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마지막 방법
찬바람이 불어오던 10월의 첫날. 조선에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중전인 서안 공주가 무사히 왕자를 출산한 것이다.
온 나라가 기쁨으로 가득하던 시기 광해는 전선에 있었다. 그것도 기동병단에 소속되어 있던 기동보군들이 한창 압록강을 건너는 것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궐에서 전해진 소식에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한참 후, 격동을 가라앉힌 광해가 서둘러 적은 서신을 다시 전령에 주어 궐로 돌려보낸 후, 다시금 지휘에 전념했다.
지금은 죽고 죽는 전쟁의 와중이었다.
궐로 전령이 다시 달려간 직후, 또 하나의 전령이 부산포에서 달려왔다.
마드라스에서 이순신과 그의 함대가 귀환했다는 소식을 담은 전령이었다.
광해는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고, 곧바로 수군이 수행할 작전에 이순신이 나서달라는 서신을 전령을 통해 보냈다.
그리고 광해는 마지막 병력과 함께 압록강을 건넜다.
왕명에 의해 황해, 평안, 함경, 남간도에 1개씩 남아있던 기동병단들이 북방 점령지로 이동했다.
이로써 조선 본토로 불리는 구도 전체에 주둔군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4개도의 병력이 북방 점령지로 배치되자 타격 전단이 흩어졌던 병력을 모아 후금의 본거지인 건주 여진 영역으로 진입했다.
누르하치의 전령을 받고 병력을 추가로 내고 있던 후금은 당황했다.
5개 병단으로 구성된 타격 전단이 빠르게 점령지를 늘려갔기 때문이다.
타격전단은 점령지의 여진 부족들에게 한 가지만을 요구했다.
‘조선의 품에 들어올 것인가?’
아니라면 짐을 싸서 너희의 칸이 기다리는 곳으로 떠나라고 요구했다.
온 만주 땅에서 여진 부족들이 서쪽으로, 또 남쪽으로 내몰렸다.
조선에 귀의하지도 않으면서 버티는 부족은 여지없이 조선군의 공격에 마을이 불타고 온 마을 사람들이 죽었다.
망설이던 여진 제부족들의 이동이 폭증했다.
맨 마지막에 누르하치에게 병합되었던 오랍씨족이 대규모 병력으로 저항했지만 신립의 기동 전단의 막강한 전투력에 휘말려 1만이나 하는 기마대를 날려먹고 도주했다.
그 전투 이후 더 이상 만주벌판에서 조선군에 대항하는 여진이나 몽골 부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신립의 타격 전단은 병력을 나누어 북쪽으로는 사막의 초입인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까지 몰아붙였다.
그로인해 조선의 북쪽 경계는 제제합이에서 백성(白城)과 통료(通辽)를 거쳐, 적봉(赤峰)에 이르렀다.
북쪽 경계를 확장하는 병력과 달리 본대는 이동하는 여진부족을 몰며 서진을 계속했다.
4만5천의 기동보군과 함께 압록강을 건넌 광해는 유정의 기마대를 전멸시킨 조선군 기마대와 합류해 계속 남진했다.
결국 전령을 받고 요하 인근에 대기 중이던 투삼구의 기마대와 합류한 광해가 다시 정규편제를 회복한 9개 병단, 9만의 조선군을 이끌고 요하를 건넜다.
조선군의 발길을 막는 병력은 아무도 없었다.
무너져 내린 채 방치된 산해관을 지난 조선군의 남하가 과거 명나라의 황도였던 북경에 닿았다.
모든 보급을 점령지에서 충당하는 후금군의 약탈이 훑고 지나간 명나라 북부 지역은 불타고 무너진 건물들 사이사이에 굶주린 백성들이 야윈 몸에 퀭한 눈으로 조선군의 진입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광해가 치중대장을 불러 군량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여유분을 풀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제공하도록 명령했다.
지난 8월 개척이 완료된 삼강평야에서 첫 소출이 있었다.
대량의 쌀과 밀, 옥수수가 수확되었는데 삼강평야의 소출이 조선 구도의 소출과 맞먹을 정도로 대량의 곡물이 생산되었다.
그로인해 명과의 본격적인 전쟁 이후 끊어진 곡물 수입을 대체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 덕에 조선은 곡물에 관한한 여전히 풍요로웠다. 그로인해 막대한 양의 군량이 소모되는 군대의 치중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것이 광해가 굶주린 명나라인들에게 식량을 풀 수 있는 근거였다.
곡식을 나눠주는 조선군의 모습에 두려워 숨기 바빴던 명나라사람들이 주춤주춤 밖으로 나왔다.
