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흑룡강(黑龙江) 경계비
자신들의 영역인 휘발천 일대에서 누르하치의 건주여진군이 철군한다는 내용이 합의에 들어있긴 했지만 다시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내용도 없었기에 휘발 씨족의 불안감은 높았다.
만약 상황이 그렇게 되면 누르하치와 합의까지 마친 조선군이 다시금 건주여진군과 싸우기 위해 휘발 씨족을 도우러 올 것이란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다수의 몽골부족과 동맹을 맺은 데다 해서 여진의 큰 씨족 중 하나였던 합달 씨족을 이미 복속 시킨 건주 여진의 군세를 휘발 씨족은 당해 낼 수 없었다.
전전긍긍하던 휘발 씨족의 족장이 휘하 부족장들을 모두 소집해 씨족의 미래를 결정하는 회의를 열었다.
그 결과를 가진 휘발 씨족의 씨족장과 제사장이 마지막 부대와 함께 철수 준비 중이던 신립을 찾아왔다.
해서 여진의 최대부족이었던 휘발 씨족이 조선의 품으로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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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 기동 병단을 포함한 타격 전단 지휘부가 휘발 씨족의 근거지인 휘발천 인근에 머물렀다.
명이 애초에 건주위를 세웠던 지역이었을 만큼 일대에 여진족들이 많이 사는 곳이었다.
물론 지금의 건주위는 혼하로 물러섰다가 세력이 약해진 이후 심양으로 이전했다.
그런 건주위를 장악한 누르하치도 심양을 본거지로 삼고 있었다.
휘발천 인근에 차려진 주둔지를 떠난 타격 전단의 나머지 병단들은 동북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런 조선군을 쫓아 대규모 치중대가 연일 조선에서 북쪽으로 이동했다.
시작은 우연이었지만 겨울철에 곡식을 풀어주는 것이 여진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된 조선이 곡식으로 야인 여진을 끌어당기기로 한 것이다.
각 병단이 일정한 지역에 머물며 곡식을 풀었다.
이전처럼 소량도 아니었고, 겨울을 충분히 날수 있을 만큼의 식량이 풀어진 것이다.
식량을 가져가는 조건은 하나였다.
앞으로 조선의 백성으로, 조선의 법을 지키며 조선왕의 명에 따른다.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었지만 굶주림에 지쳐있던 인근 부락들이 먼저 조선군에게 다가와 약속을 남기고 곡식을 가져갔다.
사실 훗날 그 약조를 지키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부족들이 대다수였다.
그로인해 해서 여진에서 시작된 소문이 그저 소문이 아니라 진짜라는 인식이 야인 여진 일대에 퍼졌다.
신인의 군대인 조선군이 곡식을 풀어 여진의 백성들을 먹인다는 이야기가 야인 여진의 제부족들로 급속하게 번져나갔던 것이다.
소식을 들은 주변 여러 부족이 조선군 진주 지역으로 찾아와 식량을 얻어갔다.
그들도 향후 조선의 백성으로 조선의 법을 지키며, 조선 왕의 명에 따르겠다는 가치 없는 약속을 남겨두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하기는 싫고, 식량은 필요했던 몇몇 부락이 그렇게 식량을 얻어간 부락을 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식량을 나눠주던 조선군의 일부가 급속기동하여 그런 부락을 급습해 불태우고 모든 부락민을 죽여 죄를 물었다.
그렇게 불타고 무너진 부락마다 신인의 신벌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깃발이 남겨졌다.
<신인의 법을 어기고 곡식을 훔치거나 도둑질하는 자, 신인의 군대가 용서치 않는다>
조선군이 고의로 남긴 것이었다.
온 여진 땅에 소문이 돌았다.
한두 번이 아니라 대여섯 번 같은 일이 벌어지자 조선군의 기동성과 전투력에 대한 두려움이 야인 여진 제부족들에게 번져나갔다.
그제야 자신들이 했던 약속이 어겨졌을 때 조선군이 어떻게 나올지 알게 된 야인 여진 부족들이 전전긍긍했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군이 약탈을 당해 식량을 빼앗긴 부락에 되찾은 식량을 돌려주고 약탈과정에서 다친 여진인들을 치료해 주었다.
그러며 조선군이 약속을 남겼다.
누구라도 조선의 백성을 다치게 하고 식량을 빼앗으면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니 그런 일이 생기면 무조건 달려와 알리라고 말이다.
다시금 온 야인 여진 제부족들 사이로 소문 번져나갔다.
<조선 백성은 조선군이 무조건 지킨다>
식량을 빼앗아갔던 부족들의 결과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소문은 급격하고도 광범위하게 번져나갔다,
야인 여진 부족들의 인심이 급격하게 기울었다.
여진의 자존심 운운하며 부족민들의 굶주림에도 불구하고, 움직이지 않았던 몇몇 부족에서 부족장이 축출당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망설이던 여진 부락들이 각지의 조선군 주둔지로 달려오는 계기였다.
