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102화 (102/325)

제102화. 왜왕가(倭王家)의 도주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급보가 싣고 있던 소식에 정왜군 사령부 곳곳에서 환호가 튀어나왔다.

보고를 받은 광해는 담담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실제역사와 달라진 것은 그가 죽음을 맞은 장소뿐이었다.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근거지인 오사카 성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소식을 접한 조선의 움직임이 다시 분주해졌다.

그간 점령지 관리에 매진하고 있던 사국도와 구주도의 조선군도 다시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

도쿄만 협정에 의거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지 3개월이 지나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군대를 일으켰다.

시간차를 둔 것은 그 시일 동안 도요토미 히데요시 파벌 내의 분란을 조장하기 위해서 조선이 요구한 것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마자 나서면 외적에 대한 위험성에 단결력이 높아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재기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이 에도 인근을 떠난 것은 서기1598년, 광해7년 12월 20일이었다.

겨울은 지나고 시작하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조선과 도쿠가와 이에야스 양측은 협정대로 움직이는 것으로 합의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파의 제거 작업은 그렇게 실제역사보다 빠르게 시작되고 있었다.

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파벌에서 가장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한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적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 풍신수뢰)가 아니라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석전삼성)였다.

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았던 문신으로 그는 대부분의 무신들과는 관계가 좋지 못했다.

가뜩이나 조선정복전의 실패로 무신들의 불만이 높았던 시기였기에 그의 부상(浮上)은 무신들의 불만이 폭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파벌과 도쿠가와 이에야스 양측을 중재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존재였던 마에다 토시이에는 이미 지난 해, 저격을 받아 죽고 없었다.

그것이 실제역사와 다르게 양측 파벌의 충돌이 처음부터 거세게 일어나게 만들고 있었다.

다수의 다이묘들이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반발한 반면 시코쿠 지역 출신 다이묘들은 그에게 협조적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을 격파하면 그쪽에 영지를 하사받을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심리가 작용한 까닭이었다.

그들이 빠져나가면 그간의 두통거리가 사라지는 것이었기에 주고쿠 지역 다이묘들도 동군과의 전투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로인해 다수의 다이묘들이 반발하는 와중에도 이시다 미쓰나리는 그런대로 동군과 맞설 수 있는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처음엔 그러했다.

분명 처음엔.

고니시와 시마즈가 보낸 가신들 몇이 사신의 신분으로 시모노세키(下関, 하관)를 통해 주고쿠에 들어왔다.

그들의 방분을 받은 시코쿠 지역 다이묘들 사이에서 묘한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동군에 맞서 움직일 준비를 하던 시코쿠 지역 다이묘들의 군대가 동진하는 것이 아니라 서쪽 끝 바다가의 시모노세키로 집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난데없는 움직임에 주고쿠 지역 다이묘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자칫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세력이 충돌하는 와중에 시코쿠 지역 다이묘들의 군대가 주고쿠를 노릴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주고쿠 지역의 다이묘들이 일대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모리휘원)에게로 모여들었다.

이와미 은광을 소유하고 있던 모리 가문의 당대 당주이기도 했던 모리 데루모토는 갈등했다.

평소에도 우유부단하다는 평가가 많았던 그의 성격이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순간이었다.

그런 그에게 고니시와 시마즈가 보낸 사신들이 접견을 청해왔다.

가내의 문신들과 무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찾아온 고니시와 시마즈의 사신들이 모리 데루모토에게 깊게 절을 했다.

“그대들이 나를 보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지금의 난관을 타개할 길에 대해 잠시 고니시 관찰사와 시마즈 장군의 말씀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모리 데루모토는 사신으로 찾아온 두 다이묘들의 사신들이 언급한 고니시와 시마즈의 관직명에 관심을 보였다.

“관찰사와 장군?”

“예. 두 분이 대 조선국 국왕 전하께 하사받은 직분입니다.”

사신의 답에 모리 데루모토 곁에 앉아있던 한 문신이 무언가를 그의 귀에 속삭였다.

그것에 놀란 표정인 모리 데루모토가 물었다.

“하면 조선국 국왕이 큐슈를 고니시에게 주었단 말인가?”

관찰사란 직분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하긴 영주가 그 영지의 모든 것을 갖던 일본의 관습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것에 대해 고니시의 사신이 재빨리 설명을 이었다.

