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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101화 (101/325)

제101화. 에도의 급보(急報)

광해7년 1월 초하루.

큐슈와 시코쿠를 각기 그 이름대로의 한자음을 따와 구주도와 사국도로 명명하여 조선 강역에 포함시키는 왕명이 선포되었다.

대마도는 경상도에 편입하여 대마시라 칭하였다.

점령지를 식민지로 따로 떼어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 강역의 일부로 편입하는 조처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로써 조선은 11개 도를 갖추게 되었다.

이와 함께 일전에 여진인에 대해서 내려졌던 것과 동일한 차별 금지법이 왕명으로 선포되었다.

향후 왜인을 조선인과 차별하는 그 어떠한 행위도 엄벌에 처하겠다는 왕명이 떨어진 것이다.

이로 인해 왜인들은 기존의 조선법률에 의해 보호받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의 강역으로 선포된 지역에 사는 왜인들은 공식적으로 조선인으로 인정되었다.

일전에 왕명으로 선포된 거주우선신분법에 의한 신분보장이 이루어진 까닭이었다.

이로 인해 과거 남간도처럼 두 지역의 왜인들을 사국도 출신 조선인, 또는 구주도 출신 조선인이라 불렀다.

우습지만 대마시 사람들은 자신들이 조선 본토인 경상도로 편입되자 구주도와 사국도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조선 본토인이라 소개했다.

어이없었지만 그것을 사국도와 구주도 사람들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조선 팔도 출신들이 쓴웃음을 지었지만 그뿐, 그것을 입 밖으로 내어 비난하거나 부정하지 못했다.

조선인 사이에서 출신으로 구별 짓는 것은 왕명으로 엄히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정한 조선의 법 집행을 위해 판소와 포청 분소가 대마시와 구주도, 사국도 각지에 세워졌다.

특히 인원이 많이 쓰이는 포청 분소에는 임시로 조선군이 업무를 대행하고 있었지만 종래엔 대마시 출신 사람들과 구주도인과 사국도인들을 교육시켜 그들에게 맡길 예정이었다.

그것을 위해 포청학당 구주분교와 사국분교를 열어 학생을 받았다.

대마시의 경우엔 한성에 있는 포청학당 본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러한 것들이 대마시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본토인이라 자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고 있었다.

각 행정구역과 관청의 개혁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역사적으로 상호 적대적이었던 지역까지 통폐합을 진행하는 행정구역 개편 작업이 빈번했기에 다이묘들의 반발을 우려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투항한 다이묘들에게 관리와 장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고니시를 비롯한 몇몇 다이묘들이 관리직을 선택했다.

가토와 시마즈를 비롯한 다수의 다이묘 출신들은 그대로 장수로 남길 희망했다.

관리를 선택했던 고니시에게 광해가 구주도 관찰사를 제수했다.

몇몇 조선의 대신이 반대하고 우려를 표명했지만 광해의 결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로인해 고니시 유키나가는 왜인 최초의 조선 관찰사란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다.

구주도와 달리 사국도는 광해의 별도계획에 의거 하여 당분간 조선군의 군정체제로 운영되게 되었다.

그로인해 사국도의 관찰사는 조선군 타격전단장인 신립이 당분간 겸직으로 대행하고 있었다.

아직 날이 쌀쌀한 2월에 철고 은행 지점들이 경상도 대마시와 구주도와 사국도 지역 곳곳에 문을 열었다.

그에 맞춰 새로 통화의 보급도 이루어졌다.

별도의 통화를 발행한 것은 아니었고, 조선의 통화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광해는 단일 통화권으로 묶어 점령지의 통합을 재촉할 계획이었다.

철고 은행의 업무가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었다.

바로 가치의 통일이다.

사전에 구주도와 사국도 지역의 토지가와 물건들의 가격이 조사되었고, 그 자료를 기반으로 통일된 가격이 제시되었다.

초기 조선처럼 현물을 들고 올 경우 공정한 통화로의 교환을 위한 일이었다.

