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삼태극(三太極) 깃발
정식 점령절차를 진행하기 위해 총독부 안으로 들어선 젊은 조선군 장수를 말라카 총독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총독부 앞에는 붉은 군복에 총으로 무장한 5백 명의 조선군이 2백이 넘는 포르투갈 병사들을 포박해 꿇어앉혀두고 있었다.
화가 난다고 상대를 자극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름이 어찌 되시오?”
총독의 물음을 통역병을 거쳐 들은 젊은 조선군 장수가 답했다.
“사정(司正), 손일원입니다.”
이름이야 손일원 그대로였지만 사정이란 계급을 무어라 통역할지 몰라 애를 먹는 통역병의 모습에 손일원이 말했다.
“그저 군관이라 말해두게.”
손일원의 말에 비로소 통역병이 장교 손일원이라고 답했다.
사정은 조선 군제에서 7품의 계급이다. 직책으로 보면 1천으로 이루어진 단의 참모를 맡을 계급이었다.
맨 하위 직급인 9품 사용(司勇)으로 이순신의 부장이 된 이후, 정왜 전쟁의 공로를 인정받아 2품계나 진급한 결과였다.
그런 통역병의 말에 말라카 총독이 말을 이었다.
“먼저 마무리를 이렇게 정중한 방법을 택해 줘서 고맙소.”
“사령께서 내리신 명령입니다.”
그 말을 하면서 손일원은 잠시 갈등했다.
이순신의 직책은 동태평양 사령인 동시에 수군 총사였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사령을 언급한 것은 조선 수군의 총 지휘관이 이곳에 와 있다는 것을 굳이 드러내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이번에는 통역병이 제대로 통역을 했던 모양이다. 말라카 총독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독께 내가 감사의 말씀을 드렸노라고 전해주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탁이 있소만.”
“들어 들일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손일원의 답에 말라카 총독이 말했다.
“우리가 온전히 말라카를 떠날 수 있도록 해 주겠소?”
총독의 물음에 손일원이 반문했다.
“그 우리라는 범위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총독부에 속한 관리들과 포로로 잡힌 병사들을 말함이오.”
“죄송하지만 총독 각하와 가족분들, 그리고 문관들은 원하실 경우 떠나실 수 있도록 배려하라는 사령의 명이 있으셨습니다만 포로들은 아닙니다. 그들의 문제는 다른 것이니까요.”
“선처를 베풀어 줄 수는 없겠소?”
“죄송합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손일원의 모습에서 포로 문제는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총독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알겠소. 하면 언제 떠날 수 있겠소?”
“원하신다면 언제라도 가능하십니다. 다만.”
“다만?”
불안하게 묻는 총독에게 손일원이 답했다.
“말라카의 각종 서류와 지도의 제출을 요구합니다.”
“그건······.”
망설이는 말라카 총독에게 손일원이 말했다.
“제가 끝까지 정중함을 잃지 않도록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에 말라카 총독은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알겠소. 그럼 서류를 준비하겠소. 그리고 총독부에서 내려진 국기를 돌려받을 수 없겠소?”
총독부가 점령되면서 건물의 가장 높은 곳엔 포르투갈의 국기가 내려지고 삼태극이 선명한 조선의 국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말라카 총독의 요청에 손일원이 뒤에 배석해 있던 한 군관을 돌아봤다.
그 시선에 군관이 복명했다.
“찾아보겠습니다.”
“곧바로 회수해서 돌려드리게.”
“예, 사정.”
복명한 군관이 나가자 손일원이 말라카 총독에게 말했다.
“찾는 대로 돌려드리겠습니다.”
“고맙소.”
“그럼 서류와 지도가 준비되는 대로 다시 불러주십시오.”
그 말을 남긴 채 손일원이 통역병과 함께 나가자 말라카 총독이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
말라카 항구의 봉쇄조치가 풀렸다.
여전히 항구 이곳저곳에 조선 해병대가 상주해 살벌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지만 말라카의 행정과 무역기능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포르투갈의 말라카 총독과 그 가족, 그리고 문관들이 봉쇄가 풀린 말라카 항구를 떠나는 상선에 몸을 실었다.
유럽이 아니라 인도로 가는 배였지만 가장 빠르게 말라카를 떠나는 배였기에 그들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인도에서 다시 유럽으로 가는 배로 갈아 탈 예정이었다.
