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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106화 (106/325)

제106화. 조선군의 변화

나형 소총의 길이를 극단적으로 더 줄이고 총검 부착부를 제거한 기마용 단총(短銃)도 개발되었다.

총열의 길이를 줄이는 등 여러 가지 개량을 거치는 와중에 사거리가 줄어들었지만 기마병들이 기마 상태에서 쏠 것이었기 때문에 사거리의 감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원거리 사격으로 달리는 기마위에서 무엇을 맞춘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장원이 발표한 유효 살상사거리는 2백보에 달했다.

육군 총사부에서 실시한 시험 사격에선 3백보 밖의 목표를 맞춘 일도 여러 차례 나왔을 정도로 사거리의 신뢰도는 좋았다.

그렇게 개발된 기마총이 먼저 생산되어 개마 돌격기마 병단과 철산 돌격기마 병단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기마총의 보급을 기마병들이 열렬이 환영했다.

기마대의 경우 장거리 무기로 과거와 같이 활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활보다 작은 동작으로 먼 거리에서 빠르고, 정확하게 적을 사살할 수 있는 기마총의 보급이 기마대의 활용도를 늘여놓을 것이 분명했다.

기마총의 활용도가 기마병들로부터 환영을 받자 조선 육군은 기마총병 병단의 임무변화를 시도했다.

기마총병의 경우 기마병과 승마총병을 한기로 묶어 활용하기 위해서 구성된 부대였다.

하지만 기마병이 기마총으로 사격을 가할 수 있게 됨으로써 승마총병의 존재가 굳이 필요 없어진 것이다.

육군 총사부의 장수들과 참모들은 해당 부대에 대한 전면적인 재배치를 광해에게 청원했고, 재가를 받았다.

그렇게 취해진 기마총병 병단의 재배치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일단 승마총병들이 임무에서 해제되었다. 더 이상 말 뒤에 거꾸로 앉아 달리지 않아도 되게 되었던 것이다.

대신에 승마총병들을 기동 군단의 기동보군처럼 바꾸었다.

10명을 한대의 6두 마차에 태운 기동보군 5천과 기마총을 보급 받은 5천의 기마대를 엮어 1개의 기동 병단을 구성한 것이다.

그로인해 해체된 1개 기마총병 병단은 2개의 기동 병단으로 새롭게 편제되었다.

그로인해 비슷한 이름을 가지게 된 한성의 기동 군단을 왕도방어 군단으로 개칭하기로 하였다.

장병들은 왕도방어 군단을 줄여 ‘왕방군’이란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렀다.

아울러 소총 병단에 대한 기동 병단화가 함께 이루어졌다.

정왜 전쟁 중에 소총 병단의 이동속도로 인해 전체 부대의 진군에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 까닭이었다.

병력 투사에 있어 속도를 중요시 하는 조선군의 기조가 정립되는 순간이었다.

그로인해 조선 육군에 걸어서 이동하는 군대가 없어지는 상황이 도래했다.

그렇게 늘어난 기동보병을 위한 마차가 각지에서 대규모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또한 그 마차를 끌 말들이 대량으로 요청되었다.

그간 조선군이 사용한 말들의 대부분은 남간도를 통해 여진에서 수급되어 왔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그 수급이 원활하지 않았다.

여전히 누르하치의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의 전쟁이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족한 말들이 광해의 명으로 대규모 목장을 두고 말을 키우던 탐라에서 보충되기 시작했지만 워낙 많은 수의 말이 요구된 까닭에 부족분을 채우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그 탓에 각도에 전환 배치된 기동 병단엔 말이 없는 마차들을 보유한 병력이 상당수 존재하는 촌극까지 벌어졌다.

봄날의 햇살이 화창한 3월의 어느 날. 훈병원 분소들에서 재훈련이 끝난 해외 5도의 병력을 기존 조선군에 섞어 배치하는 전군 재배치 조치가 전격적으로 실행되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조선 14도 전역엔 각 도마다에 기동 병단 2개씩이 배치되었다.

모든 부대는 재배치 계획에 의거하여 기존의 팔도를 비롯해 남간도, 그리고 해외 5도 출신 병사들이 모두 일정 비율 이상으로 뒤섞여 있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부대도 존재했다.

특수부대라 불리는 이들로 팔도 출신들로만 구성된 개마 돌격기마 병단과 남간도 출신들로만 이루어진 철산 돌격기마 병단, 그리고 해외 5도 출신으로만 만들어진 단병격전 병단이 그러했다.

