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100화 (100/325)

제100화. 토야마(富山) 저격 사건

“무역로를 저들의 손에 쥐어준 채로 지내다 저들이 그 무역선을 잘라버린다면? 아니면 그 기항지를 저들 마음대로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면? 그땐 어찌하겠는가?”

광해의 물음에 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관리들을 바라보며 광해가 말을 이었다.

“가만히 앉아 버는 이익과 다르지 않더라도 무역로를 우리 손에 쥐어야 하는 이유가 그것에 있음이다.”

그 설명이후로 더 이상 광해의 말에 이의를 다는 대신들은 나오지 않았다.

그로인해 결정된 무역선단은 10척의 조선무역선에 5척의 전열함을 결합한 형태로 구성하기로 했다.

결정이 떨어진 직후부터 첫 번째 무역선단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동태평양함대의 하백급 전열함들 중 5척을 거제로 불러들여 개장을 진행했다.

충돌 돌기와 선수 장갑을 뜯어내고, 전투 피로 등으로 교체할 것들을 바꾸는 대정비였다.

물론 새로 만들어내는 것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빼내온 5척의 하백급 전열함 대신에 동태평양 함대는 5척의 해모수급 전열함을 새로 배치 받았다.

시일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예비물자로 생산되어 있던 전열함을 동태평양 함대로 내어주고 이미 건조 중이던 조선수무역선을 엮어 내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결정이 떨어진 다음 달, 개량 하백급 전열함 5척과 조선무역선 10척으로 이루어진 조선 무역선단의 첫 출항이 부산포에서 이루어졌다.

조선의 첫 유럽 항해였기에 광해는 한 가지 안전 책을 만들었다.

바로 도자기를 구입하러 부산포에 들린 서반아 상인들을 길잡이로 삼은 것이다.

이미 대양항해술을 배워온 조선인들을 통해 해도와 항해술이 전수되어 있었지만 첫 항해라는 것은 언제나 위험을 동반하는 일이었기에 반만의 준비를 갖추길 원했던 것이다.

사실 이시기 유럽에서 동양 항로는 국가기밀에 속했다.

이당시만 해도 에스파냐 왕실의 허가를 받지 않는 배가 이 항로에서 발견되면 무조건 격침시키라는 에스파냐 국왕의 명이 내려와 있을 때였으니까.

서반아 상인들도 자신들의 생명줄이라 여겼으니 쉽게 가르쳐줄리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사항에서 조선은 예외였다.

이미 에스파냐 국왕의 제가로 그들에게 대양항해술을 전수한 예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서반아 상인들이 상대적으로 쉽게 조선 무역선단을 안내하게 된 연유였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공짜로 그런 일을 해줄 상인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조선 무역선단을 안내할 서반아 상인들에게 제시된 대가는 차기 선적분 도자기 값을 반으로 깎아 준다는 것이었다.

이번 선적분이 아니라 다음 선적분으로 약조 된 것은 서반아 상인들이 제대로 된 안내를 하지 않을 것을 우려한 조처였다.

그것에 대해 솔직히 설명하는 조선 관리의 말을 그들도 수긍했다.

그렇게 서반아 상선들을 선두에 세운 조선 무역선단이 부산포에서 멀어져갔다.

*****

광해가 권률에게 지시해 조선에서 가장 멀리 있는 목표를 가장 정확하게 맞추는 소총병 셋을 뽑아 올리라는 명을 내렸다.

난데없는 명이었지만 권률은 즉시 각 부대로 파발을 보내 그것을 수행했다.

각지에서 사격시험이 열렸다. 그렇게 며칠간의 소란 끝에 선발된 3명의 소총병이 광해에게 보내졌다.

그들의 사격술을 직접 참관한 광해가 이내 남해를 경비하는 무장교역선단에 타고 있던 사야가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내려진 밀명을 안고 사야가가 자신을 따라 투항한 몇몇 수하들과 광해가 내어준 소총병 3명을 대동하고 새로 배치되는 동태평양 함대의 해모수급 전열함에 탑승했다.

광해6년의 가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9월.

일단의 사람들이 짙은 어둠을 이용해 출입이 금지된 바다로부터 일본 본토 중북부에 위치한 토야마(富山, 부산)로 몰래 들어왔다.

어둠속에 선두에 선 이는 사야가였다.

그가 수하들과 앞서는 가운데 삿갓을 깊게 눌러쓴 세 명이 면포로 싸인 길쭉한 것을 어깨에 메고 서둘러 따랐다.

