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휘발천(揮發川) 합의
누르하치와의 만남에서 돌아온 김경서가 신립에게 올린 보고는 그리 희망적인 것은 아니었다.
“멈출 것 같지 않습니다. 아마 몽골군의 단독 행동을 핑계로 휘발 씨족에 대한 전투 행위를 지속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말이 휘발 씨족에 대한 전투 행위이지 조선군이 함께 있는 이상 양측의 전투가 발발 할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었다.
“고생했네.”
김경서의 노고를 치하해 돌려보낸 신립이 김여물을 돌아봤다.
“아무래도 한번은 부딪쳐야 할 모양이야.”
“직접 겪기 전에는 멈출 수 없을 겁니다.”
“하긴 예상은 했지만······. 문제는 정말로 겨울에 전투를 치러야 하게 생겼다는 건데······.”
“기마를 움직이기 쉽지 않은 계절의 영향도 있고, 대회전을 벌여 본대를 치지는 않을 테지만, 휘발 씨족의 부락 중 한곳을 공격할 가능성은 높습니다. 어떻게 병력 분할해서 파견 할까요?”
김여물의 말에 잠시 고심하던 신립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기다린다. 놈들이 발톱을 드러내면 우린 일격으로 쓸어버린다. 무거운 한방을 보여줘서 추가적인 전투의지를 꺾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알겠습니다. 장군.”
두말없이 복명하는 김여물을 바라보며 신립이 작게 웃었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일단의 병력이 김여물의 예상대로 휘발 씨족의 부락 하나를 습격해 약탈하고 사람들을 죽였다.
휘발 씨족의 군대가 출동했지만 이미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누르하치의 몽골 군대는 마을을 떠난 뒤였다.
자칫 누르하치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고 판단한 휘발 씨족의 군대는 추적을 포기했다.
사태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 조선군에게 누르하치는 휘하의 몽골군이 말을 듣지 않고 단독으로 벌인 일이라는 핑계를 대었다.
김경서의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누르하치의 답을 받은 신립은 곧바로 사방으로 정찰병을 내보내 몽골군의 위치를 파악하도록 했다.
조선군이 복수에 나서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휘발 씨족의 전사들이 그런 조선군 정찰대의 길잡이를 자처하고 나섰다.
나흘, 겨울의 온 벌판을 헤집은 가운데 결국 약탈한 물자를 가지고 이동 중이던 몽골군을 발견했다.
신립은 2개 기동 병단을 투입해 격멸을 지시했다.
곧바로 조선군 군영을 떠난 1만의 기마대와 1천대의 6두마차가 눈 덮인 만주벌판을 달렸다.
조선군은 보군 위주라 속도 면에서 자신들을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라던 또 다른 누르하치 예상이 빗나가는 순간이었다.
게르를 펼치고 숙영 중이던 몽골군의 진영을 조선군이 기습했다.
1만의 기동보군이 야영지를 빙 둘러싸고 소총 일제사로 몽골군을 도륙했다.
일단의 몽골군이 말을 타고 도주를 시도했지만 대다수는 숙영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조선군의 총탄에 사살 됐다.
간신히 탈출한 몇 백의 기마도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조선군 기마대의 추격에 속절없이 죽어나갔다.
달리다 활을 쏘고, 또 달려 도주하여 거리를 벌인 다음에 또 활을 쏘아 상대를 녹이던 몽골군 특유의 전술이 먹히지 않았다.
일단 양측이 타고 있는 말이 같았다. 몽골마나 조선의 과하마나 지구력은 비슷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조선군은 몽골군의 활보다 사정거리가 긴 기마총을 가지고 있었다.
도주하는 와중에 몽골군이 속절없이 죽어나갔다.
결국 도주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몽골군이 반전하여 달려들었지만 근접 전투력에서조차 조선군에게 밀렸다.
조선군 상당수가 수년간 실전을 격은 데다 수많은 훈련으로 단련된 까닭에 근접 전투력이 상당히 뛰어났기 때문이다.
5천의 몽골군이 그렇게 숙영지에서, 또 도주하다 벌판에서 사냥 당하듯 죽어나갔다.