종래엔 조선군이 지급한 곡식을 품에 안고 조선국 황제 폐하 만세를 외치는 이들이 속출했다.
힘없고, 굶주린 백성에겐 곡식을 주고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이가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그런 조선군의 행렬을 따라 명나라인들의 조선국 황제 폐하 만세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후대에 사가들이 기록하길 조선국왕의 존호에 태왕이 아니라 황제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이때쯤이라고 쓰고 있었다.
조선군은 재빨리 병력을 분산시켜 하북 일대를 장악했다.
9개의 기동군단이 빠른 속도를 이용해 크고 작은 도시를 장악하고, 도처에 조선의 점령을 확고히 했다.
소수의 지역에서 토호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조선군은 간단히 제압해 본보기로 모조리 목을 베어 효수했다.
반발에 대한 초기의 대응은 잔혹하고 과감했다.
조선의 점령을 인정할 수 없다고 버티던 관리는 그 자리에서 자신과 그 가족이 모조리 참수를 당하기도 했다.
그들의 목을 효수한 아래 적힌 죄목은 조선국 태왕 전하의 명을 어긴 대역죄였다.
전쟁의 어수선함을 이용해 일어섰던 도적무리를 조선군이 일일이 찾아내 격파했다.
산으로 숨어든 산적을 소탕하겠노라고 산 전체를 포격하여 잿더미를 만든 일도 있을 정도로 무장된 도적 집단의 격멸에 과감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최단시간 안에 점령을 마무리 지으라는 왕명에 의한 일들이었다.
조선군이 식량을 풀고, 도적의 무리를 격멸하자 민심이 빠르게 기울었다.
과감하게 목을 베어 효수한 덕인지 주저하던 명나라의 관리들이 조선에 협조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로인해 조선군 점령하의 하북이 빠른 시간에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북쪽에서 움직인 타격 전단에 의해 내몰린 여진 부족들이 하북의 조선군을 피해 산서로 내려왔다.
광해는 기동 병단들을 활용해 하북의 경계를 따라 경계비를 세우도록 해서 산서로 내려온 몽골과 여진 제부족들이 조선의 점령지로 들어서지 못하게 했다.
간혹 제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부족한 식량을 찾아 경계비를 넘어 하북을 침탈해 한족의 식량을 약탈한 여진부족과 몽골 족에 대해선 대대적인 소탕전을 벌였다.
그런 일이 서너 차례 벌어진 이후엔 감히 경계비를 넘는 여진족이나 몽골족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에 후금군의 진격로에서 비켜나 있던 탓에 피해가 적었던 산서일대가 굶주린 여진족과 몽골족의 약탈에 몸살을 앓았다.
하지만 그런 산서일대의 백성들을 지켜줄 명군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병력이 정동군과 방해군으로 동원되어 있었던 까닭이다.
결국 여진족과 몽골족의 약탈을 이기지 못한 백성들이 산서를 탈출해 인접한 섬서나 조선 점령하의 하북으로 이동했다.
광해는 그렇게 이동해오는 한족을 모두 받아들였다.
물론 조건은 있었다. 앞으로 조선의 백성으로 조선의 법을 충실히 따른다는 약조를 해야만 했다.
당장 후금에 속한 여진과 몽골 부족의 습격과 약탈에 직면한데다 가진 걸 빼앗겨 굶주렸던 산서 백성들에겐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산서의 유민들을 받아들이면서 조선군은 남진을 계속해서 산동과 강소를 점령했다.
광해의 조선군이 강소 남쪽에 위치한 상해에 닿으면서 그간 일대를 점령하고 있던 조선군 2개 병단과 합류했다.
긴 육로를 통하던 보급선이 해상을 통해 이뤄지기 시작했다.
대규모의 보급이 명나라와의 무역을 담당하던 교역선들을 통해 천진과 상해로 전해졌다.
조선과의 개전 직후 시작된 후금군의 남하로 엉망진창이 되었던 산동과 강소 일대의 안정화가 이뤄지자, 명나라 최대의 상업지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대규모의 시장이 제 기능을 찾기 시작했다.
귀환한 이순신이 동태평양 함대가 호송에 참여하면서 대규모로 확대된 교역선단의 보급품 운송이 빛을 발했다.
그런 대규모의 보급으로 부족했던 곡물이 점령지 전역에 대량으로 풀리면서 조선군 점령지의 백성들도 안정을 이뤘다.