산속 깊은 곳에 은신처를 만들어 들어앉은 사야가가 수하들을 풀어 정보를 캐오도록 시켰다.

몇 시간 후, 수하들이 돌아왔다.

“정왜 사령부에서 제공한 정보대로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전전리가)가 이곳에 머물고 있는 모양입니다. 다이묘를 수행해온 병사들로 인해 마을 사람들이 곤욕을 치른다며 상인들의 불평이 적지 않았습니다.”

수하들의 보고에 사야가가 지도를 펼쳤다.

큐슈의 항왜들로부터 얻어낸 지도들 중 하나였다. 그곳엔 토야마의 개략적인 지형과 지물이 그려져 있었다.

5년 전에 토야마를 떠난 병사의 기억에 의존한 것이니 완벽하다 할 수는 없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더구나 그 지도에서 중요한 것은 토야마의 중심 건물이었다.

“이게 마에다 가문이 소유한 장원이다. 마에다 토시이에가 이곳에 머물고 있다면 여기뿐이다.”

“살펴볼까요?”

“시간을 끌수록 위험해지니 머뭇거릴 필요는 없겠지. 곧바로 살펴보고 오도록.”

사야가의 답에 그 수하들이 재빨리 움직여 나갔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시점에 수하들이 돌아왔다.

“확인했습니다. 은신처를 만들 만한 숲도 있어서 이동해도 좋을 듯합니다.”

수하의 보고에 곧바로 사야가가 이동을 결정했다.

그간 머물던 은신처를 다시 자연스럽게 바꾼 이들이 곧바로 장소를 이동했다.

건물만 30개가 넘어가는 대규모의 장원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숲이었다.

다행히 숲과 장원 사이에는 가로막은 것이 없어 시야가 탁 터진 형상이었다.

다만.

“거리가······. 가능하겠소?”

사야가의 물음에 삿갓을 깊게 눌러쓰고 있던 3명이 숲의 가장자리에 몸을 숨긴 채 장원을 바라봤다.

정확한 측량으로 잰 것은 아니었지만 최대사거리인 6백보는 넘어보였다.

“화약 양을 조금 늘리면 가능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최대사거리를 넘어 서기 때문에 갑주를 입고 있다거나 문이나 벽 같은 방해물이 있다면 사살은 불가능할 겁니다.”

한마디로 평상복 정도의 복장으로 신체가 노출된 상태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답을 하는 이들의 얼굴이 드러났다. 권률이 광해에게 원거리 저격실력이 좋다는 이들로 뽑아 올린 소총병들이었다.

그들의 답에 사야가가 물었다.

“장소? 위치? 어느 게 맞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어디로 하겠소?”

어눌하지만 분명한 조선말로 묻는 사야가에게 소총병들이 상의를 하더니 답했다.

“일단은 목표가 어디로 다니느냐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가 보이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습니다.”

소총병들의 답에 사야가의 시선이 수하들에게 돌려졌다.

“찾아라. 어디로 움직이는지 동선을 파악해야 한다.”

명을 받은 사야가의 수하들이 곧바로 흩어졌다.

이틀간 눈 깜박이는 것도 아껴가며 지켜본 결과 마에다 토시이에로 짐작되는 이가 움직이는 동선을 확인했다.

이제 그가 정말 마에다 토시이에가 맞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망원경을 펼쳐 확인한 얼굴과 사전에 교류가 있던 다이묘 출신 장수들의 증언으로 그려진 마에다 토시이에의 초상을 비교했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위험을 무릅쓰고, 사야가의 수하 하나가 장원으로 잠입했다.

숲속에 몸을 숨긴 채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이들의 손에 땀이 차고 있었다.

잠입한 이의 임무는 하나였다.

자신들이 확인한 이가 정말 마에다 토시이에가 맞는지.

방법은 숨어서 저들의 대화소리를 들어 확인하고자 했다. 그것을 위해 움직이던 이가 그만 순찰을 돌던 이들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곧바로 탈출을 휘해 움직였고, 장원의 왜병들이 소리를 지르며 쫓았다.

그를 돕기 위해 조선군 소총병들이 총을 드는 것을 사야가가 굳은 얼굴로 제지했다.

“우리가 드러나면 임무는 실패하게 될 거요.”

“하지만······.”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던 소총병의 눈엔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내젓는 사야가의 표정이 들어왔다.