전투 보고를 받은 누르하치는 상당히 놀랐다.
수백도 아니고 수천의 몽골 기마대가 단 한 번의 전투에 녹아버렸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오죽하면 보고하는 수하에게 두 번, 세 번을 물었을 정도였다.
조선군의 기동성과 전투력이 건주 여진군과 다를 바 없었던 몽골군을 상회한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벌판에서 몽골군을 요격한 2만의 기동 병단이 휘발천 인근에 구축된 조선군 군영으로 회군하지 않고 여진 땅 깊숙이 진군했다.
갑작스런 조선군의 진입에 누르하치가 긴장했다.
그의 사신이 조선군 군영으로 달려왔다. 여진의 땅 깊숙이 들어가는 조선군의 의도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신립은 그렇게 달려온 누르하치의 사신에게 간단히 답해 돌려보냈다.
“대 조선국 국왕 전하의 명과 용호장군의 명을 모두 듣지 않고 독단으로 움직여 양측의 전투를 발생시킨 몽골족의 부락을 불태워 그 죄를 물으려 한다.”
신립의 답을 전해들은 누르하치는 고심했다.
정말로 조선군이 몽골족의 부락을 불태웠을 경우, 다른 몽골 부족들의 참전을 끌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그 생각을 곧바로 접을 수밖에 없었다.
진군하는 조선군에게 몇몇 여진 부락이 협조했다.
병사들에게 물을 내어주고, 고위 장수들을 자신들의 게르로 초대해 따듯한 음식과 잠자리를 내어준 것이다.
왜 이리 잘 해주느냐고 어떤 장수가 물었더니 돌아온 답이 의외였다.
“신인의 군대가 아닙니까? 온 백성에게 식량을 주고, 말을 먹여 살찌게 만드는 신인의 군대를 어찌 따듯하게 맞지 않겠습니까?”
광해에게 붙은 ‘신인’의 소문은 여진인들에게 그저 소문으로 끝나지 않는 듯 했다.
왕의 이름이 언급되었으니 조선군도 그냥 지나갈 수 없었다.
식량사정이 곤궁하다는 말을 들은 장수들이 군량 중 여유분의 일부를 풀어 그런 부락에 나누어 주었다.
사전에 계획된 일이 아니었으니 양이 많지도 않았다. 겨우 몇 포대에 불과했으니까.
주면서도 장수들은 욕이나 먹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소량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떠난 뒤로 길게 소문이 남았다.
<신인의 군대가 굶주린 여진 부락에 곡식을 풀었다>
아무리 작아도 여진에서 겨울의 식량은 목숨이다.
철산을 비롯해 남간도의 여진인들이 풍족해졌다지만 그것은 그들에 국한된 이야기일 뿐이다.
아직도 대부분의 여진인들은 식량사정이 좋지 못해 겨울이면 굶는 일이 잦았다.
겨울을 나기 위해 식량을 옆 부족에게서 약탈하는 전투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목숨과 맞바꾸어 얻는 것이 식량인 것이다.
그렇게 목숨과도 맞바꾸는 식량을 아무런 대가 없이 나눠주는 조선군에게 호의를 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진군하는 내내 마주친 부락이 여섯 곳, 그들과 모두 비슷비슷한 일이 있었다.
신인의 군대가 곤궁한 여진 백성들을 위해 곡식을 풀고 있다는 소문이 진군로를 벗어나 온 여진 땅에 번져나갔다.
그 소문을 듣고 달려온 부족이 있을 정도였다.
조선군이 그런 부락에도 적은 양이지만 일부 군량을 풀어 달래 보냈다.
‘신인’, ‘신인’을 연호하는 여진인들을 조선군이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하간 그 신인이라는 단어가 자신들의 국왕을 뜻하는 말이었으니까.
전쟁의 와중, 그것도 외국 땅 한복판에서 자국의 왕을 연호하는 이들을 만났으니 조선군이 사납게 대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 소식이 누르하치의 귀에 들어갔다.
조선군이 진군하는 지역은 최근 전쟁을 통해 간신히 병합한 합달 씨족의 부족들이 머무는 영역이었다.