정왜 전쟁에서 돌아온 개마 돌격기마 병단은 과거처럼 부산포에, 철산 돌격기마 병단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철산에, 사무라이 병단이란 별칭이 붙은 단병격전 병단은 오사카에 배치되었다.

단병격전 병단의 경우 이상하게 사쓰마 출신 병사들이 많아서 그랬던지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 병단을 맡길 희망해서 허가 되었다.

5개의 기동 병단으로 재편된 타격 전단은 여전히 신립의 지휘 하에 동래에 주둔했다.

기동 전력인 타격 전단의 경우 유사시 북쪽으로의 이동이든, 부산포를 통한 해외 5도로의 투입이든 다 가능한 지역이었기에 동래가 선정된 것이었다.

아울러 신립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조선 육군에 새로운 병종이 생겼다.

바로 산악전 부대였다.

큐슈 동부에서 벌어졌던 산악전 경험을 토대로 편성된 이 부대들은 산악 수색과 산악 난전 등 다양한 산악전 형태에서 최적의 전투력을 발휘하도록 훈련되었다.

5개의 산악 병단을 구성하였고, 이들을 한데 묶어 산악 전단을 만들었다.

최초의 전단장은 신립의 추천을 받은 지세창이 맡았다.

내금위장인 태평은 그를 내금위로 다시 불러들이길 원했지만 지세창도 산악전 부대를 맡길 희망하여 광해가 그것을 허락했다.

전단 지휘부는 타격 전단과 마찬가지로 동래에 두고 있었지만 예하 부대들은 각지로 흩어져 주둔했다.

강원도와 전라도, 그리고 구주도와 서남도에 각기 1개씩의 병단을 주둔 시키고 동래의 사령부엔 지세창이 직접 지휘하는 산악 제1 병단이 주둔했다.

일련 하여 편제 변화 및 재배치를 끝마친 조선 육군은 29개 기동 병단, 5개 산악 병단, 2개 기마 병단, 1개 단병격전 병단, 그리고 왕도방어 군단을 합해 총 39만5천의 대병을 보유했다.

조당은 막대한 전비의 지출을 우려하여 군축을 거론했으나 광해는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조선의 앞날엔 정왜 전쟁 말고도 헤쳐 나가야 할 군사적 위협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위해 광해는 수군에도 대대적인 재편을 요구했다.

수군 총사 이순신에 의해 그 재편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필요한 함선의 건조에 대규모 재원과 시일이 필요해서 더디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로인해 수군엔 배를 가지지 못한 해상 병력이 다수 존재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광해는 그런 수군에 하나의 특별 병과의 신설을 명령했다.

해병대였다.

정왜 전쟁 와중에 벌어진 상륙 작전들이 대부분 포구 시설이 갖춰진 곳을 주로 활용했다는 것을 발견한 광해가 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지역에 대한 강습 상륙 작전을 펼칠 부대를 확보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그것을 위해 부대를 선별하는 과정에 생각지 못한 곳이 자원했다.

바로 장원 수비대였다.

과거 경인 옥사의 와중에 벌어졌던 전투에서 열세의 병력으로도 장원을 지켜냈던 이 부대는 그 수를 1천으로 늘린 지금도 정규 병력이 아닌 준군사집단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포청의 포졸들과 정규군 사이의 애매한 위치였다고나 할까.

그 위치의 변화를 모색하던 장원 수비대가 자원해 나섰던 것이다.

그것을 광해가 기쁘게 수락했다.

사실 이 장원 수비대의 전투력은 상당했다. 소수의 인원으로 다수의 적을 상대해야 한다는 기조가 뿌리 깊게 내려있던 까닭에 훈련도 굉장히 강하고 실전적이었다.

포격, 소총 사격, 살수 병기를 통한 격전. 모두에 능통해야 했던 것이다.

거기다 굉장한 자부심, 죽어도 지키는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는 결사의 의지를 표상으로 내세운 이들의 전투력은 사나운 범과 같았다.

이들을 포항으로 보내 해병대 창설을 맡겼다. 광해는 병력을 추가로 모집해 5천으로 구성된 여단 5개를 만들도록 명령했다.

수비대가 포항으로 가면서 비게 되는 장원의 경비는 포청에 이관했다.

포청은 장원의 경비를 위해 특수 경비단을 신설했다.

