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122화 (122/325)

제122화. 삼분지계(三分之計)

방어로 일관하던 조선군이 불현듯 어느 시점에서 와락 달려들어 명군을 한 움큼 물어 뜯어놓고, 다시 홍콩으로 돌아가는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춰도 물어뜯기는 것을 막을 수 없을 만큼 와락 달려들 때 퍼부어지는 조선군의 화력이 너무 막강했다.

그런 상황에서 남경 조정의 바람대로 마림은 병력을 뒤로 빼낼 수가 없었다.

자칫 그렇게 줄어든 군세를 알아차리고 조선군이 총공세로 나올 것을 두려워 한 까닭이었다.

그렇게 정동군과 방해군 양쪽에서 옴짝 달싹 못하자 명나라 조정은 당장 급한 대로 후금군이 미치지 않은 지역에서 통무작위적인 징집을 통해 군대를 모았다.

그 덕에 단시간에 5만이나 하는 대군을 모을 수 있었지만 훈련은커녕 무기와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허름한 농민군일 뿐이었다.

그 농민군으로 벌판에서 강성한 후금의 기마대를 맞을 수 없다고 판단한 장수들이 그들을 이끌고 낙양고성으로 들어갔다.

명나라 조정은 농민군이 낙양고성을 방패삼아 후금군의 발을 묶어두는 동안 조선과의 화의를 모색하기로 했다.

그를 위해 병부상서 석성이 상해로 움직였다.

조선과 명이 충돌하기 얼마 전, 무역사업에 전념하기로 했다면서 철산 상단의 본점이 북경에서 상해로 이전한 까닭이었다.

그렇게 상해까지 걸음 한 석성이 조필에게 조선과의 화의 교섭에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사전에 광해에게서 지시를 받은 조필은 석성의 요청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대인. 요즘 전쟁으로 저조차 조선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저희는 조선이 아니라 명나라 상단으로 취급을 받는 까닭에······.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할 뿐입니다.”

철산 상단이 완벽하게 명나라 상단으로 위장한 까닭이다.

물론 그 뒤에 조선 왕실이 있다는 의심을 사기도 하고, 실제로 목격했다는 이들도 있었지만 조필과 철산 상단은 명나라 상단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그들의 업무처리 형태가 조선을 우선순위로 두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주장은 그런대로 받아들여지는 형편이었다.

물론 철산 상단이 유럽과의 교역을 독점하면서 이용하는 배들이 조선 무역선단이라는 것이 걸리긴 했지만 명이 활용할 수 있는 무역선단은 어차피 조선의 무역선단 밖에 없었으므로 문제를 삼을 수는 없는 부분이었다.

그것이 조선과 전쟁을 시작하면서도 철산 상단과 조필에게 명나라가 위해를 가하지 않은 연유였다.

여전히 그것을 주장하는 조필에게 석성이 사정을 이었다.

“과거에 지금의 조선 국왕을 도운 일도 있고······. 어찌 다리를 놓아 볼 수는 없겠소?”

“대인께오서 이리 말씀하시니 제가 노력을 기울여 보긴 하겠습니다만 큰 기대는 어렵습니다.”

“노력을 기우려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다름이오. 내 이리 부탁하리다.”

두 손을 맞잡아 공손히 올려 잡는 석성에게 조필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조필의 그 말에 기대를 건채 석성은 그대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명나라 조정이 조필을 통한 조선과의 화의를 모색하는 동안 버텨주기로 한 낙양고성은 기대와 달리 나흘 만에 뚫려버렸다.

후금군의 포격에 그간 보수를 소홀히 했던 서쪽 성벽의 일부가 무너지면서 후금군이 성안으로 진입한 탓이었다.

5만의 농민군이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낙양고성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남경에 도착하자 황실은 곧바로 남경을 떠났다.

자칫 후금군이 안휘까지 진출하면 황실과 조정이 남경에 고립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황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남경과 그 일대의 백성들이 도망가는 황실을 따라 모두 피난길에 올랐다.

수백만 명의 피난민들이 고향과 삶의 터전을 버리고 이동하는 참경이 길게 이어졌다.

남경을 떠난 황실과 조정은 절강의 항주로 물러났다.

