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말라카 습격사건
본격적인 가을로 접어들어 가던 9월의 어느 날, 일단의 포루투갈 상인들과 네덜란드 상인들이 연합한 20여척의 사략선이 말라카 인근 바다에서 조선 무역선단을 공격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 방법도 치졸하고 야비했다.
안전을 위해 함께 선단을 이루고 싶다는 뜻을 보내 조선 무역선단에 합류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배들이 경계가 느슨해지자 안면을 바꾸고 기습을 가했던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기습이었지만 다행히 공격은 격퇴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2척의 전열함과 4척의 조선무역선이 침몰하거나 대파되어 운항 능력을 상실했다.
사략선들은 6척이 살아남아 도주했다.
중상자들이 많아 조선 무역선단은 포르투갈의 치하에 있었던 말라카에 잠시 기항(寄港)하게 되었다.
마침 조선으로 돌아갈 사설 무역선단이 말라카에 머물고 있어서 그들 편에 해당 사실을 담은 보고서를 조선의 수군 총사부로 보냈다.
보고서를 접수한 수군 총사부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당시엔 부산포의 함대 기지로 동태평양 함대가 복귀한 상태였기에 수군 총사인 이순신이 직접 사태를 지휘했다.
해당 보고가 한성의 광해에게 올라갔다.
무역선단을 공격하여 재물과 배를 빼앗는 것을 무슨 사업쯤으로 생각하는 이 시대 유럽의 방식 상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라 생각하고 있던 광해는 엄정한 대응과 무자비한 보복을 명령했다.
조선의 무역선단을 건드리면 그 화가 무궁하다는 것을 유럽에 확실하게 인식시켜 놓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광해의 명령을 받은 이순신이 곧바로 동태평양 함대에 출전 준비를 지시했다.
휴가 중이던 장병들이 소집되었고, 정비를 마치고 대기 중이던 모든 함선에 무기와 보급품이 실리기 시작했다.
이때엔 동태평양 함대가 보유하고 있던 모든 하백급 전열함은 해모수급 전열함으로 교체된 후였다.
기존의 하백급 전열함들은 선수개량을 거쳐 전량 무역선단에 공급되었다.
현재까지 절반에 달하는 25척이 실제 무역선단에 투입되었고, 나머지는 새롭게 창설될 무역선단에 순차적으로 투입될 예정이었다.
그와 별도로 현재 수군의 개편을 포함한 선박의 개량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해외 5도가 생기면서 조선 수군이 지켜야할 바다의 면적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그 넓은 바다를 지키기 위해 조선 수군이 보유해야 할 함선의 수를 제식 전함인 전열함으로 채우는 것은 아무리 막대한 재화를 벌어들이고 있는 조선이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에 따라 전열함보다 작지만 충분한 대양 항해능력과 작전능력을 겸비한 새로운 범선의 설계가 거제 건선단지에서 진행 중이었다.
그것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해외 5도를 포함한 일본 전 해역에 대한 해상 경계와 방어 임무를 수군 수송함대와 함께 서태평양 함대가 맡고 있었다.
작전 구역상 동태평양 함대가 맡는 것이 타당했지만 함선 교체와 함께 근무 기간이 조금 더 길었던 동태평양 함대에 먼저 휴식을 취하도록 광해가 배려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발생한 조선 무역선단의 피습사건으로 인해 오히려 장거리 임무가 동태평양 함대에 떨어진 셈이 되었다.
한성으로 불려 올라간 이순신은 광해와 긴 시간 대화를 나누었고, 이번 사태에 대한 보복 외에도 별도의 특명을 받고 물러나왔다.
부산포로 귀환한 이순신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해모수급 전열함은 커진 선체와 늘어난 함포수로 인해 하백급 전열함보다 선원수가 40명 늘어난 240명이 정규편제였다.
하백급 전열함에 비해 층도 1개 층이 늘어난 해모수급 전열함은 그렇게 늘어난 갑판을 선실로 활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실 공간은 충분한 여유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그 선실을 활용할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의 일환으로 거제 건선단지에서 완성되어 곧 조선구도와 해외 5도를 잇는 정기선 항로에 투입될 예정이었던 조선무역선 10척을 광해의 허락을 얻어 동태평양 함대에 합류시켰다.
또한 이순신은 광해의 제가를 받아 해병대 1개 여단을 그렇게 증강된 동태평양 함대에 탑승시켰다.
