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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120화 (120/325)

제120화. 양동 작전

조선군이 그렇게 준비를 갖추는 사이 압록강 인근으로까지 진출한 명군은 조선군이 화포를 대규모로 운용한다는 정보를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것에 맞서기 위해 명군도 다량의 화포를 장비하고 있었다.

불랑기를 비롯해 전통적인 청동제 화포는 물론이고, 네덜란드를 통해 구입한 홍이포에 포르투갈 상인들을 통해 장만한 초선포까지 망라되어 있었다.

명군은 도강이 시작되면 그 화포들을 압록강변까지 전진 배치시켜 강 건너편의 조선군 진영을 포격할 계획이었다.

강 건너 멀리 보이는 명군의 진지를 망원경으로 바라보는 광해에게 권률이 말했다.

“진지의 조성과 포병대의 방렬이 모두 끝났사옵니다. 명군은 결코 강을 건너지 못할 것이 옵니다.”

명군이 도강할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은 모두 네 곳, 강폭이 극단적으로 줄어드는 지점인 데다 수심도 얕은 지역이었다.

그 네 곳에만 각기 1개 기동 병단씩, 4개 병단 4만의 병력이 집중 되어있었다.

나머지 5만 중 2만은 흩어져 강변 전체를 경계 중이었고, 3만의 병력을 빼내 기동 전력으로 삼아 유사시 위험한 지역으로 급파하도록 되어 있었다.

권률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인 광해가 물었다.

“수군에서는 아직 연락이 없소?”

“예. 아직······. 심려지 마소서. 제대로 해낼 것이옵니다.”

“그래야지. 그렇게 남부를 흔들어야 요동으로 몰려든 명군이 내려갈 테니까. 그것에 대한 대응 계획은 준비가 잘 되어 가고 있는 것이오?”

“예, 전하. 경기, 충청, 전라, 경상, 강원, 5개 도에서 1개 기동병단씩을 더 차출해서 거제에 대기시켜두었나이다.”

그로인해 거론된 5개 도엔 더 이상 주둔군이 존재하지 않는다. 유사시 해당지역을 방어할 병력이 없다는 뜻이었다.

사실 그것으로 인해 군부는 이 계획에 부정적이었다.

아무리 조선군 전체가 기동화 되어 있다고는 하나 당장 동원가능한 해당지역의 방어병력이 없다는 것은 굉장한 위험부담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광해는 이 작전을 강행시켰다.

해안을 통한 적군의 상륙은 강력한 조선 수군의 존재로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후방 지역에 해당하는 그 5개도로 적군이 투사되려면 국경을 돌파해 육상을 통하는 수밖에 없다.

현재 압록강변에 집중된 조선군의 군세로 볼 때 그것도 불가능했다.

그러니 후방의 5개도가 기습당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 후면 정비를 끝마친 조선 무역선단 2개가 더 준비된다.

1차 상륙을 끝마치고 돌아온 상륙 함대에 그들을 포함시켜 거제에 대기하고 있는 병력을 곧바로 명나라의 남부로 증강 투입 시킬 계획이었다.

남부의 전투가 격화되면 명군은 요동에 전력을 집중시킬 수 없다. 그렇다고 요동에서 군대를 철수 시킬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랬다간 당장 압록강변에 집중되어 있는 조선군이 명나라의 북방으로 진출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있을 테니까.

명의 수도인 북경은 요동과 가까웠다.

그러니 명군은 요동에서 철수하지 못한다.

북부와 남부 양측으로 나누어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명으로써는 남과 북, 어디로도 전력을 집중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전쟁은 명군의 압록강 도강 작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총병 유정의 명에 2만의 기마대를 앞세운 6만의 병력이 조선군이 예상했던 도강지점 중 2곳으로 집중되어 노도처럼 밀어닥쳤다.

조선과 가장 가까운 나라이면서도 조선군의 화포에 대해 가장 정보가 어두운 곳이 바로 명나라였다.

조필의 막후 작업 때문이었다.

거짓정보와 매수로 인한 근무 태만이 마구 뒤엉킨 명군의 엉터리 정보 탓에 명군 장수들은 조선군이 운용하는 화포의 제원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따라서 자신들이 보유한 최신무기인 초선포의 제원으로 조선군 화포 성능을 재단해 버렸다.

문제는 그 초선포조차 조선의 기술로 만들어졌다는 걸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단지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 장만한 홍이포보다 뛰어난 포가 포르투갈에 있다는 정보를 얻어 어렵게 구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실제역사였다면 네덜란드와 겪는 전투에서 몇 년 후에나 보게 되는 홍이포를 갖추었으니 이전보다는 명나라도 개선된 포병 전력을 구축한 셈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장만한 홍이포와 초선포의 수량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자체 생산이 아니라 구입으로 장만한 탓이었다.