“대 조선국 국왕 전하를 대신해 큐슈를 통치하기는 하나 소유하지는 못합니다.”

“무슨 뜻이지? 통치하지만 소유하진 못한다니?”

“국왕 전하를 대리하여 다스리기는 하나 그것은 오로지 행정에 관한 것일 뿐, 모든 것은 국왕 전하의 명과 법에 따라야 함을 뜻합니다.”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뜻인가?”

“주상 전하의 명과 법이 허락하는 권한 안에서는 자유롭게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영지를 다스리는 다이묘와 무엇이 다른지 모리 데루모토는 역시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 모리 데루모토에게 시마즈의 사신이 설명을 덧붙였다.

“이미 말씀 드렸다시피 관찰사는 행정에 관한 일만을 담당합니다. 군병은 여러 장수들이 나누어갔고, 고쿠다카는 전량 나라로 들어갑니다.”

“아니 그럼 무엇으로 영지를 지키고, 무엇으로 영지를 운영한단 말인가?”

“장군들이 지휘하는 군대가 지키고, 나라에서 예산을 받아 꾸려나갑니다.”

“하면 시마즈가 받은 장군의 직분이?”

“예. 군대를 지휘합니다.”

“얼마나 지휘하나?”

“시마즈 요시히로 장군께서 지휘하는 병력은 사쓰마 병단 2개, 2만을 지휘하고 계십니다.”

“들리는 소문엔 가토도 장군의 직을 받았다 들었다만.”

“가토 기요마사 장군은 구마모토 병단 1만을 지휘하십니다.”

“하면 가토보다 시마즈의 직분이 높다는 뜻인가?”

“그건 아닙니다. 시마즈 장군의 경우엔 병단 2개를 지휘할 권리를 얻으신 것뿐이고, 벼슬은 가토 장군과 같은 4품 병단장이십니다.”

“벼슬? 벼슬을 한단 말인가?”

이때만 해도 일본의 경우 다이묘와 조정의 벼슬이 별개였다. 그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조선의 모든 관직은 벼슬입니다.”

사신의 답에 모리 데루모토가 탄성을 터트렸다.

그런 그에게 고니시의 사신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시려는지 모르겠으나 얼마 전에 시코쿠의 다이묘들은 대 조선국 국왕 전하께 충성을 맹세하였습니다.”

비로소 시코쿠 지역 다이묘들이 시모노세키로 몰려 있던 것이 이해간 모리 데루모토가 물었다.

“시코쿠의 관리직을 제의 받았겠구나?”

“맞습니다.”

하긴 영지 없이 떠도느니 직분을 받고 관리로 등용되는 것이 실질적으로 나았을 것이다.

물론 동군과 전투를 벌여 영지를 획득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승리했을 때의 일이다.

동군의 수장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만만치 않은 자였다.

더구나 이쪽의 주도권을 이시다 미쓰나리가 가지고 있으니 전폭적으로 협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리도 없었다.

그렇게 시코쿠 지역 다이묘들의 상황이 결정되었다면 이제 문제는 모리 데루모토를 비롯한 주고쿠 지역 다이묘들의 입장이었다.

시코쿠 지역 다이묘들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협정을 맺었다는 조선에 붙은 상태에서 자신들이 서군에 가담한다면 그들과의 전투가 필연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신들의 앞마당인데다 수와 실력은 막상막하였으니까.

그런 모리 데루모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듯 시마즈의 사신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조만간 시모노세키로 조선군이 상륙할 것입니다.”

“조선군? 시마즈의 군대 말인가?”

“당연히 시마즈 장군과 가토 장군을 비롯한 구주도의 군대도 상륙하겠습니다만 조선 본토의 군대도 상륙할 것입니다.”

시코쿠 지역 다이묘들의 군대만으로도 막상막하를 거론하는 판국에 큐슈의 군대도 모자라 조선 본토의 군대까지 합류한다면······.

“흠······.”

모리 데루모토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침음이 새어나왔다.

그렇게 침음 속에 잠시간의 고심을 끝낸 모리 데루모토가 물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합류하십시오. 대 조선국 국왕 전하께오서 중히 쓰실 것이옵니다.”

다른 때 같았다면 허튼 소리 지껄이지 말라는 가신들의 호통이 떨어질 법도 하건만 장내는 조용했다.

그만큼 가신들조차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사신들을 잠시 물린 상태에서 모리 데루모토와 가신들 간의 토의가 길게 이어졌다.