건주 여진이나 해서 여진처럼 소위 명문 씨족이 없이 고만고만한 부족들로 흩어져 살던 야인 여진은 그렇게 조선의 곡식과 안전 보장에 무너졌다.
조선의 예상보다도 너무나 쉽게 야인 여진이 무너진 것은 사실 조선이 공급한 곡식과 안전보장에 대한 약속 때문만은 아니었다.
긴 시간 발전해 가던 철산과 그곳에 사는 여진인들의 부유함을 끊임없이 목격해온 것이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철산의 시장은 주변 여진인들에게 열려있었다.
그들이 가져온 가죽과 말을 곡식과 맞바꿔 주어 왔으니까.
그런 과정에 가장 많은 혜택을 입었던 것은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야인 여진의 제부족들이었다.
그러기위해 수도 없이 철산을 방문했던 그들이 철산의, 조선의 부유함에 이끌리는 것은 당연했던 것이다.
더구나 철산에 사는 여진인들 중 대다수가 자신들과 같은 야인 여진 출신들이었으니까.
거기다 조선의 왕은 천둥을 부르고 번개를 마음대로 부리는 신인이었다.
합류해 따르는데 거리낌이 적을 수밖에 없는 연유였다.
광해 10년이 시작되던 서기 1601년 1월.
곡식을 무기삼아 송화강을 따라 동북쪽으로 계속 진군한 조선군이 드디어 흑룡강(黑龙江, 아무르강)에 닿았다.
북정군이 출발할 당시 정해진 북쪽의 경계선에 도달한 것이다.
그 아래로 드넓게 펼쳐진 황무지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이른바 삼강 평야로 불리는 땅을 드디어 조선이 차지한 것이다.
삼강평야는 송화강과 흑룡강, 그리고 오소리강(烏蘇里江, 우수리강) 사이에 존재하는 지역이다.
그 정점을 취하기 위해 김경서의 타격 제3 기동 병단이 흑룡강과 오소리강이 만나는 지역의 상부에 위치한 작은 평원에 군진을 세웠다.
북정군이 안도를 출발하기 전에 광해가 지정한 지역이었다.
현대시대의 지명으로는 하바로프스크, 러시아 극동지역의 중심이 되는 도시가 있던 자리였다.
조선은 이곳을 한자음을 따 백력(伯力)이라 불렀다.
러시아의 탐험가가 17세기 중엽에 발견하는 곳이니 지금은 러시아조차 그 존재를 모르는 땅이었다.
광해는 그곳에 조선의 최북방 도시를 세우길 원했던 것이다.
김경서는 영구 점령을 위한 요새 건설을 시작하면서 일단의 기마대를 추려 흑룡강을 따라 비석을 세우도록 지시했다.
훗날 흑룡강 경계비라 부르게 되는 것으로 조선의 북방 경계로 흑룡강을 삼는다는 내용이 적힌 길쭉한 돌비석이었다.
아울러 김경서는 왕이 지정한 지역에 도달하여 요새를 건설하고 비석을 세우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휘발천의 타격 전단 지휘부와 한성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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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서의 보고서를 받은 광해는 곧바로 수군을 움직여 왜인들이 가라후토(樺太, 화태)라 부르는 사할린에 대한 점령 작전에 들어갔다.
포항에서 1개 해병 여단을 실은 수송함대를 서태평양 함대가 호위해 사할린으로 향했다.
아직은 원주민인 아이누와 퉁구스계 야인들밖에 없어서 점령에 어려움은 없었다.
흑룡강을 향해 진군한 타격 제3 기동 병단과 마찬가지로 곡식으로 인근 부족을 조선에 합류시키며 송화강을 따라 서북쪽으로 진군한 타격 제2 기동 병단은 첫 번째 기착지인 합이빈(哈尔滨, 하얼빈)에 도착했다.
작은 부족이 차지하고 있던 합이빈에 무혈 입성한 조선군이 송화강 지류에 기대어 요새를 짓기 시작했다.
수십호에 지나지 않았던 기존의 여진 부족은 감히 그런 조선군에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다만 길림일대를 영역으로 삼고 있던 해서 여진의 또 다른 큰 부족이었던 오랍(烏拉) 씨족이 일단의 병력을 보내 그런 조선군의 활동을 지켜보았다.
조선군이 오랍 씨족의 영역과 맞다아 있는 송화강을 따라 북상한 까닭이었다.
괜한 충돌을 일으킬 생각이 없었던 타격 제2 기동 병단장 김덕령이 남간도 출신 군관 몇을 보내 오랍 씨족, 나아가 해서 여진과 적대할 생각이 없다는 조선군의 의도를 설명했다.
조선군이 대가 없이 휘발 씨족을 구원했었다는 소식을 들은 까닭인지 생각보다 오랍 씨족은 조선군의 설명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오랍 씨족의 병력이 돌아간 합이빈에 목조로 급히 세운 조선군의 요새가 완성되었다.
