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화. 북해도 개척
배편이 부족해서 수군 수송함대의 투입이 검토된 적도 있었으나 그들은 북해도로 노비와 그 가족들을 실어 나르는 것만으로도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결국 이주민의 이동은 정기선으로만 감당해야 했다.
그나마 안정된 조선을 떠나 해외의 영토로 이주하는 이들이 많았던 것은 전란 통에 남간도로 피난 온 여진인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그렇게 피난 온 이들에게 식량과 잠자리를 위한 천막을 제공해 왔다.
하지만 정착을 유도하여 백성으로 받아들이는 일엔 소극적이었다.
피난민들이 전쟁이 벌어진 여진 씨족들에 속한 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자칫 그들을 받아들인 일로 나중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조선이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광해의 명으로 그 기조가 달라졌다.
원하는 이들에게 조선의 땅이 된 해외 영토로 이주시키고, 조선의 백성으로 삼겠다는 공표가 있었던 것이다.
많은 수의 여진인들이 조선의 백성이 되는 길이라면 해외로 떠나는 것도 감수할 수 있다고 나섰다.
조선이 그들을 위해 길을 열고 배를 내었다.
그렇게 조선의 해외 영토로 대규모 이주가 시작되면서 해당 지역의 거주민들에 조선인과 여진인이 섞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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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이 만발한 5월답게 북해도에도 다양한 꽃이 흐드러진 자태를 드러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꽃들이 피로 물드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간 조용하던 아이누들의 집단 반발이 북해도에서 튀어나왔던 것이다.
조선의 개척이 진척되면서 자신들의 영역이 침범 당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더니 결국 폭발한 것이다.
사태의 초기에 조선군은 무장대응 보다는 설득에 주안점을 두었지만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했다.
종래엔 아이누들의 반발이 결국 무장봉기로 악화되었다.
더구나 이 무장봉기에 휘말린 교섭단이 죽임을 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더 이상 말로써는 통제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북해도 점령군 사령은 곧바로 진압을 명령했다.
아이누들에겐 불행히도 북해도 점령군 사령은 구주도 출신 조선인인 시마즈 요시히로였다.
휘하의 부대는 조선군 소총병단 3개와 사쓰마 단병 병단 1개였다.
1만 3천의 병력이 야포 60문의 포격 지원을 받으며 아이누들을 격파했다.
조총대신 가형 소총으로 무장한 소총병단의 일제사 후에 돌진한 사쓰마 단병 병단의 병사들이 그 유명한 사쓰마의 전투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실전으로 다져진 조선군이 아이누들을 무서운 기세로 몰아붙였다.
그렇게 패색이 짙어진 아이누들에게 조선군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완전 격파가 가능한 시점에서 자신들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 대신 설득을 선택한 조선군의 이야기에 아이누들이 비로소 귀를 기울였다.
새로 구성된 교섭단을 통해 양측은 합의에 성공했다.
아이누들이 조선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대신 조선은 아이누들의 전통을 존중하기로 했다.
반발한 일부 아이누들이 산속으로 들어갔다.
문제가 될 거란 지적에 조선 측에 가담한 아이누들이 최대한 다시 설득해보고 안되면······. 자체적으로 정리하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조선군이 그것을 수락했다.
사태가 진정되자 그동안 중단되어 있었던 북해도의 개척 사업이 다시 시작되었다.
개척사업의 제1목표는 농지였다.
산을 깎아 계단식 농지를 만들고, 황무지 벌판을 갈아 농지로 만들었다.
수리시설의 공사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도처에 저수지를 만들고 농수로를 파 농지와 연결하였다.
30만의 노비와 급히 동원된 5만 마리의 소와 말이 움직였다.
조선 본토에서 대량의 농기계가 들어왔다,
농기계라고 해서 현대식으로 기계를 말하는 건 아니고, 철기로 된 농사용 장비들이었다.
소나 말로 끌 수 있는 세발 쟁기에서부터 돌을 실어 나를 수 있는 농사용 우마차까지 장원이 개발한 각종 농기계가 모두 사용되고 있었다.
순수하게 인력으로 진행되던 개척 사업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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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8년 8월 1일.
광해가 주고쿠와 간사이, 그리고 홋카이도 지역을 서남도(西南道)와 관서도(関西道), 그리고 북해도(北海道)라 칭하여 정식으로 조선의 강역으로 선포하였다.