상선들의 출입이 자유로워지면서 말라카가 조선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빠르게 번져나갔다.
새로운 말라카의 주인이 된 조선의 힘을 시험해보고 싶었던지 주변 술탄국이 일단의 병력을 보내 전투를 걸어왔다.
해병대가 구포와 나총으로 그런 술탄국의 병력을 전멸시켜버렸다.
아울러 동태평양 함대의 일부를 해당 술탄국의 해안으로 보내 모든 포구를 포격하여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제법 번성해 보였던 한 포구는 해병대를 상륙시켜 아예 도시 전체를 불태우고 파괴했다.
말라카를, 조선은 건드렸을 경우 어떠한 보복이 가해지는지 알려준 일종의 시범케이스였다.
동태평양 함대에 속한 전열함 여러 척이 주변 해역을 돌면서 해적질을 하던 함선들을 격침시키기 시작했다.
때론 한 척의 전열함이 홀로 움직이는 것을 본 사략선과 해적선들이 다가왔다가 야포 일제사에 걸려 침몰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말라카 주변의 해적들이 씨가 말라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주변 정리가 어느 정도 되었다고 판단한 이순신이 일단의 함대와 해병대를 보내 포라중에 대한 상륙작전을 실시했다.
큰 저항은 없었다.
이미 말레이 일대에서 조선군의 강대함은 소문이 자자했다.
조선과 조선 수군을 뜻하는 삼태극 깃발만 보여도 도주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해병대가 요새를 짓고, 조선령 포라중이라 새겨진 커다란 비석을 세워 조선의 땅임을 명확히 했다.
*****
말라카의 함락 소식이 포르투갈에 도달한 것은 말라카 구원 함대를 구성하여 막 출항시키기 직전이었다.
3년 전인 서기1598년에 선왕인 펠리페 2세가 죽고, 왕위를 이은 펠리페 3세는 소식을 들은 직후 구원 함대의 출항을 정지시켰다.
10척의 함선에 2천의 병력을 실어 준비했던 포르투갈의 구원함대에 비해 조선이 말라카 점령에 동원한 군세가 50척의 전열함과 5천의 지상병력이라는 보고를 받은 까닭이었다.
역사적으로 잉글랜드와 치른 칼레 해전의 패배 이후, 에스파냐는 사면초가의 상황에 놓여있었다.
잉글랜드에 대한 두 차례의 보복전은 기상의 변화로 실패했고, 그 와중에 에스파냐의 치하에 있던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격화되었다.
아울러 프랑스와의 전쟁에서도 패배하는 등 에스파냐로써는 유럽의 패권을 상실하는 상황이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선왕인 펠리페 2세가 남겨둔 막대한 부채는 펠리페 3세의 운신을 더욱 좁혔다.
그로인해 에스파냐로써는 그 이상의 함대와 군대를 먼 아시아까지 파견할 수 없었다.
만성적인 재정의 부족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시아의 무역이 끊어지면 막대한 부채를 짊어지고 있는 펠리페 3세의 상황이 더욱 더 곤란해진다는 것도 문제였다.
결국 펠리페 3세는 군대가 아니라 사신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호위선을 포함해 2척의 배에 20명으로 이루어진 사신단을 태워 조선으로 파견했다.
전쟁을 포기한 펠리페 3세로써는 조선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
점령한 말라카의 안정과 포라중의 개발이 시작되었다는 이순신의 보고가 한성에 도착한 6월엔 조선과 포라중, 말라카를 잇는 보급함대가 2번이나 출발한 시점이었다.
1번째는 유럽으로 떠날 예정이었던 기존의 조선 무역선단을 활용했고, 2번째는 새로 확충된 조선 무역선단을 파견했다.
다음 달에 떠나는 무역선단으로는 말라카와 포라중에 주둔할 해병대와 이주민을 실어 나를 예정이었다.
현재까지 조선이 운항 중인 조선 무역선단은 모두 6개로 올해 안에 4개의 무역선단이 추가로 완성되어 운항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같은 달, 장원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신형 야포의 공개식이 있었다.
지상군과 수군이 함께 사용하는 조선의 방식에 따라 최대한 무게를 줄이는 형태로 개발된 신형 화포는 이전의 야포에 비해 긴 포신을 가지고 있었다.