따라서 명군의 화포는 여전히 불랑기와 전통적인 청동제 화포들이 주력을 이루고 있었다.

앞서서 돌진하는 기마대의 뒤를 그런 화포들을 밀고 달려가는 보군들이 따랐다.

사전 관측을 통해 사거리를 확보해두고 있던 조선군 포병대가 그렇게 달려오는 명군을 향해 발포하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을종에 속하는 지방 병단들은 여전히 일포라 불리는 야포를 장비하고 있었다.

신형인 이포는 갑종으로 분류되는 타격 전단에 먼저 배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군 1개 병단이 보유하는 야포의 수는 3백문이다. 거기다 구포가 1백문씩 추가로 배치되었다.

그 중에서 먼저 불을 뿜은 것은 사거리가 긴 야포였다.

2천보 거리부터 사격을 시작한 야포의 사용탄은 전통적인 육군탄인 산탄포탄이었다.

수 백발의 산탄포탄이 작렬하는 가운데 돌진하던 명군 기마대가 추풍낙엽처럼 나가 떨어졌다.

막대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돌진을 지속한 명군 기마대 일부가 강에 뛰어들었다.

곧바로 소총진지에 배치된 소총병들의 사격이 시작되었다.

빗발치는 조선군의 사격에서 살아남아 도강을 이룬 명군 기마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온 벌판을 시신들로 도배하며 강가에 도착한 명군 보군들이 강가로 다가오는 순간 하늘 위에서 무언가가 폭발했다.

놀란 이들이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쏴아아아악.

쇠비가 쏟아졌다.

강가로 몰려들었던 수천의 명군이 일순간에 죽음을 맞았다.

1백 문의 구포가 쏘아올린 산탄형 비격진천뢰가 한 번에 폭발하면서 만든 참경이었다.

놀란 명군이 후퇴했다.

단 한차례의 돌격으로 두 도강 지점에서 입은 명군의 피해는 3만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

압록강에서 한창 전투가 벌어지던 시간, 수륙 양병전술을 구사하기 위해 출항한 진린의 명나라 수군이 서해 수영의 함대와 충돌했다.

함선의 수는 조선 수군의 함선이 31척으로 50척을 동원한 명군에 비해 열세였지만 함선의 크기, 화력은 월등히 앞서 있었다.

특히 실전에 처음 투입된 왕건급 호위함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전열함에 비해 가볍고 날렵하게 만들어진 왕건급 호위함들의 기동성이 명군의 함선들을 압도했다.

이리 몰고, 저리 몰아대며 포를 쏜 덕에 진린의 함대는 제대로 된 전투도 벌여보지 못한 채 1시간 만에 전부 격침되어 서해 바다에 수장되었다.

비슷한 시간, 동중국해를 가로지른 조선 상륙함대가 복주(福州, 푸저우)와 대만 사이를 통과했다.

호위함대로 나선 서태평양 함대를 지휘하는 정경달이 해병대와 육군 병력을 태운 조선무역선들을 호위해 바다를 달리고 있는 함선들을 돌아봤다.

호위함 중에는 서태평양 함대의 전열함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상륙작전에 동원된 2개의 조선 무역선단에 포함된 전선들도 있었다.

그들만도 해모수급 전열함 2척에 왕건급 호위함 8척이었다.

정경달은 이번 작전을 시작하면서 그들을 하나로 묶어 별동 함대를 조직해 두었다.

상륙함대를 막아서는 적함대가 나타날 경우 정경달은 그렇게 조직한 별동 함대를 투입해 저지하고 본대는 그대로 전진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명군 함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긴 해금령이 내려졌던 명군은 바다에서 싸우는 일에 익숙지 않았다.

수군도 유명무실해서 제대로 된 함대를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

실제로 진린이 동원한 함대가 명군이 보유한 거의 모든 함선이라 보아도 좋았다.

그 덕에 상륙함대는 저항을 받지 않고 목표였던 홍콩에 도착했다.

이당시 명나라가 부르는 지명은 향항(香港)이다. 포르투갈 인들과의 접촉으로 개항했지만 아직은 무역항으로 제 역할을 하는 곳은 아니었다.

일대의 무역항의 역할은 포르투갈이 명나라에 세금을 내는 조건으로 사용하고 있는 마카오가 담당하고 있었으니까.

그 홍콩으로 조선군이 상륙했다. 물론 홍콩 섬으로도 일단의 해병이 강습 상륙을 통해 진입했지만 조선군이 대규모 상륙을 실시한 지역은 대륙과 연결된 육지부분이었다.