본래 명칭의 한자음을 따온 관서도나 북해도와 달리 주고쿠 지방을 서남도라 칭한 것은 한자의 음이 ‘중국’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쓸데없이 명을 자극할 필요가 없기에 명칭을 바꾸기로 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이제 조선은 14개 도를 아우르게 되었다.
사람들은 새롭게 조선 강역에 포함된 구주도와 사국도, 서남도, 관서도, 그리고 북해도를 해외 5도라 불렀다.
구주도와 사국도에서 진행되었던 개혁 작업들이 서남도와 관서도, 그리고 한창 개척사업이 진행 중인 북해도에서도 시작되었다.
이젠 사국도 아와지시로 불리게 된 아와지 섬에서 큐슈 상륙작전 초기부터 진주해 있던 김경서의 경기 소총 병단이 귀국길에 올랐다.
오랜 원정 임무를 맡고 있던 조선군 부대들 중 최초의 귀국 부대였다.
경기 소총 병단이 귀국한 시점부터 왜인 부대에 대한 전면적인 재교육이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노비로 구성된 북해도를 제외한 구주도, 사국도, 서남도, 관서도에서 병사들의 분류가 시작되었다.
우선순위는 군대에 남길 희망하는 이들을 분류하는 작업이었다.
원하지 않는 이들은 모두 군역에서 해제시켜 귀가 시켰지만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직업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왜인들의 입장에서 군에 남으면 상당한 금액의 급료가 지급된다는 것은 굉장한 매력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 군역법에 적용되는 연령대인 18세부터 20세까지의 인원은 개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모조리 군에 잔류시켰다.
이제 해외 5도의 조선인들도 모두 조선의 법에 따라야했기 때문이다.
그 외 군대에 남길 희망한 이들을 추려 조선군 교관들이 배치된 훈병원 분소에서 조선군식 훈련이 개시되었다.
물경 10만에 달하는 대병력이었다.
장수 집단에 대한 교륙도 병행되었다. 장수들은 전원 한성의 육군학당으로 소집되었다.
갑작스런 소집명령에 대해 불안해하는 이들이 많았다.
자칫 인질이 되어 한성에서 늙어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승자가 패자의 중요 인사를 인질로 삼는 일을 당연시 했던 왜의 풍속 때문에 벌어진 오해였다.
그렇다고 왕명이 내려졌는데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휘하의 군병들은 이미 개혁조치에 의해 모조리 흩어지거나 훈련을 명목으로 훈병원 분소에 들어가 있었다.
막말로 대항하고 싶어도 그럴 수 있는 힘이 없었다.
가을이 시작되는 9월, 장수로 남기로 한 다이묘 출신 왜인들이 모두 부산포로 향하는 정기선에 올랐다.
그로부터 며칠 후, 관리를 선택한 다이묘들에게도 한성에 위치한 왕립 행정학당에 입학 하라는 왕명이 내려왔다.
입학 명령을 받은 다이묘 출신 관리들도 불안해했지만 그들도 다이묘 출신 장수들과 마찬가지로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다수의 관리들이 가문의 당주를 자신들의 장자에게 물려주고 조선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을 정도로 위기감이 높았다.
그렇게 해외 4도를 출발한 왜인 관리들이 부산포에 도착하던 날, 일단의 조선 무역선단이 부산포를 떠나고 있었다.
이미 조선은 5척의 전열함과 10척의 조선무역선으로 구성된 5개의 무역선단을 유럽과의 무역 노선에 투입하고 있었다.
아시아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에스파냐는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고, 잉글랜드는 아직 에스파냐만큼의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그 사이를 네덜란드가 파고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는데 정작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던 것은 조선의 무역선단 이었던 것이다.
그런 일련의 성과로 인해 최근 들어 유럽과 아시아의 무역은 조선 무역선단이 주도하고 있었다.
대량의 물량과 다양한 물품, 뛰어난 품질. 무엇하나 뒤지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광해는 추가로 무역선단을 조성해 명과 유럽 사이의 무역은 물론이고 향신료 무역으로 대변되는 인도와 유럽의 무역도 조선 무역선단이 독점하도록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한 첫 단계로 조필이 명과 유럽 간의 교역을 독점하기 위해 명나라 조정에 막대한 재화를 풀고 있었다.
차츰 양인들의 행패와 마찰로 문제가 많아지던 명나라 조정도 유럽과의 일을 상대적으로 다루기 쉽다고 생각한 조선에 맡기는 것에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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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련의 일들이 진행되던 시기, 한성의 육군학당과 고위 관리의 교육을 위해 설립된 왕립 행정학당에 입학한 해외 5도 출신 장수와 관리들에 대해 강도 높은 교육이 진행되었다.