조선과의 화의를 요청한 조필의 철산 상담 본점이 있는 상해와 멀리 떨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을 조필을 통해 보고 받은 광해의 파발이 거제로 달렸다.

3차 상륙부대를 태우고 막 거제항을 출발하려던 상륙함대가 그렇게 달린 태왕의 파발을 받았다.

직후 출항한 상륙함대는 거제 앞바다에서 둘로 갈라졌다.

보급품을 잔뜩 실은 2개의 조선 무역선단으로 이루어진 상륙지원 함대는 자체 호위함대의 호송 하에 예정대로 홍콩으로 향했다.

하지만 서태평양 함대가 호위하는 2개의 수송함대는 거제에서 태운 2개 병단, 2만의 병력을 실은 채 애초의 목적지였던 홍콩이 아니라 상해로 뱃머리를 돌렸다.

그날 늦은 오후, 무주공산과 다름없는 상해로 조선군 2개 병단, 2만의 병력이 상륙했다.

광해의 밀명을 받은 조필과 철산 상단의 고위 인사들이 그렇게 상륙한 조선군을 피해 도망치듯 명나라 황실이 피신한 항주로 옮겨갔다.

상륙한 조선군이 단 몇 시간 만에 상해를 완전히 장악했다.

상해에 조선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조필에게서 전해들은 만력제는 겁을 먹고 다시 파천을 강행했다.

조선군이 상륙한 상해와 항주가 지척이란 이유에서였다.

이번엔 포양호를 끼고 있는 강서성 남창으로 향했다.

홍콩에 발이 묶인 방해군과 가깝고, 황실이 머물 만큼 커다란 장원이 있다는 것이 피난지로 선택된 이유였다.

그들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듯 방해군 총병 마림이 5천의 병사를 남창으로 보내 피난 온 황제를 보위하도록 했다.

만력제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이었다.

비로소 여유를 찾은 만력제가 조필을 불러 조선과의 화의를 중재하도록 다시 명했다.

만력제는 어지간하면 조선이 원하는 건 모두 들어줄 생각이니 화의 교섭에 나설 때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말라고 주문했다.

항주에서 남창으로 피신하는 동안 물심양면으로 도운 조필과 철산 상단을 만력제가 완벽히 신뢰한 까닭에 벌어진 일이었다.

*****

낙양고성 전투에서 승리한 누르하치의 군대는 하남을 지나 안휘에서 진군을 멈추었다.

상해에 조선군이 상륙한 탓이었다. 더 이상 밀고 내려갔다가 조선군과 충돌이 생길 경우 자칫 명군과 조선군의 합의가 이루어져 사면초가에 빠질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렇게 후금의 남하가 멈춘 시점에 광해는 조필의 서신을 받았다.

이내 이항복을 교섭단 대표로 삼아 상해로 보냈다. 그에 호응해 조필이 명나라 교섭단 대표로 상해로 움직였다.

상해에 마련된 협상장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조필 혼자였다. 조선 측 대표로 참석하기로 한 이항복의 모습은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홀로 앉은 조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채 협상장에 홀로 앉아 있었다.

협상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은 이항복은 안휘의 합비에 있었다.

소수의 경호대만을 대동한 채 안휘에 멈춰선 후금군의 본대에 방문한 것이다.

갑자기 찾아온 조선 국왕의 사신에 누르하치는 긴장했다.

그렇게 긴장한 누르하치와 이항복이 마주앉았다.

“먼저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고맙소.”

온전한 축하는 아닐 것이기에 답하는 누르하치의 음성은 떨떠름함 그 자체였다.

그런 누르하치에게 이항복이 광해의 친서를 전했다. 그것을 펼쳐 읽은 누르하치의 표정이 잔뜩 굳었다.

“이것을 내가 받아들이리라고 생각한 거요?”

“선택은 칸께서 하실 일이지요. 대 조선국 태왕 전하께오선 그 선택에 따라 대처하실 것입니다.”

“그 대처라는 것이 명과의 작당을 하여 우리의 뒤통수를 치는 것이고?”

“당황하실만한 일이라는 것은 인정하오나 뒤통수라는 표현은······. 저희 조선은 이번 사태와 관련하여 후금과 어떠한 약조도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만.”

이항복의 말에 누르하치의 입이 다물렸다. 그런 그에게 이항복이 말을 이었다.

