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불타는 오사카 성
포단 위로 모든 포가 올려져 준비를 갖추자 백규가 신립을 돌아봤다.
지휘부를 위해 마련된 공간에 올라선 신립이 그런 백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백규가 시험 사격 포대로 지목된 10문의 포에 사격을 명했다.
콰과과쾅.
곳곳에서 포성이 울리고 포가 발포되었다.
쐐애애애액.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이끌고 날아간 폭발탄들이 모두 성벽을 넘어 갔다.
그리고 잠시 후,
콰과과쾅!
지켜보던 동군은 꽤난 놀란 표정이었지만 포단 위의 조선군 포병들은 오사카 성 안에서 터진 폭발탄의 위력보다 발포된 포 밑의 땅이 얼마나 견디는지에 관심을 집중했다.
“이상 없습니다. 땅 내림도 발견되지 않았고, 무너짐도 관측되지 않았습니다.”
백규의 보고에 안도의 표정을 지은 신립이 말했다.
“그래도 방심하지 말고, 도처에 관측병 두고 포단을 주시해. 인위적으로 쌓은 것 위에서 포를 발사하는 것이라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에. 장군.”
두말없이 복명하는 백규에게 신립이 말했다.
“그럼 뭐해. 얼른 쏘지 않고.”
“아! 예. 장군.”
복명한 백규가 수하들에게 몇 가지 명령을 내리고 잠시 후, 청기와 황기를 거쳐 이내 적기가 올라갔다.
곧바로 9백문에 달하는 야포들이 일제히 오사카 성을 향해 불을 뿜었다.
포성이 천지를 진동했고, 포연으로 온 하늘이 하얗게 물들었다.
사용된 포탄은 육군용인 산탄포탄과 수군용인 화염포탄이 반반씩 섞였다.
성벽을 넘어 성 안으로 떨어진 포탄들이 폭발하면서 오사카 성 안은 아비규환의 장이 되어버렸다.
기존의 화포 공격 방식대로 성벽을 직접 때릴 것이라 생각했던 동군이나 서군 모두를 당황시킨 포격이었다.
왜군이 으레 그래왔듯 몇 번 쏴대고 보병이 돌격할 것이라던 예상도 빗나갔다.
거의 3시간이 넘는 포격이 이루어졌다.
왜군으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대량의 화약과 포탄이 사용되었다.
훗날 들려온 이야기에 의하면 그 막대한 물량전을 바라보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던가.
하긴 그만큼의 포탄이 자신들에게 쏟아질 걸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렸을 테니까.
여하간 그렇게 대량의 포격이 가해진 오사카 성 내 곳곳에서 일어났던 화재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목조건물로 지어진 오사카 성내의 건물들이 화염포탄에 의해 동시다발적으로 불이 붙었다.
그 불을 끄기 위해 병사들과 성민들이 달라붙으면 어느새 날아온 산탄포탄에 큰 피해를 입었다.
불을 제대로 끌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본성으로 옮겨 붙은 불로 오사카 성 전체가 불타올랐다.
굳게 닫힌 채 열릴 줄 몰랐던 성문이 열리고 불지옥으로 변한 오사카 성을 사람들이 탈출하기 시작했다.
앞에 진을 치고 대기하던 조선군 왜인 부대가 그런 이들을 분류해 수용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보름간 두들겨도 열지 못했던 오사카 성을 공격개시 후 단 몇 시간 만에 깨버린 조선군의 전투방식과 화력에 동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때의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의 모든 성을 석조로 고쳐 지으라고 특별히 엄명을 내렸을 정도였다.
충격을 받긴 휘하의 다이묘들과 장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죽하면 조선군과 결전을 벌여 이길 수 있는 길은 지금 기습하는 것뿐이니 당장 공격하자고 주장하는 다이묘들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조선군을 사국도와 구주도에서 주고쿠 지역으로 수송을 마친 서태평양 함대가 다수의 조선군이 탑승한 수송함대를 거느린 채 다시금 도쿄만으로 돌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에도로 상당수의 병력을 돌려보낸 상태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본 조선군의 화력으로 미루어 그들이 상륙한다면 에도에 남아있는 병력으로 버티긴 어려워 보였다.
