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조선 제일검 지세창
경계병을 조용히 해결하고 접근한 수색대가 왜군들을 몰살시켰다.
대부분은 뒤에서 조용히 쇠꼬챙이나 비수 등으로 해결을 보았지만 눈치를 챈 일부 왜병과는 난전을 벌이기도 했다.
왜놈들이 단병접전에 강하다는 소문이 많았지만, 그 정도는 남간도 출신이면 어느 정도는 다 하는 것이니까 상대하는데 특별히 어려울 것도 없었다.
더구나 초기 제압수가 적지 않아서 난전으로 들어간 병력적 우세도 조선군 수색대쪽에 있었다.
채 몇 분이 지나기 전에 왜병들을 싹 쓸어버린 수색대가 주변을 살폈다.
“살아남은 왜병은 안보입니다.”
수하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인 아원이 죽은 왜병들을 수색하던 부장을 돌아봤다.
“뭐 좀 있네?”
“없슴다. 아새끼들이 병력 배치가 표시된 지도나 뭐 그런 걸 좀 가지고 있었음 했는데 전혀 없슴다.”
“할 수 없갔지. 좀 더 들어가 보자.”
아원의 말에 병사들이 다시금 숲 안쪽으로 이동해 들어갔다.
그러길 얼마. 또 일단의 차단조가 웅크리고 있는 지역이 나왔다.
병력이 이전보다 더 많아보였다.
“우리끼린 어렵가슴다.”
부장의 말에 아원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일단 돌아가자.”
돌아온 수색대로부터 보고를 받은 신립이 김여물을 돌아봤다.
“차단조를 깔아놨다고 봐야겠지?”
“예. 소수의 차단조를 산속에 대량으로 깔아놔서 시간을 지연시키고 이쪽의 출혈을 강제하려는 속셈 같습니다.”
“그냥 밀고 들어갔으면 개피 볼 뻔했구만. 그나저나 차단조를 걷어내자면 결국 산속에서 전투를 벌여야 한다는 뜻인데······.”
“차단조를 제거하자면······. 예, 아무래도 그래야 할듯 합니다.”
숲이 우거진 산속의 전투는 결국 살수무장을 활용한 전통적인 전투방법 위주일수밖에 없다.
근접전에 대비해 총검까지 장착한 가형 소총은 너무 길어서 숲이 우거진 산속의 전투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야포도 마찬가지다.
사격에 제약이 너무 많았다. 특히 산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그러니 가형 소총과 야포는 동원불가였다.
“어떻게······. 남간도 애들 더 추려볼까요?”
김여물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던 신립이 답했다.
“남간도 애들도 애들이지만 무과 출신들도 좀 모아봐.”
“무과 출신 군관들은 왜······?”
“차단조가 몇 개나 깔려있는지 모르잖아. 결국 수색대처럼 가능한 조용히 처리하는 게 답인데. 그러자면 실력이 뒤받침 되어야지. 격전이라면 무과출신 무관들이 최고니까.”
신립의 말에 김여물이 걱정했다.
“그들은 지휘부의 중핵입니다. 그들을 잃으면 손실이 클 겁니다.”
그랬다. 무과가 사라진 것이 벌써 3년째다.
무과출신 무관들은 고위 지휘부와 육군학당을 졸업한 하위 군관들의 가교역할을 하고 있는 중급 지휘관들이었던 것이다.
“그거야 그놈들이 산속에서 죽어나자빠졌을 때나 그렇지. 대규모 난전도 아니고 소수의 격전이면 뒈질 일 없어. 그 정도 실력이었으면 무과는 통과도 못했을 테니까. 너도 무과 출신이니 알거 아니야.”
신립의 반문에 김여물의 입이 다물렸다.
실력이야 신립의 말대로 무과출신들만큼 믿을 만한 이들은 없었으니까.
“그래도······.”
그럼에도 김여물의 불안감은 여전했다. 만약 불의의 사태가 벌어져 그들을 잃으면 부대의 중간 지휘부 전체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알아. 네가 뭘 걱정하는지. 그래도 그놈들이 제일 효과적이야. 빠르게 싹 쓸어버리고, 병력 투입해야지. 언제까지 이렇게 죽치고 있을 수는 없어.”
“하아······. 알겠습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김여물이 신립의 명을 전령들에게 전했다.
이내 조선군 진영 전체가 소란스러워졌다.
