말인가?”

광해의 물음에 사람들의 시선이 유성룡에게로 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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