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동군의 세력 변화
일본에서는 꽤나 충격적인 소식이었겠지만 조선에는 왜왕가의 도주 사건이 크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왜의 절반을 남겨놓기로 결정한 이상, 분란거리가 될 왜왕가의 추포는 정왜 전쟁의 작전계획에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조선은 모리 가문이 소유하고 있던 이와미 은광이 조선군의 영역에 들어온 것에 주목했다.
그 와중에 모리 가문이 재빠르게 이와미 은광을 조선 왕실에 들어바쳤다.
어차피 몰수 될 것, 희사라는 행위로 자신들의 충성심을 보이려는 행동이었다.
여하간 그 일로 인해 이와미 은광에서 생산되는 대량의 은을 직접 조선이 확보하게 되는 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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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에 따라 한발 늦게 혼슈에 발을 들였음에도 조선군이 간사이 북쪽 지방까지 진출하는 동안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은 주부 지역에서 시간을 소모하고 있었다.
전투를 치를 경우 상당한 피해를 감당해야 했기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해당 지역 다이묘들과 전투가 아니라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을 선택한 까닭이었다.
하긴 언제 적으로 돌변할지 모를 강대한 조선군을 앞에 두고 전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로 인해 속도가 너무 느렸다.
그것이 불만스러웠지만 조선군 지휘부는 어쩐 일인지 그런 동군을 독촉하지 않았다.
그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진군을 독촉하지 말라는 광해의 특명이 내려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오랜 시간 공을 들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결국 주부 지역의 협조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렇다고 복종을 받아낸 것은 아니었고, 대등한 입장의 합류를 성사시킨 것이었다.
오대로 중 한명이었던 마에다 토시이에가 버티고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는 이야기가 분분했다.
하지만 그는 죽고 없었다.
마에다 토시이에를 대신해 가문을 승계한 장남, 마에다 토시나가(前田利長, 전전리장)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교섭에 응해 병력을 내서 동군에 가담했던 것이다.
그것도 혼자 가담한 것도 아니고, 주부 지역의 다이묘들을 설득하여 모두 함께 주부 지역군으로 합류했던 것이다.
마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력을 유지한 채 고개를 숙인 것과 비슷했다.
그러한 일련의 일들은 실제역사와는 조금 다른 일이었다.
마에다 토시나가가 동군에 합류하는 것은 실제역사에서도 같았으나 주부 지역의 다이묘들은 서로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치고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마에다 토시나가의 설득으로 인해 주부 지역의 다이묘들 전체가 동군의 편에 섰다.
물론 실제역사와 같은 것이 있긴 했다.
일부 영지를 분할 상속받았던 마에다 가문의 차남, 마에다 토시마사(前田利政, 전전리정)는 실제역사에서처럼 형의 결정에 반해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도요토미 가문의 서군으로 들어갔으니까.
문제는 그러한 일련의 일들이 벌어진 시기였다.
이르게 시작된 동군의 진군으로 인해 실제역사였다면 아직 마에다 토시이에가 살아있었을 시기였기 때문이다.
만약 마에다 토시이에가 아직 살아있었다면 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관계 상 그가 자신의 장남과 같은 선택을 할지, 아니면 차남처럼 의리를 지킬지 확신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광해는 그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마에다 가문이 오사카에 협력하는 것을 우려했다.
그것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피해가 커지는 것을 걱정했다는 뜻이 아니다.
실제역사에서는 오사카를 점령한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를 세워 독주를 시작한다.
그를 견제할 세력이 더 이상 일본 내에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로인한 일본의 통합과 결속이 강화된다.
광해는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독주에 제동을 걸 세력이 존재하길, 그럼으로써 남겨질 반쪽의 일본에 여전히 분란의 씨가 계속 남아있게 되길 원했던 것이다.
그런 세력으로 광해는 오대로라 불리며 주부 지역의 유력 가문이었던 마에다 가문을 점찍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모를 마에다 토시이에를 사전에 제거함으로써 동군에 가담할 것이 확실했던 그의 장남인 마에다 토시나가에게 힘을 실어주었던 것이고.