무과 출신 군관들과 난전에 능한 남간도 출신 기마대원들을 추리는 일로 분주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차출된 병력은 무과 출신 무관 1백여 명과 남간도 출신 기마대원 2백, 총 3백 명이었다.
더 많으면 은밀성과 기동성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선택된 수였다.
“부탁한다.”
신립의 말에 지휘를 맡은 지세창이 고개를 숙였다.
“맡겨주십시오, 장군.”
석년에 장원급제로 무과를 통과한 지세창은 조선 제일검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칼에 능숙한 자였다.
장검과 소도, 철퇴에 활까지 다루지 못하는 무기들이 없었고, 그 능력도 탁월했다.
그런 실력을 인정받아 내금위에 있었는데 자원하여 타격 전단으로 자리를 옮긴 자였다.
왕이 왜 가고자 하느냐고 물었을 때 ‘군인은 전장에 있을 때 가장 빛납니다’라고 했다던가.
그런 그가 병력을 이끌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이전보다 더 긴장한 표정의 신립이 그런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길잡이는 이전에 이미 한번 산속으로 진입한 경험이 있던 마원이 섰다.
능숙하게 산속을 헤치고 들어가던 마원이 손을 들었다.
그런 그의 곁으로 지세창이 다가섰다.
“무언가?”
“저 앞이 첫 번째 놈들을 쓸어버린 곳인데······. 다시 배치된 모양임다.”
“그럼 다시 쓸어버리면 되겠지.”
담담히 대꾸한 지세창의 손짓에 무과 출신 무관들이 다가왔다.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무과출신들을 데리고 지세창이 산속으로 스며들어갔다.
남간도 출신 기마대원들과 함께 남아서 지켜보던 마원의 눈이 커졌다.
그들이 지켜본 무과 출신들의 움직임은······. 귀신같았다.
소리 없이 접근해서 경계병을 베고, 순식간에 다가들어 적병들을 도륙하는 전투력은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깔끔하고 전격적이었다.
특히 지세창의 움직임은 최소한의 동작만으로 적의 숨통을 깔끔하게 베어냈다. 순식간에 십여 명이 넘는 적을 베어 넘긴 그의 군복엔 피조차 튀지 않았다.
그런 지세창의 움직임에 마원은 찬탄을 금치 못했다.
숨 몇 번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 일대를 정리한 무관들을 확인한 지세창의 손짓에 기다리던 기마대원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더 깊게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이전과 비슷한 전투를 다섯 번 정도 더 치른 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왜군이 웅크리고 있는 지역에 당도했다.
규모로 보았을 때 차단조의 본대, 정도로 보이는 이들의 수는 3천 남짓으로 보였다.
곧바로 살펴본 지형은 왜 이곳에 대규모 병력이 주둔중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언덕 아래의 길 전과 후가 극단적으로 좁아지고 언덕과 마주한 공간은 커서 마치 호리병처럼 생겼다.
더구나 길 쪽으로 기울어진 비탈은 언덕에서 활로 공격하기에도 수월해보였다.
안에 가둔 채 화살이 쏟아지면 대규모 희생은 불가피할 지역이었다.
그래서인지 왜병들 속에서 활을 든 궁병의 모습이 자주 보였다.
그런 왜병들을 지켜보던 지세창이 마원을 돌아봤다.
“어떨 거 같아?”
“수가 너무 많슴다.”
“그래, 퍼져 있는 공간도 넓고, 무리긴 한데······.”
자신의 다음 말을 긴장된 시선으로 기다리는 이들에게 지세창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돌아가면 저 곳을 뚫기 위해 더 많은 병사들의 피해가 있을 거다. 정리······, 한다.”
지세창의 결정에 무과 출신 무관들이 일제히 검을 꺼냈다.
그걸 본 지세창이 마원을 돌아봤다.
“한걸음 떨어져서 돌입해라. 선봉은 무관들이, 후위는 네들이 맞는다. 속도가 우선이다. 머뭇거리지 마라.”
무과 출신 무관들의 몸놀림은 일반적인 범주를 넘어서 빠르고 가볍다. 그 만큼 타격범위가 넓다는 것을 뜻했다.
휘돌아 검을 휘두르며 주변 삼사장이 모조리 검의 권역에 들어간다.