정규군에 버금가는 중무장을 갖춘 포졸 2천으로 구성된 이 경비단이 장원의 경비를 완벽하게 인수했다.

*****

조선 각지에서 장원 농업 발전부 화훼개량조에서 명나라의 월계화와의 접목으로 개량해 보급한 화사한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그렇게 장미로 온 조선이 꽃핀 5월, 교육과정을 마친 해외 5도 출신 장수들과 관리들에 대한 수료식이 육군학당과 왕립 행정학당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을 광해가 궐로 불러 연회를 열고 위문했다.

해외 5도 출신 장수들과 관리들이 이 자리에서 광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광해가 기뻐하며 일일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 그들을 격려했다.

이날 과거의 약속대로 모리 데루모토가 서남도의 관찰사로 제수되었다.

사국도의 관찰사로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政, 봉수하 가정)가, 관서도의 관찰사로는 가장 먼저 달려왔던 호소카와 타다오키가 새로 임명되었다.

일종의 공로가 인정된 셈이었다.

사국도에서 가장 유력한 다이묘 출신이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장수로 남길 원해서 병단장에 임명되었다.

그 외에도 다수의 관리와 장수가 임명되어 직분을 받았다.

해외 5도인들에 대한 한자음을 차음한 이름의 개명요구는 없었다.

광해는 각지의 문화를 최대한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라를 이끌길 원했다.

그것은 남간도도 마찬가지였는데 이상하게 그들은 만주어 대신 한자음을 차음한 이름으로 불리길 원했다.

조선이 그렇게 하니 이제 조선인이 된 자신들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래서 청나라가 한족에 쉽게 동화되어 버린 게 아니었나 싶었을 정도로 그들은 조선의 문화를 깊이 탐닉하고 습득해 그대로 썼다.

여하간 연회가 끝난 다음 날, 그들이 각자의 근무지가 있는 해외 5도로 돌아갔다.

중요 인사를 불러 인질로 삼는 것이 아니라 진짜 지식과 방법을 전수하는 조선의 교육방식에 해외 5도 지도층이 굉장한 호감을 가지게 되는 계기였다.

이것은 곧바로 자신들의 자식을 한성에 위치한 고등학당에 보내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바야흐로 조선시대에도 한성에 존재하는 고등학당들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

한 낯의 무더위가 극성을 부리던 7월 포항에서 5개 여단으로 구성된 해병대의 편제가 완료되었다.

1차 훈련을 마친 이들을 광해가 직접 포항까지 내려가서 사열하고 그 공로를 치하했다.

초대 해병대 사령을 맡은 이는 의외의 인물이었다.

바로 곽재우였다.

곽재우가 해병대 초대 사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장원수비대의 지휘관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광해가 그의 외골수인 성품을 믿고, 장원이 설립되던 초기 그에게 장원 수비대의 지휘관을 제의하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때까지도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던 곽재우는 당시 광해군의 설득에 응해 장원 수비대를 맡았었다.

이후 그는 광해의 믿음을 선조의 탐욕으로부터 장원을 지켜내는 것으로 보답했고, 지금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곽재우가 임진왜란에서 붉은 옷을 입고 다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수비대의 지휘를 맡은 이후에도 붉은 옷을 입고 다녔는데 광해는 그것에 착안해 해병대의 복장에 붉은 색을 주로 사용하도록 했다.

그것은 묘하게도 현대 시대의 해병대가 애용하는 색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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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가 한풀 꺾여가던 8월 말.

드디어 명과 유럽 간의 교역에 대한 독점권을 조필이 운영하는 철산 상단이 황제에게서 얻어냈다.

막대한 재정이 소모된 일이긴 했으나 그것으로 거둘 소득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명나라 상단들은 외국 상인들에게 물건을 파나, 조필의 철산 상단에 파나 달라질 것이 없었기에 별다른 반발은 없었다.

그것은 외국 상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명나라 상단을 상대해야 했던 것이 철산 상단으로 통일 되었다 뿐이지 거래에 변화가 생긴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확한 정가로 물건을 제공하는 철산 상단의 운영 방식에 환호하는 유럽 상인들이 더 많았다.

물론 대규모의 조선 무역선단이 명과 유럽 간의 무역에 뛰어들긴 했지만 물량의 확대는 오히려 유럽에서 명나라 물건에 대한 수요를 늘려놓은 측면이 커서 오히려 환영을 받았다.

뜻밖의 사건은 그런 변화의 와중에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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