종래엔 다른 주고쿠 지역 다이묘들을 불러 함께 논의했다.

그렇게 내려진 결정을 들고 고니시와 가토의 사신들이 돌아갔다.

그리고 맞은 광해8년 1월.

도쿄만 협정의 일정에 따라 구주도와 사국도에 나누어 주둔하던 조선군 중 일부가 시모노세키를 통해 일본인들이 본토라 부르는 혼슈(本州, 본주)에 발을 들여놨다.

타격전단장 신립이 이끄는 2개 소총 병단과 1개 기마총병 병단, 그리고 개마 돌격기마 병단이었다.

또한 타격전단에 편입된 구주도의 군대 5만도 시마즈와 가토, 그리고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과도직무)의 지휘 하에 상륙했다.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부산포에 포로로 잡혀있던 이들 중 추가로 광해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장군의 위를 받아 복귀한 큐슈 중부의 다이묘였다.

그가 큐슈로 복귀하면서 포로로 잡혀있던 왜인들의 대부분이 귀환했다.

그로인해 부산포의 포로수용소에 남아있게 된 이들은 무슨 생각인지 전향할 수 없다고 버틴 몇몇과 마카오 해전에서 잡혀온 포도아인들 뿐이었다.

구주도와 사국도에 주둔 중이던 조선군 병력을 실어 나르기 위해 서태평양 함대와 수군 수송함대가 잠시 도쿄만을 벗어나 분주히 움직였다.

그렇게 상륙한 조선군을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복도정칙)를 위시한 시코쿠의 다이묘들과 모리 데루모토를 비롯한 주고쿠의 다이묘들이 정중히 맞아들였다.

이로써 조선군은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시코쿠의 병력과 주고쿠 지역은 물론이고, 병력까지 한 번에 손에 넣게 되었다.

상황이 그렇게 진행되자 당황한 것은 간사이 지역의 다이묘들이었다.

비록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영지가 위치한 지역이라 충성심이 깊은 이들이 많았지만 그것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때나 통용되는 것이었다.

적어도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협조하고픈 다이묘는 그다지 많지 않았으니까.

그중에서도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 세천충흥)의 이탈이 가장 빨랐다.

그는 시코쿠 동남부에 위치한 오카야마(岡山, 강산)에 차려진 조선군 전진 지휘소까지 직접 찾아와 투항의사를 밝혔다.

하긴 실제역사에서도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파벌 중에서 가장먼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참여한 인물이기도 했다.

다만 이번엔 방향이 동군 쪽이 아니라 조선군 쪽이었지만.

그로인해 조선군의 세력이 간사이 지역 북쪽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왜왕가와 왜의 신하들이 위기를 느꼈다.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영지였던 탄고(丹後, 단후)가 왜왕가가 자리하고 있던 교토 바로 북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다이묘는 영지를 버리고 도주하지 않는다.>

일본 전역에 퍼져있는 이 불문율이 왜왕가의 발목을 잡았다.

하물며 다이묘도 그럴진대 왕가가 적 앞에 도주할 수는 없었다.

전전긍긍하는 가운데 조선군이 탄고에 진입했다. 그 소식이 전해진 왜의 신하들이 전전긍긍했다.

왕이 움직이지 않는데 신하들만 피신 할 수는 없었다.

언제 탄고의 조선군이 교토로 내려올지 모르는 상황 몇몇 신하가 잔꾀를 내어 왜왕에게 청했다.

“번잡하던 관동이 안정을 찾았다하니 친히 걸음 하시어 살피시오소서.”

신하들의 청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왜왕이 아니었다.

청은 곧바로 수락되었고, 대규모의 시찰단이 꾸려졌다.

말은 시찰단이라 했지만 그것은 도주였다.

그렇게 왜왕가가 수도인 교토를 버리고 에도로 도주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보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호감이 깊었던 왜왕가의 행보로는 의외의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엔 곧 전쟁의 한복판이 될 오사카로는 갈 수 없다는 나름의 고민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실제역사에서 한양을 버리고 도주했던 선조만큼이나 기민하고 빠른 행보였다.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임명한 것을 빼고, 선조가 임진왜란에서 유일하게 잘한 일이 왜군에게 사로잡히지 않은 일이라는 현대의 평가가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후대의 일본인들은 왜왕가가 이 시점에서 유일하게 잘한 일이었다고 평가하게 되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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