그는 분명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수하에게 닥친 위험에 자신이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다는 것을.

그렇게 지켜보는 가운데 결국 잠입했던 이가 왜병들에게 뒤를 잡혀 격투가 벌어졌다.

수하들 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자답게 상당한 실력을 보였지만 중과부적을 당할 수는 없었다.

동료가 큰 부상을 입은 채 끌려가는 것을 숲속에 은신 한 채 지켜보던 사야가와 나머지 일행의 눈이 커졌다.

사로잡힌 동료를 치죄하는 자리로 마에다 토시이에로 의심되던 이가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가 무언가를 물었는데 사로잡힌 이가 환하게 웃었다.

의아했던 사야가가 망원경을 들어 사로잡힌 이의 입을 바라봤다.

“마, 에, 다, 토, 시, 이, 에. 맙소사! 저자가 마에다 토시이에가 맞소.”

사야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총병들이 소총을 거치했다.

그 중 한명의 어깨를 사야가가 잡았다.

“마에다 토시이에가 죽으면 지독한 고문이 따를 거요. 고통을······. 줄여줄 수 있겠소?”

고개를 끄덕인 소총병의 총구가 미세하게 방향을 바꿨다.

그리고······.

타다탕!

세발의 총성이 울리며 마에다 토시이에와 사로잡혀 있던 동료가 동시에 피가 쓰러졌다.

소란스러워지는 장원엔 눈길도 주지 않은 사야가가 곧바로 철수를 지시했다.

한동안 수백 명의 왜병들이 주변을 수색했지만 범인은 찾을 수 없었다.

훗날 토야마 저격 사건으로 불리게 되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마에다 토시이에가 실제역사보다 2년 빠르게 죽음을 맞았다.

어둠이 내린 토야마 해변으로 일전에 몰래 들어왔던 이들의 모습이 다시 보였다.

들어 올 때 보다 한명이 줄어들었지만 그들은 조용히 어둠속의 바다로 헤엄쳐 들어갔다.

그날 이후, 바닷가에서 조선의 배를 봤다는 왜인들이 있었지만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가을의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만들던 10월. 장원에서 사고가 터졌다.

무기연구소 야포 개발조에서 발생한 사고였다.

후장식 야포 개발 과정에서 발포 시험 중 뒷부분 포 덮개를 고정하는 부분이 압력에 깨어지며 후방으로 화염이 분출되는 사고였다.

사고의 범위에 비해 희생자가 컸다. 넷이 죽고 셋이 중상을 입었다.

발포 시험시 안전판이라 불리는 강철장갑판 뒤에서 해야 하는 안전규칙을 어긴 결과였다.

사고 그 자체가 아니라 안전규칙을 어겨 인명사고가 났다는 것에 광해가 분노했다.

기술자들로 구성된 특명어사 20명이 왕명을 받고 장원으로 들이닥쳤다.

그간 해이해 졌던 부분들에 대한 감찰로 장원이 몸살을 앓아야했다.

*****

북쪽에서 11월의 삭풍과 함께 전란 소식이 전해져왔다.

건주여진의 누르하치가 결국 해서여진과 정면충돌했다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이것도 실제역사보다는 상당히 늦었다.

임진왜란으로 명나라 군대가 조선으로 출병하여 일대에 전력 공백이 발생하고 그로인해 건주여진의 누르하치가 움직일 공간을 주어야 했는데 그게 달라졌기 때문인 듯싶었다.

이번에 누르하치가 움직일 수 있었던 것도 명나라에서 양응룡의 난이 일어난 덕이었다.

그것을 진압하기 위해 대단위의 명군이 요동 쪽에서 사천 쪽으로 움직인 탓에 누르하치가 움직일 공간을 준 것이다.

그렇게 변화한 환경 탓에 늦긴 했어도 역사의 수레바퀴는 계속 원래의 궤도로 돌아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양측이 거세게 충돌했다는 소식에 북부 3개도인 남간도, 평안도, 함경도의 병력이 접경지로 전진 배치되었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여진족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큐슈 상륙작전 직후 줄곧 부산포에 머물던 광해가 이 소식을 계기로 한성으로 환궁했다.

이제 북쪽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여진 제부족들의 충돌에 주의를 기울이는 동안 해가 바뀌고 광해7년이 열렸다.

조선은 연일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 발전의 기운을 조선군이 장악한 큐슈와 시코쿠로 옮기는 작업이 새해의 시작과 함께 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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