후장식을 채택한 덕분에 포신의 길이를 길게 가져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포신의 압력을 높일 수 있었고, 강선의 회전수를 늘여 정확도를 향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후장식에 기초적인 주퇴복좌기가 달린 초보적인 형태였지만 이 시대로 보자면 혁신적인 대포였다.
스프링만으로 동작하는 주퇴복좌기는 여전히 만족할 만한 정도는 아니어서 완전히 제 위치로 돌아오지 않아 인력으로 살짝 밀어서 정확한 위치를 맞춰줘야 하는 단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주퇴복좌기가 없을 때 고스란히 포가 감당해야 했던 충격이 상당수 분산되었다는 것은 큰 이점이었다.
더구나 후장식이 채용됨으로써 장전 편의성이 대폭 개선되고 장탄 시간도 줄었다.
거기다 장원은 포탄의 개량을 통해 그 시간을 더 줄이는 노력을 기울였다.
가형 소총의 개발 이래로 지금의 나총까지 조선군이 사용하는 종이 탄피를 모방하여 만들어진 신형 포탄은 폭발탄과 장약을 종이로 감싸 하나로 만들어져 있었다.
종이로 감쌌다 뿐이지 마치 현대 시대의 포탄과 유사한 형태였다.
그렇다고 가형 소총이나 나총처럼 뇌홍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고, 여전히 발화 심지를 사용한 화포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것에 대해 화포 개량조 연구원이 광해에게 설명했다.
“여기 화심 구멍에 이 꼬챙이를 찔러 넣어 심지를 종이 탄피에 쌓인 장약 속에 심게 됩니다.”
말과 함께 연구원이 들어 보인 꼬챙이는 마치 바늘처럼 생긴 구멍이 있어 그곳에 심지가 꿰어져 있는 형태였다.
“그걸 꽂아둔 상태에서 발포하는 건가?”
“꼬챙이는 이렇게 여기 부분을 누르면 앞이 열려서 이 상태에서 빼내면 심지를 놓고 빠져나오게 됩니다.”
그 설명과 함께 꼬챙이 손잡이에 툭 튀어나온 부분을 누르니 바늘구멍 같이 생긴 부분의 한쪽이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심지가 떨어졌다.
현대시대의 기술로 보면 아무것도 아닐 일이지만 이 시대의 기술로는 상당히 세밀한 세공작업이 필요한 일이라 굉장한 노력을 기울였을 터였다.
그것에 감탄하는 광해에게 연구원의 설명이 이어졌다.
“화약은 기존의 흑색화약이아니 전하의 명으로 특별히 개발된 갈색화약을 사용하였습니다.”
갈색화약은 탄화가 덜 된 목탄을 섞어서 만든 화약을 말한다.
탄화가 덜된 목탄을 쓰는 탓에 발화가 지연되어 폭발시간이 느리다.
대신 그로인한 압력은 커져서 오히려 포구 속도는 빠르다.
늘어난 포구속도 만큼 사거리는 연장되었다.
기존 야포가 2천보였다면 신형 야포의 사거리는 그보다 1천보 정도 더 늘어났다.
물론 갈색 화약을 사용한 것만으로 얻은 거리의 확장은 아니었다. 사용되는 화약의 양이 3할 가량 더 늘었다.
그만큼 늘어난 압력을 견딜 정도로 포신의 강도가 높아졌다는 것을 뜻했다.
그것은 포의 개량만으로 도달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재철 기술이 그만큼 더 발전한 것에 따른 성과였다.
그로인해 신형 야포의 경우 3천보에서 명중탄을 기대할 수 있었다.
개발과정의 실험 사격에서 간혹 4천보 가까이 날아간 경우도 기록되어 있었지만 장원은 신형 야포의 제원에 최대사거리를 3천보라 명기했다.
그것이 기상상태를 포함한 사격 조건의 변화에도 언제나 도달 가능한 거리였기 때문이다.
이 신형 야포에 장원은 2형포란 이름을 붙였다. 아울러 기존의 야포는 1형포라는 명칭으로 개명되었다.
병사들은 2형포를 줄여 ‘이포’라 불렀다. 마찬가지로 1형포로 이름이 바뀐 야포를 ‘일포’라 불렀다.
수군, 육군을 가리지 않고 워낙 많은 수량의 일포가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형인 이포의 전환 배치는 상당 기간을 두고 이루어질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