그러니 조선군이 에도에 상륙할 빌미를 줄 필요는 없었다.
더구나 기습도 성공할 것이란 장담을 하지 못했다.
만에 하나 자신들의 기습이 막힌다면. 곧이어 저 무시무시한 화포들이 자신들의 머리 위로 불벼락을 내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기습을 주장하는 몇몇 휘하 다이묘들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부한 연유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 결정은 사실 그에겐 천운이었다.
사실 오사카 성에 집중하고 있던 포병대, 그리고 일부 왜인 부대와 달리 조선군 소총 병단과 기마총병 병단, 그리고 대다수의 왜인 부대는 동군과의 전투에 대비한 형태로 배치되어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개마 돌격기마 병단과 왜인 부대 소속 기마대의 경우엔 말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폭음을 이유로 오사카 성에서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이들은 사실 유사시 동군 허리어림을 향해 고속으로 돌진하도록 명령받고 대기하는 상태였다.
그들이 동군의 허리를 잘라내면 전방에 고립된 동군의 선두부를 조선군 소총 병단이 짓뭉개고, 기마총병 병단이 빠른 기동력으로 뒤를 돌아 허리가 잘린 동군의 후미를 칠 예정이었다.
그렇게 부서진 동군의 숨통은 보군으로 구성된 왜인 병단들이 돌격해 난전으로 끊어버릴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동군이 자리를 지키고 허튼짓을 하지 않은 까닭에 그대로 계획으로 끝나버렸지만 말이다.
그렇게 동군이 자리를 지키는 가운데 진행된 조선군의 오사카 성 공략은 어느덧 끝을 보아가고 있었다.
도요토미 가문의 계승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그의 모친인 요도도노(淀殿, 정전)와 함께 화재의 와중에 자결했다.
오사카 성 수성전을 주장해 실현시켰던 오타니 요시츠구는 조선군의 포격 와중에 전사했고, 이시다 미쓰나리는 탈출해 사로잡혔다.
그 소식을 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시다 미쓰나리의 신병 인도를 조선군에 정중히 요청해왔다.
신립은 그 요청을 수락해 사로잡힌 이시다 미쓰나리를 동군으로 보냈다.
그의 신병을 인계 받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병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이시다 미쓰나리의 목을 베어 참수했다.
그것으로 오사카 전투가 완전히 끝이 났다.
동군은 도쿄만 협정에 의거하여 간사이 지방에서 철수했다.
이로써 주고쿠와 간사이 지역으로 이루어진 혼슈 서쪽을 조선군이 완벽히 장악하게 되었다,
장장 7년을 끌어오던 정왜 전쟁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또한 이것은 역사에 동일본(東日本)이란 국명이 시작되는 첫 날이기도 했다.
*****
새로 장악한 주고쿠와 간사이 지역에 대한 정비 작업에 조선군이 분주한 일정을 소화하던 시기, 서태평양 함대가 수송함대와 함께 도쿄만을 떠나 홋카이도, 그러니까 북해도로 향했다.
광해가 십년도 전에 계획했던 북해도 점령이 드디어 시작된 것이었다.
이당시만 해도 왜인들이 에조치[蝦夷地]라 부르던 북해도엔 최근 카키자키에서 마츠마에로 이름을 바꾼 가문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더구나 그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생전 에조치는 물론이고 사할린에 대한 교역권을 인정받으며 주인장(朱印狀)까지 발부받았다.
한마디로 자신들의 영지로 삼은 것이다.
왜의 입장에서도 주인장을 발부한 땅이니 왜의 영토라 선포한 셈이었다.
그렇다고 북해도 전체를 세력권으로 둔 것은 아니고 북해도의 오시마 반도 끝자락에 간신히 발을 붙인 정도에 불과했다.
당연히 왜인들이 에조라 부르는 북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들은 전혀 동의한 바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 상태의 북해도로 조선군이 접근했다.