그들의 민심이 급격하게 조선으로 휘어지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해결해 주지 못했던 배고픔을 조선군은 작지만 해결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방치하면 간신히 병합한 합달 씨족의 예하 부족들이 조선으로 붙을 가능성도 있었다.
정왜 전쟁을 통해 조선군은 적을 아군으로 돌리는 능력이 탁월한 군대로 소문이 나있는 상황이었다.
몽골과 조선이 척을 지어 자신에게 더 많은 몽골 부족이 협력하게 되기 이전에, 간신히 병합한 합달 씨족이 조선에 붙는 것이 더 빠를 것 같은 위기의식을 누르하치가 느낀 것이다.
결국 누르하치의 사신이 다시금 조선군 군영으로 달려왔다.
조선의 뜻에 따르겠다는 누르하치의 서신을 가진 사신이었다.
신립이 김경서를 다시 보내 누르하치 본인과 협의를 진행시켰다.
그 협의의 결과로 조선과 누르하치는 서로의 영역을 나누는 것에 합의했다.
눈강(嫩江)과 송화강(松花江) 이동(以東지)역에 대한 조선의 권리를 누르하치가 인정하고 휘발 씨족의 영역인 휘발천 인근에서 철군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 이서 지역에 대한 누르하치의 권리를 조선이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누르하치가 불만을 보였으나 해당 지역이 누르하치가 장악하지 못한 지역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으로 조선이 명문화를 거부했다.
대신 그 지역에 대한 누르하치의 군사적 활동에 대해 조선은 개입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누르하치로써는 합병을 계획하고 있던 대부분의 해서 여진 제부족이 그 지역에 포함된다는 것에서 불만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괜히 합의가 불발되어 조선군이 계속해서 개입하면 해서 여진에 대한 합병 작업이 불발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더구나 누르하치는 해서 여진의 또 다른 큰 부족인 후이파, 그러니까 오랍(烏拉) 씨족을 병합하는데 조선군이 개입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가뜩이나 강성한 오랍 씨족의 군대를 상대해야 하는데 조선군이 힘을 실어주면 건주 여진군이 패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합의에 누르하치가 동의한 직접적인 계기였다.
이 합의를 통해 조선은 4군을 설치할 때 압록 강변에 지은 여연성에서 시작해 송화강과 눈강에 접한 이동 지역을 영토로써 확보하게 되었다.
휘발천 합의라 불리는 이 약속은 정식 문서로 작성되어 누르하치와 신립이 수결을 놓아 그 증표로 삼았다.
이내 송화강 이서 지역 깊숙이 들어가 있던 병력이 진군을 중단하고 조선군의 주둔지로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건주 여진군이 휘발 씨족의 영역에서 회군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소식이 들려오자마자 휘발 씨족의 시선이 자신들의 땅에 머물고 있는 조선군에게로 돌아갔다.
강대한 적을 앞에 두고 있을 때는 든든한 조력자였지만 그 외적을 쫓아내고 나니 조력자가 부담스럽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을 요구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휘발 씨족에게 조선군이 철수하겠다는 통보를 보냈다.
달리 아무것도 요구한 것이 없는 깔끔한 철수통보였다.
하지만 휘발 씨족은 의심했다.
말은 저리해도 무언가를 원할 것이라고 말이다.
조선의 싸움에 병력을 내야 한다는 의무를 지우든지, 아니면 전마를 세폐로 내놓으라던지 무언가 요구가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조선군은 그 어떤 요구도 없이 진짜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당황한 것은 오히려 휘발 씨족이었다.
남아있을 때는 부담스럽기만 하던 존재가 정작 떠난다고 하니 두려움이 물씬 몰려왔던 것이다.
조선과 누르하치 사이에 맺어진 휘발천 합의에서 조선의 영토로 인정된 것은 송화강과 눈강의 이동 지역이었다.
휘발 씨족의 영역은 그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
건주 여진군이 물러갔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조선군의 힘을 두려워한 까닭이었으니까.
자칫 조선군이 물러간 것을 알고 건주 여진군이 다시 돌아올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