그들은 어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광해는 진짜로 그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한성으로 불러들였던 것이다.
물론 그것을 믿지 못했던 왜인들은 매달 시행되는 시험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자칫 떨어지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해외 4도 출신 장수들과 관리들의 성적과 성취도를 비약적으로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조선식 사고방식과 제도에 완벽하게 적응해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해가 바뀌고 서기1600년, 광해 9년이 밝았다.
현대였으면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작이라고 시끌벅적했겠지만 조선은 조용했다.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새해였기 때문이다.
그게 아쉬웠던가?
광해가 일단의 개혁조치를 발동했다.
공문서에 한자, 한글 병기가 일제히 한글 단독 표기로 바뀌었다.
한자는 부득이 한 경우 첨자(添字)로 쓰게 하였고, 원칙적으로 한글을 쓰게 하였다.
또한 서반아, 포도아, 화란 등 한자 표기를 기준으로 한 외국의 이름을 에스파냐,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 원이름으로 표기하게 했다.
한성에만 있던 시계탑을 우선 감영이 있는 각도의 행정중심지에도 확대하여 설치하도록 명했다.
향후 이것을 점진적으로 시와 읍, 나아가 리 단위까지 늘려나갈 계획이었다.
촌, 척, 되, 말 등 일련의 개량형을 통일했다.
각지마다 조금씩 달랐던 이것에 그 원기(原器)를 만들어 보급함으로써 기준을 세웠다.
현대 도량형과 같은 원자단위의 세밀한 기준을 세울 수는 없었지만 크기를 통일하고 무게를 같게 하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온 조선이 새 제도에 적응하느라 소란스러웠다.
광해9년 2월 장원 무기연구소에서 새로운 제식 소총을 개발했다.
가형 소총의 탄환과 격발 과정을 그대로 답습한 이 새로운 총기는 8연발 리볼버(revolver) 식 탄창을 채용하고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도 리볼버 탄창을 채용한 총은 이미 1580년에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제작된 것이 있었다.
그걸 생각하면 오히려 조선이 조금 늦은 셈이다.
다만 실제역사에서 이 시대의 리볼버가 탄의 장전 방식이 화약과 탄환을 일일이 장전하는 기존 방식을 채용하여 오히려 장탄 시간이 늘어난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던 데 반해 조선이 개발한 리볼버는 가형 소총의 탄환을 삽탄하는 것만으로 장탄이 완료된다는 결정적인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 차이로 인해 병사들은 사격시 재장전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노리쇠를 후퇴 장전시키는 행위도 필요 없었다.
방아쇠를 당기는 것만으로도 리볼버가 회전하면서 자동 장전된다.
다시 말해 8발을 모두 사격하는 동안 별도의 장탄 행동이 필요 없어졌다는 뜻이었다.
물론 흑색화약을 사용하는 이상, 총열에 탄매가 끼는 것은 여전했기에 다 쏘면 총열을 청소해야만 했다.
이총을 개발하는데 가장 어려웠던 점은 가스의 누출을 막는 것이었다.
장원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굉장한 노력을 기울였고 상당한 진척을 보았다.
고질적인 가스 누출 현상을 빚었던 가형 소총을 개량하면서 습득한 조선의 무기 개발 기술력이 그 바탕에 있었다.
그 덕에 리볼버 형식의 최대 단점인 가스 누출을 상당히 억제한 조선식 리볼버 소총이 탄생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 밀폐가 가능해 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전처럼 누출되는 가스에 총을 쏘는 병사가 다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총열의 길이는 가형 소총에 비해 줄어들었는데 이것은 정왜 전쟁의 경험에 바탕을 둔 개량의 일환이었다.
특히 산악전 상황에서 가형 소총의 길이가 너무 길어 작전 전개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보고에 따른 것이었다.
이 신형 소총에 장원은 나형 소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것에 기반해 병사들 사이에서는 나총이라 불렸다.
정왜 전쟁의 와중에 가형 소총이 최대사거리인 6백보 거리에서 적을 살상하지 못한 결과가 수없이 보고된 까닭인지 장원은 신형 나형 소총의 경우 최대사거리 없이 살상 유효사거리만 발표했다.
그렇게 장원이 발표한 나형 소총의 살상 유효사거리는 4백보였지만 시험 사격에서 가형 소총처럼 6백보에서도 살상력을 발휘하는 결과도 여러 차례 보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