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새가 지저귀고, 용이 솟구치다
요새를 찾아온 마드라스의 타밀족 지도자들은 협조하는 대가로 타밀족 사내들의 ‘사냥’을 멈춰줄 것을 요청했다.
이순신은 그 요청을 거부했다.
‘협조’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완벽히 조선의 백성이 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위험요인을 방치하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했다.
타밀족 지도자들은 ‘협조’와 조선의 ‘백성’에 대한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그들에게 이순신이 한 설명은 간결했다.
이방인으로써 협조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백성으로써 전력을 다하라는 것이었다.
그 요구를 결국 마드라스의 타밀족 지도자들이 받아들였다.
거친 조선 해병대의 색출, 추포 작전에서 살아남자면 그들로써는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타밀족 지도자들이 이순신의 요구를 수용하자 마드라스의 상황은 믿기 힘들 정도로 하루아침에 바뀌어 버렸다.
사납고 거칠기만 했던 해병대원들이 미소를 짓기 시작한 것이다.
의무병들과 의무군관들이 부상당한 이들을 치료했고, 전투의 와중에 부서진 것들을 조선 해병대가 수리해줬다.
완전히 달라진 조선군의 대응에 마드라스의 타밀족들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조선이 장악한 마드라스에 범선이 접안할 만큼 대형의 항구가 지어졌다.
그리고 얼마 후, 조선 무역선단이 마드라스에 기항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말라카에서 마드라스를 거쳐 유럽으로 향하거나 반대의 경로를 통해 조선으로 돌아갔다.
그런 조선 무역선단을 상대로 물과 식료품, 그리고 후추 등 특산품을 거래하는 상점들을 조선군이 주도하여 건설했다.
그곳에 근무하는 현지인들의 소득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여전히 경원시 하던 타밀족의 분위기가 변하기 시작했다.
조선과 함께 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자신들에게 이득이라는 것을 체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마드라스가 안정되자 이순신은 조선으로 돌아가는 무역선단을 통해 점령 작업이 완료되었음을 알리는 보고서를 한성으로 보냈다.
광해와 이순신이 과거에 밤을 세워가며 설정한 조선과 유럽의 무역루트의 중간 징검다리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
광해가 귀국한 조선 무역선단으로부터 이순신의 보고서를 받은 것은 광해11년의 9월이 끝나가던 시점이었다.
해외 지명에 대한 명칭은 특별히 왕명이 없는 경우 기본적으로 해당지역의 음을 그대로 차음하여 쓰는 것을 골자로 하는 법이 이미 조선에서 통용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얼마 전에 조선이 점령한 말라카를 한자음을 따서 마락가(摩洛哥)라 부르지 않고 그냥 말라카라 부르는 이유도 그것에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번에 점령한 마드라스도 그대로 부르기로 하였다.
광해는 말라카에 배치한 말라카 별영과 마찬가지로 마드라스 별영이란 이름의 함대를 구성하여 임무를 인수하도록 지시했다.
수군 부총사 이억기는 광해의 명에 따라 해모수급 전열함 3척과 왕건급 호위함 5척으로 이루어진 마드라스 별영을 조직했다.
아울러 조선과 유럽 무역로에 새롭게 취항할 예정이던 조선 무역선단을 이용해 보급물자를 마드라스로 보내기로 했다.
그 배에는 마드라스의 방어를 인수할 2개 단, 2천의 해병대도 함께 태워 보내기로 되어 있었다.
해외 영토, 그러니까 과거 왜였던 해외 5도가 아닌 그 외의 해외 영토의 방어를 위해 광해는 수군에 해외 원정단을 구성하도록 명령했다.
몇 개의 별영급 함대로 구성해 해외 영토의 방위를 맡은 함대의 임무를 교대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 수군 근무 규정상 해외 영토의 근무기간은 2년이었다.
따라서 말라카와 마드라스에 파견된 조선군은 2년마다 교대하도록 되어있었다.
해외 원정단은 그런 임무교대를 위해 만들어진 부대였다.
해외 원정단의 구성으로 수군이 분주하던 10월말. 마드라스 별영과 보급품과 임무교대 할 해병대를 실은 조선 무역선단이 부산포를 출항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드디어 안도와 제제합이를 연결하는 북방 제2도로가 완성되었다.
1천6백리에 달하는 북방 제2도로를 따라 건설된 10개의 도시들로 이제 물자의 이동이 자유로워졌다.
여러 상단들을 통해 대량의 물자가 이동되기 시작했고, 그 도시에 사는 이들이 생산한 물산들이 다시 조선 구도, 나아가 해외 5도까지 퍼져나갔다.
도로 건설을 끝낸 인력을 동원해 송눈 평야를 개간하기 시작했다.