한걸음 떨어져서 돌입하라는 이유는 그런 검역에 자칫 남간도 출신 기마대원들이 들어갈까 걱정한 탓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마원을 확인한 지세창이 검을 움켜쥔 무관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활을 조심해라. 나머진······. 길어봐야 잔소릴 테니까. 가자.”
그 말을 끝으로 달려 나가는 지세창의 발걸음이 빠르고 경쾌했다.
그 뒤를 무관들이 따랐다.
마원은 그 모습이 마치 바람 같다고 생각했다.
“안감까?”
부장의 물음이 있고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마원이 기마대원들을 이끌고 전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런 마원의 시야로 왜병들을 무차별적으로 도륙하는 무관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여기저기서 그런 무관들을 향해 활을 드는 왜병들이 보였다.
“다 죽이라!”
마원의 고함에 남간도 출신 기마대원들이 몸을 날렸다.
다수의 왜군과 소수의 조선군이 벌인 전투는 치열했다.
하지만 전투력의 차이가 너무 컸다. 무과출신 무관들의 실력은 왜군 무력의 정점인 사무라이들을 뛰어넘고 있었다.
그런 이들 백여 명이 선두에 서서 칼을 가차 없이 휘두르니 왜병들로써는 당해낼 수 없었다.
특히 지세창의 움직임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이라는 말을 그대로 옮겨놓은 움직임에 그의 칼이 물위를 미끄러지듯 부드러운 곡선을 그릴 때마다 피가 뿌려졌다.
왜군의 두터운 갑옷도 지세창의 검 앞에선 속절없이 갈라졌다.
하긴 칼을 칼로써 베어내는 것으로 유명한 검객이 바로 지세창이었으니까.
왜군들이 조선군을 학살할 계획으로 파놓은 함정에 왜병의 피가 진득하게 흘렀다.
진군로 개척 완료라는 보고가 들어오자 신립은 지체 없이 군대를 산길로 집어넣었다.
호리병처럼 생긴 길목을 지나자 비로소 탁 터진 공터가 나왔다.
유후인(由布院, 유포원)이었다.
일부 왜병의 모습이 보였으나 대규모 조선군의 진출 모습을 확인하고는 꽁지가 빠지게 도주해버렸다.
본대가 유후인까지 진출한 것을 확인하자 산속으로 들어갔던 이들이 합류해왔다.
그들을 치하해 본래의 자리로 돌려보낸 신립이 김여물을 돌아봤다.
“이제 어쩌지?”
“길은 두 갈래입니다. 오른쪽이 오이타(大分, 대분)로 가는 길이고 왼쪽이 뱃푸(別府, 별부)로 향하는 길입니다.”
“열세인 걸 뻔히 아는 놈들이 병력을 둘로 나눠 둘리도 없고, 어디다 모아놨을까?”
“오이타일 걸로 예상됩니다. 벳푸보다는 지역적으로 넓어서 대병을 움직이기도 쉽고, 들어가는 길이 좁아서 방어에는 이상적이니까요.”
“그럼 저 산길을 또 지나야 한다는 소린가?”
그 말과 함께 신립이 바라보는 곳엔 좁은 산길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이전의 산길에 차단조를 운영했던 왜군이 저런 길을 그냥 둘리 없었다.
그 말은 결국 다시 산속으로 병력을 집어넣어 산길을 개척해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아무래도 살수로 구성된 산악전 전문 부대가 있어야겠어. 해당 관련해서 정왜 사령부에 보고서 올려. 왜놈들과의 전투가 하루 이틀 사이에 끝날 것도 아니고, 뭔가 조치가 있어야지 싶으니까.”
“예, 장군. 이번 전투가 끝나면 곧바로 보고서 작성해서 올리겠습니다.”
김여물의 답에 고개를 끄덕이던 신립이 지시했다.
“원대복귀 시켰던 애들 다시 불러 모아. 한 번 더 해야지 별수 없을 거 같으니까.”
“예. 장군.”
복명한 김여물의 지시로 이내 직전에 산속에서 돌아왔던 이들이 다시 모인다고 부산을 떨었다.
지세창이 지휘하는 산악전 부대가 다시 산속으로 들어가고, 신립의 부대는 그들의 보고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회전으로 빠르게 결말을 지었던 큐슈 북부 정벌보다 적은 규모의 동부 지역 정벌에 훨씬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있었다.
지세창의 산악전 부대가 개척을 완료했다는 보고를 올리자 다시금 신립의 본대가 길고 긴 산길을 지나 오이타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