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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119화 (119/325)

제119화. 사대를 거두다

제물포에 도착한 명나라 사신들은 온통 굳은 얼굴이었다.

그런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마차들은 4마리의 말이 끄는 예조의 관용마차들이었다.

과거 왕실의 6두마차가 마중을 나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대우였다.

일전에 사신으로 따라왔던 한 관리의 귀띔에 명나라 사신단의 정사, 심유경이 그것에 이의를 제기했다.

“감히 황상을 대신하여 온 대국의 칙사를 이리 대할 것인가!”

이전처럼 접객사의 임무를 띠고 제물포로 파견 된 이항복이 답했다.

“최근 조선의 법이 개정되어 사신의 접객은 왕실이 아니라 예조의 관용마차를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이해하시고 오르시지요.”

이항복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시작부터 버릇을 고치고 가겠다는 생각이었는지 심유경은 그럴 수 없노라 버텼다.

“어서 이전처럼 왕실의 마차를 대령하라. 그러지 않고서는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버티는 심유경에게 한 장수가 다가왔다.

조선 측 사람들 속에서 나왔음에도 그 장수의 복장은 명나라의 것이었다.

그런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심유경에게 장수가 가볍게 군례를 취했다.

“서안 공주마마를 호위해 조선에 머물고 있는 친군지휘사 교위 두사충입니다.”

“아! 두 교위. 어서 이 망종을 그만두고 서둘러 왕실의 마차를······.”

“공주 마마께오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자신의 말을 자르고 들어온 두사충을 놀랜 눈으로 바라본 심유경이 물었다.

“공주 마마께오서 기다리고 계신단 말인가?”

“예. 설마······. 문안을 드리지 않으실 생각이셨습니까?”

“서, 설마 내가 그러했겠는가. 드려야지. 고국의 소식을 얼마나 기다리실 텐데. 가긴 가야하겠네만······.”

“시간이 지체되면 공주 마마께오서 기다리시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두사충의 거듭된 말에 결국 심유경이 마차에 오르자 수행원들과 그 호위병들도 별도로 준비된 마차에 올랐다.

이전처럼 호위병으로 따라온 명군이 개별적으로 말을 달리는 것도 불허되었다.

반발하는 명군 장수들을 두사충이 나서서 가라앉히고 마차에 태웠다.

그렇게 명나라 사신단을 태운 예조의 관용마차 아홉 대가 제물포를 출발했다.

그것을 확인한 이항복이 고마운 표정으로 두사충을 바라봤다.

“고맙소.”

“아닙니다.”

미소로 고개를 숙이는 두사충은 가족까지 모두 조선으로 불러들여 아예 정착한 사람이었다.

현재 중궁전에 배치된 명군의 장수들과 병사들의 대부분이 그러했다.

어차피 임무로 묶인 데다 조선의 삶이 명나라의 그것보다 낫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둘러 이항복과 두사충이 탄 마차도 앞서가는 사신단의 마차를 따라 달렸다.

그런 사신단을 에워싼 채 달리는 호위병들도 과거처럼 내금위의 기마대가 동원된 것이 아니라 포청의 기마포교들이 동원되어 있었다.

조선과 명나라의 사신교류는 왕이 서대문 밖 모화관까지 나아가 사신을 맞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런 일체의 영접행사가 생략된 사신단은 곧바로 궐로 들어갔다.

제물포로 사신이 들어오기 시작한 이후 바뀐 관례였기에 사신단은 조용했다.

하지만 궐에 당도해서는 이전과는 또 달라진 대접에 직면해야만 했다.

적어도 대전 앞에서라도 조선의 왕이 맞이하던 관례도 깨어졌던 것이다.

분노했지만 두사충의 존재 때문에 서안 공주의 위세에 눌린 명나라 사신들은 울화로 벌게진 얼굴로 대전으로 안내되었다.

대전엔 조선의 문무백관들이 늘어서 있었고, 왕좌엔 광해가 앉아 있었다.

그 안쪽으로 사신들을 안내한 이항복이 광해를 향해 공손히 반례를 올리고 아뢰었다.

“명나라의 사신들이 도착하였나이다. 태왕 전하.”

이항복의 말에 명나라 사신들이 과거의 예처럼 가볍게 반례를 올렸다.

“명나라 황제 폐하의 칙서를 가지고 왔으니 조선의 왕은 내려와 예를 갖추시오.”