건설이 완료된 북방 제2도로와 달리 온성에서 출발해 연해주를 거쳐 백력을 연결하는 북방 제1도로는 아직 착공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재정의 압박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가 섬의 금 채취가 본격화 되는 내년이면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재정부족이 심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삼강평야의 개척 사업이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어 내년부터는 파종을 할 수 있을 거라는 보고가 있었다.
다만 요사이 점점 추워지는 기온이 농사에 영향을 줄 것이 우려되고 있었다.
*****
11월 한파를 뚫고 증기연구소에서 희소식이 들려왔다.
최초의 상업용 증기기관이 개발되어 공급을 시작한 것이다.
오랜 기간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증기 기관의 개량이 빠른 속도로 진행된 덕이었다.
첫 수요처는 철산단지의 쇄석단이었다.
수차를 활용한 쇄석장비들이 증기기관으로 탈바꿈하는 개량을 거쳤다.
계절에 마다 바뀌는 수량(水量)에 따라 쇄석장비의 가동률이 바뀌고 그에 따라 쇄석량이 들쑥날쑥한 것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목표였다.
증기기관의 크기는 최초 개발품의 절반가까이 줄어들었다.
그것을 직접 시찰한 광해의 특명으로 장원의 연구진들과 철산 증기 연구소의 개발진들이 합동 개발조를 만들어 증기 기관차의 개발을 시작했다.
부수적인 자재의 조달을 위해 철산 제철 연구소의 기술진들이 철로로 사용될 수 있는 철강 개발에 임했다.
아울러 장원 신문물 개발조에서 객차와 화차로 사용될 차체의 개념 개발을 시작했다.
하나의 개발이 시작되면 그에 수반된 여러 가지가 부수적인 부품들의 개발이 한 번에 개시되는 통합 연구 및 개발 체계가 갖춰지는 시점이었다.
*****
광해12년, 새해가 밝았다.
첫날 아침에 온 조선에 새소리가 가득하고, 하늘로 솟구치는 용을 보았다는 목격담이 조선 구도 전체에서 수도 없이 나왔다.
그로부터 며칠 후, 중전인 서안 공주의 회임 소식이 전해졌다.
왕실과 한성 조당을 포함한 온 나라가 그 소식에 기쁨으로 들썩였다.
그렇게 기쁜 소식에 묻혀버렸지만 새해 초, 북쪽에서 누르하치의 건주 여진군이 해서 여진의 큰 부족 중 하나인 오랍 씨족을 병합하는 것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로써 누르하치는 조선의 품에 들어온 휘발 씨족을 제외한 대부분의 해서 여진을 통합한 것이었다.
이후 누르하치가 몽골 제부족들과의 연합과 동맹을 확대하고 있다는 정보들이 줄을 지어 한성에 도착하고 있었다.
기쁜 소식 뒤엔 나쁜 소식이 따라온다더니 명나라로부터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왔다.
드디어 명나라가 왜의 두 나라에 조선이 책봉을 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조필의 전언에 의하면 명나라 조정이 조선을 성토하는 고성들로 가득 찼다고 했다.
며칠 후, 조필을 통해 명나라에서 해당 상황을 확인하고 바로잡기 위한 사신을 보내기로 결정 했다는 정보가 날아왔다.
그 소식이 도착한 다음 날, 명나라에서 2월에 사신을 보내겠다는 통보가 날아왔다.
보내도 좋겠냐는 협의 따위는 없는 말 그대로 일방적인 통보였다.
명나라의 통보가 있었던 날로부터 며칠 후인 1월 말, 수군 부총사 이억기가 궐로 들어 광해에게 수군의 재편 작업이 마무리되었음을 보고했다.
이번 개편을 통해 조선 수군은 3개의 수영만 남게 되었다.
먼저 서해와 남해 서부 일대, 그리고 제주 해역을 담당하는 전라 수영, 동해와 남해 동부 일대의 해역을 담당하는 경상 수영, 그리고 북해도를 제외한 일본 전 해역을 담당하는 구주 수영이었다.
각 수영은 해모수급 전열함 1척과 30척의 왕건급 호위함으로 편성되었다.
추가적인 작전의 유연성을 위하여 3개의 별영을 두고 있었는데 하나는 북해도와 사할린 일대의 해역을 담당하는 북해 별영으로 1척의 해모수급 전열함과 9척의 왕건급 호위함으로 구성되어있었다.
두 번째 별영은 과거부터 있던 곳으로 서해 연안 일대와 제물포의 방어를 담당하는 강화수군별영이었다.
이들은 수군 부총사 직할로 편제되었으며 그 특성을 감안해 장갑귀선 10척과 판옥전선 10척으로 구성되어 강화도에 배치되었다.
마지막 별영은 한산 별영으로 복잡한 남해 연안의 경비와 방어를 맡고 있었다. 이들도 강화수군별영 처럼 장갑귀선 10척과 판옥전선 10척으로 이루어져있었다.
그 외 기존에 조선 수군에서 운용되었던 장갑귀선과 판옥전선은 모두 해체하여 왕건급 호위함을 건조하는데 쓰였다.