성까지 바꿔가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양쪽에 발을 하나씩 걸쳐두었을 정도로 눈치가 빨랐던 마츠마에 가문이 이번엔 실수를 했다.
빼앗길 수 없다는 절박감이 컸는지 접근하던 조선군 함선을 향해 조총과 활을 쏜 것이다.
북해도를 점령함에 있어 조선군이 받은 명령은 가능한 무력 사용은 자제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공격 받는데 참으라는 명은 아니었다.
당연히 반격은 즉각적이었다.
서태평양 함대가 야포 일제사로 응사하면서 마츠마에 가문이 가지고 있던 병력의 대다수가 포구와 해변 일대에서 덧없이 소모되어버렸다.
나머진 상륙한 조선군이 간단히 쓸어버림으로써 마츠마에 가문의 북해도 점유가 막을 내렸다.
그 전투 장면을 아이누들이 모두 지켜보았다. 그들이 본 조선군은 천둥소리를 울리고, 먼 곳에 불을 내는 능력을 가진 이들이었다.
반항을 택한 이들보다는 순응을 보인 이들이 훨씬 많았다.
아이누의 말을 아는 사국도 출신 조선인을 앞세워 이제부터 이 땅이 조선의 것이 되었다고 말했지만 그 의미를 알아듣는 아이누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
하긴 갑자기 나타나 내 땅을 지들 땅이라고 말하는데 이해가 간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만.
조선군은 그들을 천천히 이해시키기로 하고, 아이누의 마을을 피해 상륙거점을 만들고 대규모 수용시설을 짓기 시작했다.
조선군이 북해도를 차지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냥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도쿄만 협정에 의거하여 그에게 허락된 지역은 혼슈 중부의 주부 지역과 동부에 위치한 간토, 그리고 도호쿠(東北, 동북) 지역에 국한 된 까닭이다.
바다로는 나갈 수 없었다.
도쿄만 협정에서 조선이 그것을 강제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기존에 왜에 부속되어 있던 모든 섬의 권리는 조선으로 넘어갔다.
그것이 설사 도호쿠나 간토 지역, 또는 주부 지역에 가까운 섬일지라도 말이다.
수군의 세력이 절대적으로 열세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 조건에 합의했다.
있어도 지킬 수 없는 섬들로 기운을 빼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을 정도로 이 당시의 왜는 조선 수군에 대해 두려움을 넘어 공포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에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손 놓고 구경하는 동안 조선의 북해도 개척은 착착 진행되어갔다.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해지자 조선은 정왜 전쟁기간 동안 조선군에 저항했던 큐슈 북부와 동부, 그리고 오사카 일대의 주민들과 포로들을 모조리 노비로 삼았다.
그 수가 물경 60만 명에 육박했다. 그 중 조선의 기준으로 육체노동가능 인구가 30만 가량이었다.
조선은 그들을 북해도 개척 사업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조건은 20년간 일하면 면천시켜준다는 것이었다.
노임은 정규 품삯의 절반이 제시되었다.
강제노역이었기에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래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노임을 준다는 것에 놀란 이들도 있었다.
노비가 된다는 소리에 인생이 끝장난 줄 알았던 이들로써는 면천이라는 한줄기 희망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북해도로 투입된 이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있었다.
서태평양 함대와 함께 수군 수송함대가 그들을 연일 실어 날랐다.
그렇게 북해도로 옮겨진 이들이 맨 처음 한 일은 주거지의 건설이었다.
주거지가 완성되면서 노동자로 투입된 노비들의 가족들이 수송되어 옮겨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비워진 구주도의 북부와 중부, 그리고 오사카 일대에 남간도인과 조선인들 중 원하는 이들의 이주가 추진되기 시작했다.
조선에서 기회를 잡지 못했거나, 아직 개발이 완전히 되지 못한 해외의 조선 땅에서 무언가를 이루길 원하는 조선인들과 여진인들이 자원하여 정기선에 몸을 실었다.
그 수가 물경 수만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