심유경의 말에 좌중이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하게 식었다.

무언가 이야기로 들었던 것과는 많이 다른 조선의 반응에 당황하는 심유경에게 좌의정 유성룡이 나서서 말했다.

“조선은 명나라에 사대의 예를 거두었으니 사신은 공손히 예를 갖춰 국서를 올려야 할 것이오.”

담담한 음성이었으나 심유경에겐 청천 하늘의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무, 무슨 소리요! 감히 대 명국에 사대를 하지 않겠다는 소리요!”

“태왕의 면전이요. 사신은 목소리를 낮추고, 예를 갖추시오.”

다시금 전해진 유성룡의 말에 심유경이 옷소매를 떨치며 외쳤다.

“승복할 수 없소. 이 망종을 폐하께 고해 반드시 그 죄를 물을 것이오!”

버럭 화를 낸 심유경이 돌아나가는 것을 대전에 배치되어 있던 내금위의 대전별감들이 막아섰다.

그런 별감들을 광해가 손짓으로 물렸다.

광해의 손짓에 앞을 가로막았던 대전별감들이 물러서자 심유경을 비롯한 명나라 사신들이 서둘러 궐을 빠져나갔다.

예조의 마차도 이용하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그런 명나라 사신단의 행동에 유성룡이 물었다.

“저리 두어도 괜찮겠나이까?”

“그냥 두시오. 어차피 한번은 겪고 가야 할 일이니. 대신 군은 만반의 준비를 갖춰두어야 할 것이다.”

광해의 말에 권률을 비롯한 장수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명을 받잡나이다. 전하!”

장수들을 바라보는 광해의 눈이 담담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궐을 나갈 때는 곧바로 돌아갈 것 같았던 명나라 사신들은 한 객관에 여장을 풀었다.

명나라 사신들만을 위해 존재하던 모화관을 허물고, 조선은 그 자리에 크게 영빈관을 짓고 이화관(李華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향후 조선을 찾아온 외교 사신들을 위한 곳이었다.

그곳으로 안내하겠다는 예조 관리의 권유도 마다한 채 일반 객관에 여장을 푼 심유경이 찾아간 곳은 궐 안의 중궁전이었다.

“공주 마마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마치 엄마에게 이르는 아이처럼 조선의 처사를 질타하던 심유경을 서안 공주가 불렀다.

“정사.”

“예. 공주 마마.”

“명에서 정사의 신분이 상인이었다고요.”

상인이 조선으로 가는 사신단의 정사까지 맡게 된 것은 명나라가 이번 협상을 이용해 조선과의 무역 협상을 크게 바꾸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명나라는 여전히 자신들의 호통이 통할 것이라 생각했고, 허리를 굽혀 사죄를 해올 조선에게 명나라에 유리한 무역 협정을 강제해 맺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보니 무역에 관해 잘 아는 관리가 필요했는데 조정에서 찾을 수 없자 고관들과 연줄을 대고 있던 상인인 심유경에게 그 임무가 맡겨진 것이었다.

그것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는 서안 공주에게 심유경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그, 그렇긴 합니다만······.”

“하지만 지금은 이리 번듯한 명나라 사신단의 정사시지요.”

“예. 맞습니다. 그러합니다, 공주 마마.”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어요. 상인이 사신단의 정사가 될 정도로 말이에요.”

“그, 그렇사옵니다.”

“그렇게 바뀐 세상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에요. 바뀐 세상에 맞춰가야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이니. 그러니 정사.”

“예, 마마.”

“맞춰가세요. 바뀐 세상에.”

자신을 직시하는 서안 공주의 말에 심유경은 그저 마른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중궁전에서 물러나온 심유경은 한참동안 멍하니 중궁전을 바라보다 이내 걸음을 옮겼다.

중전에게서도 만족할 만한 답이나 조력을 얻지 못한 이상 돌아갈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심유경은 조선에 남았다.

대신 부사를 비롯한 몇몇 사신단 일원이 명으로 돌아갔다.

그 직후부터 조필로부터 수많은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명나라 조정이 조선과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려는지 논의하는 내용들이 마치 곁에서 들은 것 마냥 소상히 적혀 조선으로 전달된 것이다.

아마도 매수한 환관이나 관리를 통해 논의 내용을 빼내는 것으로 보였다.