조선에서 건설단이 들어와 제대로 된 요새를 지을 때까지는 이 엉성한 목재 요새가 조선의 서북부 지역의 거점이 될 터였다.
김덕령은 방어 병력으로 3개 단, 3천의 병력을 남겨두고 다시 북상을 지속했다.
타격 제2 기동 병단에 주어진 임무는 명확했다.
송눈(松嫩) 평원으로 불리는 눈강 일대를 점령하고, 눈강을 조선의 서북쪽 경계로 삼는다는 경계비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서북쪽으로 계속 북상한 타격 제2 기동 병단이 드디어 눈강에 닿았다.
강변에 위치한 제제합이(齐齐哈尔, 치치하얼)을 조선군이 차지하고 들어앉았다.
소수의 야인들이 생활하고 있었지만 대규모의 조선군 규모에 겁을 먹고 모두 도주했다.
굳이 거주지를 빼앗을 생각은 없었는데 도주한 이들은 돌아올 생각이 없어보였다.
김덕령이 요새 건설을 명령했다.
부대원들이 요새를 짓는 사이 일단의 기마대를 내보내 눈강을 따라서 경계비를 설치하도록 했다.
흑룡강과 눈강의 거리가 좁혀지는 지역에서 양측을 연결하는 경계비의 건설까지가 타격 제2 기동 병단에게 맡겨진 임무였다.
타격 제2 기동 병단이 세운 경계비와 만나는 지점까지의 흑룡강변에 대한 경계비는 타격 제3 기동 병단이 세우고 있었다.
그로써 조선은 현대 지명으로 보았을 때 눈강과 흑룡강의 사이가 좁아지는 북강향(北疆乡)과 삼잡향(三卡乡)을 가로지르는 국경선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현대시대에서 대흥안령지구(大兴安岭地区)라 불리는 지역을 제외한 일대를 모두 조선의 강역으로 삼은 것이었다.
아울러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여진 부족들과 퉁구스계 야인 부족들을 모두 조선의 품에 안은 일이었다.
북쪽에서 조선의 영토를 넓히고 경계를 명확히 하는 일이 진행되는 동안 해외 5도라 불리는 지역에 대한 개발이 본궤도에 올랐다.
조선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해외 5도 출신 관리들이 의욕적으로 개발에 나서면서 탄력을 받은 것이다.
거기다 왕실 주도의 경제개발 계획이 발표되면서 해외 5도의 발전이 하루가 다르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은 도로의 개발이었다.
다수의 노동자를 고용해 각지를 연결하는 도로가 정비되고 확장되면서 포장까지 이루어지고 있었다.
도로는 군 병력의 빠른 이동에도 필요했지만 물산의 효율적인 이동과 상업의 발전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기반 시설이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광해가 해외 5도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공적 사업이 도로 확장이었던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워낙 낙후되어 있던 왜였기에 개발 과정에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고 있었지만 이와미 은광을 확보한 덕에 왕실은 큰 짐을 덜 수 있었다.
아울러 일단의 광부들을 사도가 섬으로 보내 금광의 개발을 시작했다.
본래는 유사시를 대비해 금광의 개발을 유보할 생각이었지만 광해는 조선의 경제 체제를 은 본위에서 금 본위로 바꾸기로 결정하고, 그에 필요한 금을 사도가 광산을 개발해 취할 생각이었다.
개척이 마무리단계에 접어 들어가는 북해도로 장원 농업개발부 사탕무 사업단이 파견되었다.
그들은 준비가 갖춰지는 대로 사탕무를 시범 재배하고, 이후 대규모 재배로 나설 요량이었다.
광해의 언질로 개발된 설탕 제조 시설도 수송 함대에 실려 북해도로 옮겨졌다.
그것을 설치하고 관리할 장원의 기술자들도 함께 북해도로 보내졌다.
시험 재배가 끝이 나면 그 수확물로 설탕의 시험 생산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광해는 북해도를 설탕 생산단지로 만들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최근에 점령한 사할린을 광해는 한자음을 따서 화태시라 칭하고 북해도에 예속 시켰다.
조선의 강역이 되었음을 명확히 하는 경계비를 세우고 해병대 병력 일부를 주둔 시켰다.
조선에 귀의를 청한 몇몇 부족을 모아 도시를 개발하기 시작했지만 화태 전체에 대한 개발은 보류되었다.
이때의 기술력으로는 개발할 자원도, 공간도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해는 후손들이 이 땅을 잘 지켜 그 가치를 인정받는 21세기까지 유지해 나갈 수 있게 되길 바랐다.
그것을 위해 광해는 후대 왕들을 위해 남기는 기록에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할 땅으로 사할린과 만주를 써 넣었다.
자원의 보고인 그 땅은 결국 조선이 강대국으로 나아가는 밑거름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련의 일들이 조선의 강역에서 벌어지던 사이 바다 멀리로 나간 조선 수군의 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