정작 마에다 토시나가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그것으로 동군 세력엔 도쿠가와 이에야스만큼 커다란 세력을 거느린 대 다이묘가 존재하게 되었다.
실제 역사와는 완벽히 다른 세력 구도가 동군의 내부에 존재하게 된 셈이었다.
여하간 그런 일련의 과정으로 인해 서군은 여전히 병력이나 세력으로 볼 때 한참이나 동군에게 밀리고 있었다.
그런 사태가 벌어진 것에 주부 지역의 배신이 큰 몫을 하긴 했지만 역시 결정적인 원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에 충성을 맹세했던 다수의 다이묘가 영지를 가지고 있던 큐슈와 시코쿠, 주고쿠 지역이 모조리 조선에 붙은 탓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도요토미 가문의 서군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과 주고쿠 지역에서 진출하는 조선군의 가운데에 끼어 압살 당할 처지였다.
그럼에도 다른 방법이 없었던 서군은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창이나 칼을 들 수 있는 사내라면 모조리 긁어모아 병사로 삼았다.
그런 이들이 전쟁에서 별로 쓸모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야 할 만큼 서군의 세력이 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판으로 나아가 회전으로 결판을 보자는 정신 나간 이시다 미쓰나리의 주장을 꺾고 오사카 성에서 수성전에 임하게 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생전 또 한명의 측근이었던 오타니 요시츠구(大谷吉繼, 대곡길계)의 끈질긴 주장 때문이었다.
그렇게 오사카 성에 틀어박혀 수성전을 준비한 서군을 먼저 공격한 것은 도쿄만 협정에 의거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이었다.
하지만 오카야마에 웅크리고 있는 조선군의 존재 때문에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서군이 예상외의 선전을 한 것인지는 몰라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은 그리 속 시원한 전투를 펼치지 못한 채 끌려가고 있었다.
하긴 오사카 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살아생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자랑질을 해댔을 만큼 나름대로 탄탄하게 지어진 성이긴 했다.
특히 넓고 깊게 판 해자로 인해 동군이 애를 먹고 있었다.
보름이 넘도록 해결을 못하자 결국 보다 못한 조선군이 진출했다.
오사카 성을 포위하고 있던 동군이 조선군의 영역을 비워주기 위해 포위를 풀고 오사카 성 동쪽으로 집결했다.
구주도의 병력으로 구성된 왜인(倭人) 병단 5만을 포함해 10만으로 구성된 조선군 타격전단이 그렇게 비워진 오사카 성 북부에 진을 쳤다.
그 곁으로 타격전단에 편입된 사국도와 주고쿠의 병력 5만이 또한 진을 쳤다.
조선군 휘하의 병력만 15만에 달하는 대병이었다.
오사카 성이 잔뜩 긴장한 가운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도 조선군의 능력을 관찰하기 위해 시선을 집중하고 기다렸다.
오사카 성을 마주한 조선군 지휘부는 생각보다 강력한 오사카 성의 방어력에 표정을 굳혔다.
사실 오사카 성을 마주하기 전까지만 해도 야포의 포격으로 얼마든지 오사카 성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마주한 오사카 성의 성벽이 너무 높았다.
백규는 아무리 고각으로 포를 올려도 성벽을 넘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보고를 올렸다.
다른 화포들에 비해 상하 각도의 허용량이 큰 야포였지만 발포 안정성을 위해 그것도 한도가 있는 법이다.
오사카 성의 성벽이 그 한도를 벗어났던 것이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결과에 조선군 지휘부는 큰 충격에 빠졌다.
포병을 통한 화력 전개가 불가능하다면 오사카 성 공성전에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과 다를 것이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잔뜩 굳은 표정인 신립에게 백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구포를 전진 배치해서······.”
“저놈들 성벽에 쫙 깔려 있는 게 화포라면서.”
“예. 석화시하고 대조총이라 불리는 것들입니다.”
백규의 답에 신립이 물었다.