그로인해 전력을 분할하지 않아도 되게 된 정경달의 서태평양 함대는 홍콩으로 이뤄지는 보급선 호송에 전력을 기울여 곽재우가 지휘하는 홍콩 진주군이 명나라 방해군을 옴짝 달싹 못하게 만드는 작전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었다.
그에 반해 후금군이 남하하면서 큰 피해를 입었던 하남은 산서를 다 털어먹고 남하를 재개한 여진과 몽골 부족들로 인해 큰 홍역을 치러야 했다.
여진과 몽골의 약탈은 물건만 빼앗아 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살인과 강간, 방화가 동반되었다.
도처에서 사람이 죽고, 아내와 여식이 강간을 당했으며 집이 불타올랐다.
하남의 백성들이 사방으로 피난을 떠났다.
조선 점령지의 안정과 풍요가 전해진 까닭인지 인접한 섬서나 호북이 아니라 조선군이 있는 하북이나 강소로 피난했다.
안휘로는 도주하는 백성들이 없었다. 그곳엔 합비에 주둔한 후금군으로 이미 난장판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군과의 요하 기마전의 패배를 겪은 후 합비로 간신히 도주해 온 누르하치는 하남까지 내려온 여진 부족들과 몽골 부족들에게 전령을 보내 전사들을 차출해 병력을 충당하기 시작했다.
강소만큼이나 발달해 있던 안휘일대의 풍요를 약탈해 쌓아두고 있던 누르하치의 요구를 하남까지 남하한 여진부족과 몽골 부족들이 따랐다.
이 시대엔 백성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는 굶주리지 않게 해줄 곡물이 가장 기본이 된다는 것을 다시금 증명한 계기였다.
조선군에 쫓겨 남하한 부족들로부터 다시 병력을 충원 받은 누르하치는 3만으로 확대된 병력으로 비로소 강소까지 내려온 조선군과 대치할 힘을 얻었다.
그렇다고 조선군에 다시금 칼을 들이 대는 바보 같은 짓은 벌이지 않았다.
대신 누르하치는 조선으로는 화해의 사신을 보내고, 1만의 병력을 추려 호북과 섬서, 그리고 감숙을 점령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그렇게 북쪽이 난장판이 되어가는 와중에도 만력제와 명나라 조정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연일 방해군에게 서둘러 회군하라는 전령을 보낼 뿐이었다.
그렇게 보내진 전령이 애꿎게 목숨을 잃어갔다. 심수(深圳, 선전)에 주둔한 채 홍콩의 조선군과 마주 대치한 방해군이 황제의 치죄를 두려워한 나머지 전령을 계속해서 죽여 없앴기 때문이었다.
그로인해 명나라에 심수차사란 말이 생겨나는 계기가 되었다.
태종이 함흥에 주저앉은 태조에게 보냈던 차사들이 죽어나간 것에서 생긴 함흥차사란 말과 같은 의미였다.
가면 돌아오지 않는 것을 뜻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방해군을 홍콩과 마주한 심수에 묶여 있는 채 명나라가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만주 전역과 하북, 산동, 그리고 강소 일대를 조선이 완벽하게 점령하여 안정을 이루고 있었다.
그사이 합비에 웅크린 누르하치의 후금은 안휘를 넘어 호북과 하남, 산서, 섬서, 감숙 일대를 점령하며 일국을 이룰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광해는 후금이 조선의 책봉을 받고, 매년 1만 필의 전마를 조공으로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후금과 강화를 맺었다.
이제 남겨진 것은 명나라뿐이었다. 그것을 합비의 후금군도, 남창에 주저앉아 있던 명나라 조정도 알고 있었다.
후금군이 군대를 추가로 모으기 시작했다.
조선과의 강화가 맺어진 이상 남쪽으로 진군할 기회를 잡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해당 소식을 접한 명나라 조정은 다급해졌다.
여전히 방해군은 움직이지 않았고, 추가로 모집한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다.
요사이는 모병관들조차 관복을 버리고 도주하는 일이 잦았다.
온 나라가 전쟁과 그로인한 피난으로 얼룩져서 경제가 무너진 까닭에 곡식의 소출도 엉망이었다.
당장 올 겨울을 날 곡식 조차 부족할 것이 염려되는 실정까지 이르러있었다.
자칫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가 명나라 조정을 휩쓸었다. 그 위기감 속에 석성이 조심스럽게 만력제에게 간했다.
“폐하. 조선과 화의를 청하소서.”
“청한다고 받아 주겠더냐?”
“마지막 방법이 하나 남아있나이다.”
“그것이 무엇이더냐?”
다급히 묻는 만력제에게 석성이 조심스럽게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