“양손에 떡이 있습니다. 다 가질 수 없다면 어느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지요. 지금 후금이 그런 입장이 아닌가 합니다.”

“반드시 택하라는 건가?”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저희 태왕 전하께오서 후금에 선택권을 주신 것입니다. 그 점을 칸께서 이해하셨으면 하옵니다.”

“흐음······.”

갈등하는 누르하치에게 이항복이 주섬주섬 품속에서 지도 하나를 꺼내 놓았다.

세밀한 지도는 아니었고, 대략적으로 조선과 명을 표시한 지도였다.

한데 그 지도에 선이 조금 이상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것을 탁자에 펼쳐 보이며 이항복이 말했다.

“과거 제갈공명이 촉왕에게 천하삼분지계를 설명했다고 하지요. 제가 공명과 같은 지자(智者)는 아니지만 칸께 아국의 태왕 전하께오서 제의하신 삼분지계를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

“삼분지계?”

“예. 이렇게 옛 고구려의 땅에 조선이, 넓고 기름진 중원을 후금과 명이 나누어 갖는 것입지요.”

“이것이 삼분지계란 말인가?”

“명은 수군을 통한 조선의 상륙을 경계해야 하고, 후금은 명을 경계해야 하며, 다시 조선은 후금과 척을 지지 않아야 하지요.”

“서로가 서로를 물고 도는 뱀과 같은 모양이로군.”

“그리 표현할 수도 있겠군요. 예, 맞습니다. 조선이 다소 강하다하나 어느 한쪽도 홀로는 둘을 상대할 수 없으니 이보다 나은 정립은 없다 보입니다만.”

“하지만 이리 되면 우리는 본거지를 잃게 된다.”

“척박한 땅을 내주게는 되나 기름진 중원의 땅을 갖게 되시는 것이지요.”

같은 사항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이야기하는 이항복의 말에 누르하치의 입에서 다시금 침음이 흘러나왔다.

“흐음······.”

“아니면 후금은 모든 것을 잃게 되실 겁니다. 설사 칸의 영도력이 빛을 발해 조선과 명의 협공을 이겨내신다 해도 결국은 척박한 과거의 땅으로 돌아가시게 되겠지요. 그것을 원하시는 것은 아니실 것이라 믿습니다.”

협박과 다름없는 이항복의 말에 누르하치의 고심이 깊었다.

누르하치는 이항복이 전한 삼분지계를 가지고 수하들과 논의했다.

예상대로 자신들의 본거지를 버려야 한다는 것에서 반발이 거세게 불거져 나왔다.

하지만 기름진 중원의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엔 욕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런 수하들과 부족장들을 누르하치가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항복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 조건을 거부하면 후금은 조선군과 명군의 협공에 전멸당할 수도 있었다.

자신의 영도력이 빛을 발해 회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따위의 입 발린 말은 아예 믿지도 않았다.

그가 겪어본 조선군의 화력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만큼 충분히 강력했으니까.

그런 누르하치의 설득이 먹혔는지 가장 반발이 심했던 한 부족장이 물었다.

“하면 우리가 차지하게 되는 지역은 어느 정도나 되는 겁니까?”

그의 물음에 누르하치가 명나라를 표시해놓은 지도를 펼쳐놓고 답했다.

“북경을 포함한 하북, 산서, 섬서, 하남, 산동, 그리고 상해를 제외한 안휘다.”

일일이 지역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말한 누르하치의 말 대로면 이른바 중원의 강북으로 불리는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럼 명은 어디를 차지하게 되는 겁니까?”

“여기 이곳이다. 호광과 귀주, 사천, 광서, 강서, 절강, 복건, 그리고 홍콩과 해남을 제외한 광동이다.”

누르하치의 설명에 다른 부족장이 물었다.

“하면 조선은 우리 땅을 모두 갖는 겁니까?”

그 물음에 누르하치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요동을 포함한 만주 전역을 모두 조선이 갖는다.”

“흐음······.”

여기저기서 불편한 침음들이 흘러나왔지만 처음처럼 반발하는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들이 차지하게 될 넓고 기름진 땅의 가치에 대해서.

그날 내려진 결정을 들고 이항복이 상해로 귀환했다. 그리고 비로소 만난 조필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날, 이항복은 조선으로, 조필은 만력제가 기다리는 남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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