해모수급 전열함에도 50명씩 나누어 태우고, 나머지 2천5백 명을 10척의 조선무역선에 탑승시켰다.
이것은 도선 전투만이 아니라 일정한 상륙작전까지도 소화해 내겠다는 결심 하에 이루어진 충원이었다.
현대시대로 보자면 일종의 해병 강습 기동함대의 구성이었다.
출항 전 이순시은 부산포까지 직접 걸음 한 광해의 전송을 받았다.
단순히 말라카에서 벌어진 조선 무역선단에 대한 습격에 대한 보복 작전에는 어울리지 않는 전송이었다.
그렇게 이순신의 동태평양 함대가 10월의 거친 물살을 헤치며 부산포를 떠났다.
이 함대의 1차 목표는 조선 무역선단이 습격을 받았었다는 말라카였다.
*****
동태평양 함대가 출항한지 보름정도가 지난 11월. 남간도에서 긴급 파발이 한성으로 달렸다.
해서 여진의 최대부족인 휘발 씨족의 제사장이 직접 찾아와 구원을 청했다는 내용의 보고서가 광해에게 전달되었다.
건주여진과의 전쟁에서 해서여진이 밀리고 있었다.
지난 해, 수없는 전투를 통해 해서 여진의 큰 씨족의 하나인 합달(哈達)을 결국 무릎 꿇려 병합한 누르하치가 해서 여진의 다른 씨족들을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실제 역사에서도 해서 여진은 결국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에게 패배해 통합된다.
더구나 광해가 그리는 미래의 여진과 명과의 관계를 위해서는 여진을 방해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개입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딸려온 남간도 관찰사 내음타방의 서신을 보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육군 총사를 불러라.”
광해의 명에 알지가 서둘러 내관을 보냈다.
정왜 전쟁이 끝난 후라 육군 총사 권률은 한성의 육군 총사부에 있었다.
내관을 통해 왕의 부름을 받은 권률이 곧바로 궐로 들어왔다. 그는 침전에서 기다리던 광해에게 안내되었다.
“찾으셨나이까? 전하.”
“이리로 가까이 오시오.”
광해의 말에 권률이 가까이 다가앉았다.
그런 그에게 광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북쪽으로 병력을 뺀다면 어느 정도나 가능하겠소?”
광해의 물음에 권률이 슬쩍 왕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사옵니까?”
“이걸 보는 게 빠르겠지.”
광해가 건네준 남간도 감영의 공식 보고서와 관찰사 내음타방이 개인 서신의 형태로 올린 것을 차례로 읽은 권률이 말했다.
“휘발 씨족을 비롯한 해서 여진을 통합한 건주 여진이 곧바로 북쪽의 야인 여진에 대한 통합전을 전개한다면 삼강 평야가 저들의 수중에 들어갈 수도 있겠군요.”
“맞소. 내음타방 관찰사도 그걸 걱정했소. 어차피 우리의 장기 계획에 삼강 평야를 포함한 북부 지역의 점령이 상정 되어 있으니 명분이 있는 지금 움직이자는 것이 내음타방 관찰사의 의견이요.”
광해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권률이 고개를 숙였다.
“소신도 내음타방 관찰사와 같은 생각이옵니다. 전쟁을 벌인 건주여진에 맞서 우리 조선군이 들어가면 침공군이 아니라 구원군이 되니······. 휘발 씨족은 물론이고, 건주여진의 위협을 받게 되는 야인 여진의 제부족들을 끌어당기는 데도 좋은 명분이 될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나도 그러한 생각이오. 어차피 치러야 할 전쟁이라지만 가능한 피를 덜 흘리는 것이 좋겠지. 명분이 설 때 움직이자는 내음타방 관찰사의 생각에 동의하는 바요.”
“하오면······?”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권률에게 광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즉시 작전 계획 설립하여 올리시오.”
“예. 전하.”
복명한 권률이 궐을 나서 육군 총사부로 귀환했다.
이후 여러 참모들과 논의한 작전계획이 광해에게 보고된 것은 사흘 후였다.
타격전단과 철산 돌격기마 병단을 투입하는 일련의 계획에 대해 광해가 제가하였다.
왕의 제가가 떨어지자 곧바로 타격 전단의 5개 기동 병단이 북쪽 끝 안도로 이동을 시작했다.