대양 작전을 위해 각기 해모수급 전열함 50척으로 구성된 동태평양 함대와 서태평양 함대는 그대로 존속시켰으며 동태평양 함대의 경우 수군 총사 직할로 편제되었다.
사실 이것은 이순신의 존재 때문이었는데 전술 지휘관으로써의 그의 능력을 썩힐 수 없는 조선의 입장이 반영된 결과였다.
이러다 보니 수군 총사부의 행정업무는 수군 부총사가 대리하는 것으로 굳어졌다.
물론 그조차 강화수군별영을 직접 지휘하게 되어 있긴 했지만 실제 탑승지휘는 그다지 많이 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상륙작전을 위해 왕명으로 설치된 해병대의 규모는 그대로 유지되어 5개 여단, 2만5천으로 편제되어있었다.
해병 상륙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해군 수송함대의 경우엔 50척의 조선무역선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기존의 1개에서 편성을 늘여 2개로 확대했다.
이 수송함대는 각기 서태평양 함대와 동태평양 함대에 배속되어 원거리 상륙 작전에 활용될 예정이었다.
이로써 조선 수군의 원거리 상륙작전 능력이 배로 증강되는 효과를 보았다.
왕명으로 특설된 해외 원정단도 두었는데 이들은 원양 작전을 담당해야 하기 때문에 해모수급 전열함 3척과 왕건급 호위함 5척으로 이루어진 별영급 함대 5개를 보유한 대규모로 설치했다.
이들의 임무는 말라카와 마드라스처럼 해외에 점령된 조선의 영토를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였다.
실제로 이 해외 원정단 소속 별영급 함대 5개 중 2개는 이미 말라카와 마드라스에 작전 전개 되어 운용되고 있었다.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해외 영토가 생김에 따라 조선 수군엔 해외 근무연한 규정이라는 것이 생겼다.
이 규정에 따르면 해외 영토에 파견되는 장졸들은 2년간의 근무 연한을 부여받았다.
특별한 경우에도 1회 이상의 연장을 할 수 없도록 못을 박아놓아서 불이익을 받는 이들이 없도록 조치되었다.
그로인해 해외 원정단 소속 별영급 함대들도 2년마다 교체되게 되어 있었다.
이것은 해외 영토에 수비대로 배치되는 해병대 병력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규정이었다.
조선 수군에는 이렇게 전투 함대만 있는 것이 아니다. 편제상 각 무역선단도 수군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의 원활한 운용을 위해 조선 수군은 교역지원단이란 이름의 부서를 별도로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원거리 국제무역을 담당하는 조선 무역선단과 근거리 교역을 담당하는 교역선단, 그리고 조선 본토와 해외 5도를 연결하는 정기선들을 관할했다.
그중 원거리 국제 교역을 담당하는 조선 무역선단은 현재까지 건조되어 투입된 것이 모두 15개로, 이들은 각기 1척의 해모수급 전열함과 4척의 왕건급 호위함으로 구성된 호위함대와 10척의 조선무역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존에 조선 무역선단에 배치되어 있던 하백급 전열함은 전량 퇴역되었다.
건조된 시점으로 볼 때 퇴역이 너무 빨랐지만 원양 작전에서 개선되어야 할 점이 너무 많이 발견된 탓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초기에 설계되어 제작된 함선들이 갖는 부족함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이로 인해 조선 최초의 제식 전열함으로 배치되어 수많은 전투를 치러냈던 하백급 전열함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새로운 호위함대를 맞은 15개의 조선 무역선단이 조선과 유럽 간, 또 명나라와 유럽 간의 무역을 대부분 장악하고 있었다.
조선은 이 원거리 국제 무역선단을 모두 30개까지 늘일 계획이었다.
아울러 조선과 명나라, 또 조선 본토와 해외 5도 사이의 근거리 무역을 담당하는 교역선들도 모두 판옥교역선에서 조선무역선으로 교체되었다.
이로 인해 실제 취역한 함선 수는 줄었지만 전체 수송량은 크게 증가했다.
기존에 근거리 교역에 취역했던 판옥교역선은 모두 분해하여 폐기되거나 재활용되었다.
또한 조선 본토와 해외 5도를 왕래하는 정기선의 경우 대대적인 확충이 진행되어 1백 척에 달하는 조선무역선이 투입되어 있었다.
편제가 수군이다 보니 이런 교역선과 정기선의 선장과 선원들은 모두 예비역 수군 장졸들이었다.
다만 조선 무역선단의 호위함대에 근무하는 이들은 모두가 현역 조선 수군 장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억기의 보고에 광해가 수군 장졸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광해의 입장에서는 명나라와 본격적으로 갈등을 빚기 전에 수군의 재편작업이 끝났다는 것에 크게 안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재편이 완료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며칠 후, 명나라 사신들이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