왜인들이 그것을 굉장히 신기해했다.

다이묘에 협조했던 몇몇 상인에 의해 장악되었던 시장이 개방되었다.

타당한 이유 없이 장사하는 이를 방해하면 형벌을 주는 조선 법률이 엄정하게 집행되었다.

몇몇 왜 상인들이 그 법을 어겼다가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것을 목격한 왜인들은 더 이상 감히 그것을 어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것을 기화로 대마시는 물론이고, 구주도와 사국도에서 대중 상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밭을 일궈 키운 작물을 내다파는 이들이 생기더니 이내 무언가를 만들어 파는 일이 두개 도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만들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그것이 돈이 된다는 것을 사국도와 구주도 출신 조선인들이 알았기 때문이다.

그 상황에서 철물전이 들어왔다.

각지에 철물전 산하 사업장들이 문을 열었다.

그곳에서 일할 왜인들을 모집했다.

당연히 조선말을 할 줄 아는 이들이 우대받았다.

대마시는 물론이고, 구주도와 사국도에 조선말 익히기 열풍이 불었다.

각지에 철물전 산하 대장간이 들어서고, 야당학당이 문을 열었다.

왜인들이 철물 일을 배울 수 있다는 것에 야당학당으로 몰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왜에서 철물일은 몇몇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숨겨진 기술이었기 때문에 그 반향이 상당히 커다랬다.

때에 맞춰 철산학당들이 문을 열었다.

소학당과 고등학당, 기술학당은 물론이고, 나이 많은 만학도들을 위한 중학당도 차례로 문을 열어 왜인들을 학생으로 맞아들였다.

대한신보가 왜의 소식을 다루기 시작했고, 구주도와 사국도에도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거리의 문제로 사나흘이나 지난 신문이 풀렸지만 왜의 식자층은 그 신문을 읽는 행위를 자랑으로 삼았다.

광해의 뜻에 의해 대한신보는 한글과 한문을 병기한다.

따라서 한자를 쓰던 일본 식자층도 어렵지 않게 신문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문자는 가나문자 정도에 불과해서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시기였다.

따라서 왜의 식자층과 공문서에는 한자가 주로 쓰였었다.

철산학당들을 통해 한글이 보급되기 시작했으나 일본말을 완전히 옮겨 적기엔 부족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만주어도 마찬가지였지만 광해는 두 민족의 말을 한글로 옮겨 적는 것을 고수했다.

물론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홍문관의 학자들로 하여금 한글을 만주어와 일본어를 옮겨 적기 알맞게 개량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아직 이렇다 할 결과물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개량된 한글이 나올 때까지는 그대로 사용하게 할 생각이었다.

물론 그 외 각지의 문화는 존중되었다.

철폐해야할 악습이거나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폐습의 경우는 왕명으로 철폐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존중하고 보존 발전시키도록 했다.

조선이 광해의 치세 아래 놓여 일곱 번째로 맞는 봄이 시작되던 3월.

주고쿠 일대에서 분란이 발생했다.

시코쿠가 조선의 영토인 사국도로 선포된 것에 시코쿠에 영지를 두고 있던 다이묘들이 즉각적인 공격 재개를 주장했지만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기폭제에 불과했고, 그동안 시코쿠 지역 다이묘들의 불만이 쌓인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큐슈를 탈출해서 주고쿠 지역에 발이 묶인 채 지내고 있던 시코쿠 지역 다이묘들은 그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영지의 조정을 끊임없이 요청해 왔었다.

병력을 먹여 살리자면 당장 소출이 나오는 영지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갈수 없게 된 시코쿠를 잠시 벗어두고, 자신들의 신분과 병력을 보존해줄 수 있는 영지를 본토 내에서 할애해 줄 것을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들에게 병력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식량만 제공했을 뿐, 영지 할애에는 일절 답을 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 일어난 분란으로 주고쿠 지역의 다이묘들과 시코쿠 지역 출신 다이묘들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서서 간신히 분란이 진정되기는 했지만 그들 내부의 분위기는 험악했다.