한동안 말로만 소란스럽던 명나라 조정의 분위기는 무장들의 입김이 닿으면서 강경하게 변하기 시작해서 종래엔 군을 투입해 조선을 징치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발배의 난을 평정한 전공을 세웠던 이여송이 요동총병의 직책을 맡아 4만의 명군을 동원하여 조선으로 진군할 계획이었다.

아울러 수군 도독 진린이 50척의 전선에 5천의 병력을 태우고 제물포를 공략하는 수륙 양병전을 펼치기로 했다.

그 소식조차 조필을 통해 사전에 입수한 조선군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천진에서 출정할 것으로 보이는 명나라 함대를 요격하기 위해 전라 수영의 함대가 서해로 올라오고 제물포 앞바다엔 강화수군별영의 함선들의 경계가 강화되었다.

요동을 거쳐 진군해올 명군을 맞아 조선 육군도 움직였다.

본래는 기동 전력인 타격 전단이 기동하여 맞아야겠지만 그들은 북방 개척지에 흩어져 주둔 중이었다.

그로인해 조선 육군은 본토 9개도에서 1개 기동병단씩을 차출해 평안도로 소집했다.

9개 병단, 9만의 병력을 집중시킨 조선 육군은 총사 권률이 직접 지휘했다.

정찰을 통했는지 아니면 첩자를 운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명나라도 평안도에 집결한 조선 육군의 규모를 사전에 파악했다.

진군 중이던 요동군이 멈추고, 명군의 증강이 이루어졌다.

각지의 병력을 모으고 추가로 징병을 통해 소집한 10만의 병력이 증강되었다.

방이정동총병(防夷征東摠兵服)의 직책을 맡은 유정이 총지휘관으로 배치되자, 14만으로 수를 늘린 명군이 다시 진군을 시작했다.

그것이 광해12년 5월의 일이었다.

조선과 명나라가 동원한 군세의 합이 20만을 훌쩍 넘기는 탓에 누르하치의 여진이 바짝 긴장했다.

그간의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를 생각하면 양측의 전쟁보다는 명분만 그리 세워 대규모 병력을 요동으로 집결시키고, 결국 칼날은 자신들, 여진에게 돌릴지 모른다는 걱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위기를 느낀 누르하치도 여진과 몽골군 6만을 소집해서 북쪽으로 멀리 물러나 양측의 상황을 예의 주시했다.

조선군 지휘부는 명과의 전쟁을 어찌 진행할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방어전인 이상 압록강변에서 막아내자는 의견과 어차피 벌어진 전쟁 적극적으로 병력을 압록강 너머로 투사하여 치고 들어가자는 의견이 충돌을 빚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로 합쳐져도 모자랄 판국에 두개의 의견으로 팽팽히 맞서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광해가 전포를 갖춰 입고 평안도 전방지휘소로 직접 나아갔다.

권률과 장수들이 당황하여 그런 태왕을 맞았다.

광해가 그리는 명과 여진의 관계 상 그는 아직 여진을 자극할 만한 일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요동에 가해지는 압력이 과해서 여진이 명군에 붙어버리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광해는 당분간 압록강 너머 요동 쪽으로는 조선군을 투입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요동에서는 압력을 낮춰 여진군의 개입을 차단하고, 명군과의 전투로만 몰고 갈 생각이었다.

그것을 위해 광해는 장수들과 상의하여 압록강변에서 명군을 맞아 방어전을 치르기로 했다.

곧바로 조선 육군은 명군의 도강 예상지역에 소총진지를 만들고, 포를 방렬했다.

자그마치 9만의 병력이 몰린 일이었다. 압록강변이 온통 조선군으로 채워진 듯 보였다.

물론 광해는 압록강변에 주저앉아 명군의 공격을 막아내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누르하치의 여진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요동 지방의 압력을 낮출 뿐, 그 외의 지역에선 얼마든지 전투를 벌일 수 있다는 생각이었으니까.

광해의 밀명이 수군 총사부로 떨어졌다.

전라 수영과 강화수군별영만을 동원해 두고 있던 수군이 분주해졌다.

신규 편성된 수송함대를 포함한 2개의 수송함대에다 출항준비 중이던 2개의 조선 무역선단까지 동원된 대규모 상륙 작전이 준비되기 시작한 것이다.

구주도와 사국도에서 차출된 기동병단 2개와 해병 3개 여단, 총 3만5천 병력을 태운 수송함대와 조선 무역선단들이 서태평양 함대의 호송을 받으며 동중국해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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