철산 돌격기마 병단도 그런 타격 전단과 함께 안도로 이동했다.
그렇게 구성된 6개 병단, 6만의 대병에 광해가 내린 이름은 북정군(北征軍)이었다.
*****
군사 행동을 벌이기엔 가장 좋지 않아 조선군이 당분간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누르하치의 예상을 깨고, 북정군이 12월의 칼바람을 헤치며 조선의 북쪽 끝 안도를 떠나 여진의 땅으로 진출했다.
1만의 휘발 씨족의 군대가 그런 조선군을 맞아들였다.
오랜 전투로 지친 기색이 역력한 휘발 씨족의 군대는 두꺼운 방한복으로 온몸을 감싼 조선군의 모습을 굉장히 신기하게 바라봤다.
수만에 달하는 병력이 모조리 군복 위에 솜이 들어간 겉옷을 덧입고 있다는 것에 휘발 씨족 전사들이 놀랐다.
군인뿐이 아니었다. 말들에게도 보온을 위한 마갑이 씌워져 있었다.
추위에 움직이지 않으려는 휘발 씨족의 말들과 달리 조선군의 말은 움직이는데 거침이 없었다.
휘발 씨족은 곧바로 건주 여진과의 전투를 원했지만 조선군의 생각은 달랐다.
조선군은 휘발 씨족의 영역인 휘발천 일대에 군영을 건설하자마자 일단의 사신단을 누르하치에게 보냈다.
경기 소총병단장에서 제3타격 기동 병단장으로 자리를 옮긴 김경서가 사신단의 단장을 맡았다.
건주여진은 그렇게 파견된 조선군의 사신들을 정중히 맞이했다.
누르하치에게 직접 전달된 국서는 신립이 아니라 광해의 교서였다.
내용은 준엄하고 위압적이었다.
<선조의 나라로써 말하노니 전쟁을 끝내고 자중하라. 주변 여진 제부족들이 혼란스러워하고 불안해 하니 더 이상의 걸음은 그대들의 선조가 세운 조선이 용납지 않을 것이다.>
교서를 받아본 누르하치의 눈가가 잘게 떨렸지만 큰 반발은 나오지 않았다.
‘선조의 나라’라는 항목도 트집을 잡을 수 없었다.
일전에 왜와의 전쟁을 돕기 위해 파병을 할 수 있다면서 보낸 국서에서 조선을 ‘선조의 나라’라 칭한 것이 바로 누르하치였기 때문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임진왜란 중인 조선에 누르하치는 ‘선조의 나라’를 들먹이며 원군을 보낼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했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선조의 나라 운운하는 조선을 탓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여 어찌하라는 것인가?”
차갑게 내려앉은 누르하치의 물음에 사신단의 대표였던 김경서가 답했다.
“진군을 끝내고 이쯤에서 그만 두라는 뜻이오.”
“거부한다면?”
누르하치의 물음에 김경서가 담담히 답했다.
“조선군은 괜히 이곳에 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로 답을 대신 하겠소.”
팽팽한 긴장감이 누르하치와 김경서 사이에 감돌았다.
누르하치의 휘하에 모인 병력은 5만, 조선군이 동원한 6만과 자웅을 겨룰만한 병력이었지만 왜와의 전쟁을 승리로 일군 조선군의 저력이 신경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맥없이 손을 들면 누르하치는 휘하 부족들의 존경을 잃는다.
그것에서 누르하치가 꾀를 내었다.
“우리가 조선의 뜻을 따르고자 해도 함께 싸운 몽골의 군대가 따르지 않을 것이다.”
누르하치의 휘하에 섞인 몽골의 군세는 1만. 동맹을 맺은 부족들이 보내온 전사들이었다.
그들을 핑계로 삼아 휘발 씨족에 대한 전투를 지속하려는 누르하치의 야심을 읽은 김경서가 답했다.
“그들이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조선군이 막아 세울 것이니 장군은 걱정하지 마시오.”
김경서는 고의적으로 누르하치를 장군으로 불렀다.
그것은 누르하치를 여진족의 대표가 아니라 명나라에서 용호장군의 위를 받은 장수로 대하겠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누르하치가 명나라에서 받은 용호장군의 위도 있었기에 누르하치는 화를 내지도 못했다.
“그리하던지.”
애매모호한 답이었지만 김경서는 그것으로 답을 대신해 조선군 군영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