그 상황에서도 여전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시코쿠 지역 다이묘들에게 본토의 영지를 할애해 주는 것에 대해 아무런 입장도 밝히지 않고 있었다.

사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난감한 상황에 빠져있었다.

자신이 주도하여 일으킨 조선정복전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각지의 다이묘들에게서 불만을 사고 있었다.

참여했던 다이묘들 전체가 막대한 전비를 쏟아 부었음에도 손에 쥔 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반격에 나선 조선군의 위협에 직면한 상황이었으니.

그 상황에서 영지마저 쪼개 내놓으라는 요구를 휘하 다이묘들에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영지를 조각내 시코쿠 출신 다이묘들에게 나눠줄 수도 없었다.

영지에서 나오는 고쿠다카(石高, 석고, 영지의 경제력을 모두 쌀 생산량으로 환산한 것)가 다이묘의 힘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다이묘들의 불만이 팽배한 지금 같은 상황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힘을 줄일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연일 가신들을 보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도호쿠 지역 일부를 내놓으라고 설득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곳으로 시코쿠 다이묘들을 전봉시킬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요구에 대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몇 달이 지나도록 논의해 보겠다는 말만 거듭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로인해 도요토미 히데요시 파벌 내부의 불만은 그대로 방치되고 있는 셈이었다.

*****

온 들판에 봄꽃이 만발하던 4월, 거제 건선단지에서 추가로 건조한 조선무역선들을 투입하여 정기 항로를 개설했다.

조선 본토와 대마시, 구주도, 사국도를 잇는 정기선이 마련된 것이다.

이것을 위해 조선무역선 20여척이 투입되었다.

그 배들이 양측으로 사람들과 화물을 실어 날랐다. 물동량이 상당해서 정기선은 언제나 만선이었다.

그로인해 광해는 조선무역선이 추가 건조되는 대로 정기선의 숫자는 물론이고 노선수도 늘릴 생각이었다.

이 정기선에도 왜인들을 상당수 고용했다.

뿐만 아니라 왕실 기업인 철물전을 비롯한 다수의 일자리가 왜인들에게 공급되고 있었다.

그로인한 왜인들의 일자리 증대와 소득증가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같은 달, 최초로 관제 무역선이 아니라 사설 무역선의 건조와 무역선단의 개설 허가 신청이 호조로 들어왔다.

바다에 조금 더 밝았던 어업 상단들 몇 개가 모여 만든 무역상단이었다.

드디어 조선 상인들의 해외진출이 시작된 것이다.

그것에 대해 제가를 물어온 호조에 광해가 기쁜 마음으로 허가하라 명하였다.

그로부터 석 달 후인 7월, 여름의 열기를 가득 안은 채 최초의 사설 조선 무역선단이 부산포를 떠났다.

이들은 홍콩과 마카오를 거쳐 비율빈(菲律宾, 필리핀)까지 진출할 예정이었다.

조선무역선 5척으로 이루어진 이 무역선단은 광해의 허락으로 수군과 마찬가지로 자체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다고 야포가 배치된 것은 아니었고, 장원에서 무게를 줄이는 개량을 거쳐 개발한 함상용 조선철포였다.

이 철포를 민수용 조선무역선은 10문씩 장비하고 있었다.

포탄도 폭발탄이 아니라 이 시대의 일반적인 철환형 포탄만 장비가 허락되었다.

만약에 해외에서 나포되거나 했을 경우, 조선군의 야포와 폭발탄이 외부로 새어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처였다.

당연히 가형 소총의 반출도 불허 되었다.

유사시에 대비한 선원들의 개인 무장은 전통적인 창, 칼, 활과 왜에서 대량으로 포획된 조총이 허락되었다.

따라서 사설 무역선단의 위험도는 상당히 높은 편이 되었다.

그럼에도 무역에 나서려는 조선 상인들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조선의 대명절인 한가위가 지난 직후, 협정을 맺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급보가 에도에서 조선으로 당도했다.

급보의 내용은 한 줄로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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