“석화시야 기껏 잘 날아가 봐야 2백보라니까 무시하고, 대조총이란 놈이 5백보를 난다면서?”
“예. 사국도의 병력에서 대조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있어서 시험 발사를 해보았는데 실제로 그 정도를 날았습니다.”
“구포 사거리가 얼마지?”
“5백보······.”
“저쪽이 높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으니 우리 구포 잡긴 딱 좋겠네. 그렇게 되면 난 전하 손에 죽고, 넌 내손에 죽고. 그러자고?”
“송구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백규에게 신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도 뾰족한 해결책이 없으면서 수하를 닦달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김여물이 끼어들었다.
“각도가 문제라는 거 같던데.”
“예. 야포의 고개가 더 들려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니 성벽을 넘어 포격할 방법이 없습니다.”
“포신만이 아니라 포 자체를 들면 어때?”
김여물의 물음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몰라 백규는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 백규에게 김여물이 땅바닥에 굴러다니던 작은 나뭇가지를 주워 대강의 그림을 그리며 설명했다.
“이렇게, 포 밑을 경사면으로 만들어 포의 각도를 더 크게 하면 안 되냐는 소리지.”
김여물이 땅바닥에 그린 그림을 보며 백규가 고개를 저었다.
“포의 발사 반동이 커서 포가를 받치고 있는 경사면 뒷부분이 받는 힘이 커질 겁니다. 자칫 무너지거나 비틀리면, 포가 이탈하거나 기울어지다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바로 세우는 것은 시간이 조금 걸려도 할 수 있겠지만 그 와중에 포에 손상이라도 생기면······. 어려운 일입니다.”
이번엔 거꾸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물끄러미 듣고 있던 신립이 나섰다.
“여기 이걸 이렇게 기울이는 게 아니라 아예 높이면? 예전에 당태종이 고구려의 안시성을 치자고 쌓았던 토성만큼은 아니더라도 야포의 최대 고각으로 저 빌어먹을 성벽을 넘길 정도로만 포대를 설치할 땅을 높이면 어떠냔 거지.”
“그야 다지기만 잘 된다면야······.”
백규의 답에 신립이 장수들을 불러 모았다.
인원이 자그마치 조선군만 15만 이었다. 곁에서 눈만 디룩디룩 굴리고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까지 동원한다면 거의 35만의 노동력이 생긴다.
쌓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조선군은 물론이고, 구주도와 사국도, 그리고 주고쿠 출신의 장수들도 모두 그 의견에 동의했다.
곧바로 오사카 성으로부터 1천보 거리에 작은 토성이 쌓이기 시작했다.
사실 성을 쌓은 것은 아니고, 포를 올려놓을 단을 쌓은 것이지만 자그마치 9백문의 야포를 올려놓을 단을 길게 쌓다보니 외형이 마치 성과 같아진 것이었다.
흙을 쌓고 다지는 일들로 매일같이 10만의 병사들이 동원되었다.
나머지 5만의 병력은 혹시라도 튀어나올지 모를 오사카 성의 병력과 지금이라도 배를 갈아타고 뒤통수를 갈기려 들지 모를 동군에 대비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갑작스런 조선군의 행동에 오사카 성의 서군만큼이나 궁금해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서 무얼 하는지 묻는 사신이 다녀갔다.
그 사신을 맞은 건 의외로 팔도 출신이 아니라 구주도 출신 장수인 시마즈 요시히로였다.
그는 야포의 성능에 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전투를 위한 방책을 쌓는 중이라고 답해 사신을 돌려보냈다.
그런 그의 말을 통역병으로부터 전해들은 신립이 피식 웃었다.
“따로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정보 보안이 제법이네.”
신립의 평가에 김여물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백규가 요구한 높이는 7척, 그러니까 현대도량형으로 2M가량이었다.
쌓아 올린 흙을 확실하게 다지기 위해서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음에도 5일 만에 높이 7척의 포단을 쌓았다.
이내 흙을 나르던 수십 곳의 비탈길을 통해 조선군의 야포들이 일제히 올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