현대시대엔 쇼핑거리로 유명한 침사추이, 그러니까 첨사저(尖沙咀) 지역이었다.

대규모 접안 시설이 갖춰진 것은 아니었지만 범선이 접안할 정도의 시설은 일부 건설 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륙은 그런 항구시설을 통한 정규 상륙과 연락선들을 통한 강습 상륙이 병행 되었다.

1시간에 걸친 상륙으로 1개단 5천의 해병대가 홍콩에 상륙하여 거점을 만들기 시작했다.

명군의 저항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홍콩 일대에 배치되어 있던 명군의 수는 고작 수십, 그들로 조선군에 맞설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명군의 본격적인 반격은 광주로 집결한 광동군에 의해서였다.

그때는 이미 조선군도 상륙을 완료한 시점이었기 때문에 5천에 달하는 광동군을 격파하는 것엔 어려움이 없었다.

홍콩에 상륙한 조선 육군과 해병대의 지휘는 해병사령으로 참전한 곽재우가 맡고 있었다.

환갑을 바라보는 이 노장이 붉은 군복의 해병대와 함께 선봉에 서 있었다.

그런 그의 뒤를 가토 기요마사와,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구주도와 사국도의 병단을 이끌고 떠받치고 있었다.

홍콩을 시작으로 광동 일대로 조선군의 점령지가 늘어가자 명은 전국적으로 징병을 실시하는 한편 각지의 병력을 모조리 긁어모아 방해멸이충위군(防海滅夷忠衛軍), 줄여 방해군으로 부르는 군대를 급조해 광동으로 내려 보냈다.

그 수가 물경 8만에 달했다.

물론 그 뒤로도 대규모의 징병을 통해 병력을 조성 중이었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명나라가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명군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본격적인 반격을 시작하자 조선군은 점령지를 축소해서 홍콩으로 집결했다.

대량의 화력을 집중하여 인적 피해를 최소화 한 상태로 명군의 반격을 분쇄한다는 작전 계획에 입안한 움직임이었다.

우측으로는 성문하(城門河)를 방어선으로 삼고, 좌측엔 소총진지와 포진지를 쌓아 명군의 돌진을 막았다.

조선군의 강력한 화력에 대규모 피해를 입은 명군이 주춤하여 물러선 순간 선봉에선 곽재우가 해병대를 이끌고 돌격했다.

2개 여단 1만의 해병대가 함성을 지르며 돌격하자 당황한 명군이 우왕좌왕했다.

방어에만 국한하던 조선군의 갑작스런 돌격을 미처 예상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 탓에 군진의 정렬에 미흡했던 명군이 대패했다.

특히 돌진하는 해병대와 함께 최전선으로 전진 배치된 구포의 지원 포격에 명군은 대량의 피해를 입었다.

홍콩 일대에 상륙한 조선군보다 많은 4만의 명군이 살아남아있었지만 겁을 먹고 도주해버렸다.

정규 병력이 아니라 강제로 징집한 농민들로 급조한 군대의 취약점이 그대로 노출 된 것이었다.

북부와 남부 모두 대규모 피해를 입은 채 명군이 패배하자 명나라는 당황했다.

조선군의 전투력이 예상 이상으로 막강하다는 것을 실감한 까닭이다.

그렇다고 이미 벌어진 전쟁을 물릴 수는 없었다.

북부의 유정에게는 압록강을 저지선 삼아 조선군의 월강을 막으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압록강을 넘어 조선을 병탄하려던 기존의 방침과는 완전히 반대로 뒤집어진 지침이었다.

명은 그렇게 북부를 막아두고 전력을 남부로 기울여 홍콩에 상륙해 있던 조선군을 격멸할 생각이었다.

그것을 위해 다시금 징병으로 끌어 모은 10만의 병력을 투입했다.

일전의 전투를 반면교사삼아 징병군대만으로는 조선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명군은 이번엔 북경을 지키는 금군 3만을 투입했다.

이 군대를 이끄는 것은 새로 방해군 총병으로 임명된 마림이었다.

그가 직전의 전투에서 도주했던 4만의 병력을 추슬러 합류시킨 덕에 그 휘하의 병력은 17만으로 불어나 있었다.

그에 맞서는 홍콩의 조선군도 추가 상륙을 통해 6만 5천으로 불어나 있었다.

거제에 대기 중이던 5도의 병력 중 3개 병단, 3만의 병력이 충원된 것이다.

상륙함대는 3차 상륙을 위해 다시 거제로 돌아간 상태였다.

2차 상륙과 함께 대규모 보급이 이루어진 덕에 홍콩에 주둔 중인 조선군은 병력과 화력 모두가 충분히 증강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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