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요시하라(大字吉原) 전투
“아! 그건 좀 어렵겠군.”
“그러니 진입 소탕전을 펼쳐야 하는데 엄폐, 은폐물이 많은 시가전은 아군 피해도 적지 않게 생길 테니까요. 그러니 벌판에서 끝내는 게 좋습니다.”
“그럼 더 잡아당기고 때려야겠네.”
“수군처럼 1천보에서 시작하면 도주하는 놈들도 충분히 포선 안에 가둘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좋아. 야, 백규야.”
신립의 부름에 한 군관이 재빨리 다가와 복명했다.
“예, 전단장님.”
“1천보부터 시작한다. 놈들이 뛰기 시작하면 얼마 쏘지 못한다. 그러니 속도가 중요해. 알지?”
“예. 준비 되어 있습니다.”
“좋아 가서 대기해.”
신림의 명에 군례를 올린 백규가 포병대가 늘어선 지역으로 달려갔다.
타격전단에서 포병 지휘는 백규만큼 뛰어난 이가 없었다.
그러니 포병은 그를 믿고 맡기면 된다.
“계획은?”
“저놈들이 어찌 나오느냐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기본 교리대로 갈까 합니다. 포격, 보병 전진, 일제사, 보병 약진, 제압사, 기마돌격. 이 순서로 갈까 합니다.”
“완전 정석이로구만.”
“일단 왜군들의 움직임을 봐서 변형을 가해야죠.”
“잘 봐. 저것들 지들 앞마당이라고 무슨 짓을 해놓았을지 몰라.”
“후위에 차단 병력도 세워놨고, 좌측은 기마대가, 우측은 1개 소총 병단을 배치해서 기습에 대비해 두었습니다.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어련히 교리대로 잘 했을까. 자, 기다려 보자고 저 놈들이 어떻게 나오는······. 어! 한 놈이 달려 나온다.”
신립의 말대로 왜군 진영에서 한기의 기마가 달려 나왔다.
병사들이 소총을 들어 그런 적 기마를 조준했다.
자그마치 수천정의 소총이 조준하고 있음에도 왜군 기마는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나는 타치바나 무네시게다! 자신 있는 조선군 장수가 있다면 나와서 겨뤄보자!”
크게 소리를 지르는 왜군 기마를 바라보며 신립이 시큰둥하니 말했다.
“저 새끼 뭐라고 떠드는 거야? 표정이 항복하겠다는 소린 아닌 거 같은데.”
신립의 물음에 통역병이 재빨리 답했다.
“단기결전을 하잡니다, 장군.”
“단기결전? 으하하하하. 저 새끼가 여기 내가 있는 거 어떻게 알고. 야, 말 가져와.”
대번에 크게 웃으며 일어서는 신립에게 김여물이 물었다.
“뭐하시게요?”
“뭐하긴? 저 새끼가 한번 붙어보자고 했다잖냐. 가서 대가리 깨줘야지.”
“격 안 맞게 왜 그러세요.”
“격? 뭔 격?”
“딱 봐도 저놈 왜군 총대장은 아니다 싶지 않으세요. 세상에 어느 군대의 총대장이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단기결전에 나간다고 저 지랄을 떤답니까.”
“지, 지랄?”
“그럼 저게 지랄이지 뭐겠어요. 그러니 괜히 적군 총대장도 아닌데 격 안 맞게 장군이 나가실 필요 없다, 그거죠.”
“지랄이라는 말, 너 나한테 한소리지?”
“무슨 큰일 날 말씀을! 저 왜병 놈에게 한 소립죠.”
느물거리는 김여물을 한번 노려봐준 신립이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럼 누구 내보내자고? 봐라 애들 전부 우리 쳐다본다. 빨리 결정해야 할 거 같지 않냐?”
신립의 말대로 조선군 병사들 전체가 지휘부가 차려진 막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병사들을 일별한 김여물이 답했다.
“개마 애들 내보내시죠. 왜군 대가리 못 터트려서 환장한 놈들이 드글드글 하니까요.”
“개마? 누구, 황열 새끼?”
“그 자식은 저번에 정찰 나갔다가 배에 구멍 나서 왔잖아요.”
“그럼 누구? 태수? 그 새끼 한 창질 하니까 그놈 내보낼까?”
“그랬다간 저기 고리눈을 뜨고 있는 개마 병단장 편곤 들고 뛰어올 거 같은데요.”
김여물의 말에 기마대가 서 있는 지역에서 무시무시한 안광을 빛내고 있는 정기룡이 보였다.
“저 새낀 상관한데 저 눈깔을! 저거 언제 한번 손 봐줘야하는데.”
말은 저리해도 신립이 가장 총애하는 기마 장수가 정기룡이라는 건 조선군 전체가 안다.
정기룡도 그런 신립을 스승처럼 따르고 있었고.
기마에 관한한 조선에서 신립과 정기룡, 두 사람을 빼놓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네, 네. 손은 나중에 봐주시고 일단 개마 병단장 내보내시죠.”
“근데 저놈도 장수잖아. 격이 안 맞는 거 아닐까?”
“제자를 시샘하는 스승이라니 별로 아름다워 보이지 않습니다만.”
“에이, 시샘은 무슨······. 오랜만에 몸도 풀고, 저 새끼 좋겠네. 알았으니 명령 보내.”
신립의 허락에 전령이 달려갔고, 이내 기마대 속에서 정기룡이 말을 달려 나갔다.
타치바나는 조선군 속에서 달려 나오는 장수를 지그시 바라봤다.
자신들과 달리 가면이 달려있지 않은 투구 아래에 보이는 조선군 장수의 얼굴엔 긴장이나 결사의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결사적이지 않은 놈은 결사적인 자에게 먹히는 법!’
마음을 다잡는 타치바나의 앞으로 정기룡이 마주섰다.
“난 타치바나 무네시게다! 너와의 일기토를 요청한다!”
“새끼 뭐라는 거야?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와!”
상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정기룡이 편곤을 까닥이자 숨을 훅하니 내쉰 타치바나가 창을 꺼내들었다.
긴 날을 가지고 있는 창이었는데 붉은색으로 칠해진 혈조가 눈을 잡아끌었다.
“새끼 전쟁에 색칠된 장난감 들고 나오고. 기본이 안 됀 놈일세.”
야박한 정기룡의 평가를 밟으며 타치바나가 치고 나왔다.
현대에 와서 주로 왜군의 기마전 능력을 비루하게 보는 편인데, 무사계급의 기마전투술까지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그걸 증명하려는 듯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타치바나의 화려한 창술이 허공을 수놓았다.
그런 타치바나를 향해 무심한 표정의 정기룡이 마주 달려 나갔다.
편곤은 늘어트리고 자세는 허술했다.
‘이겼다!’
타치바나의 직감이 서는 순간 창을 움직······.
“컥!”
밭은 비명과 함께 아래에서 위로 번개같이 치고 올라온 편곤에 얻어맞은 타치바나의 한쪽 얼굴이 투구와 함께 형편없이 우그러진 채 말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런 타치바나를 내려다보며 정기룡이 침을 탁 뱉었다.
“퉤.”
말에서 창을 쓰는 놈들의 가장 바보 같은 행위 중 하나가 힘차게 찌르기 위해서 창을 뒤로 빼낸다는 것이다.
뭐, 두꺼운 갑옷을 뚫자면 그게 더 힘을 받는 다는 건 알겠는데, 그렇게 뒤로 빼는 순간 창이 가진 장거리 무기의 이점은 한순간에 사라진다.
그 순간, 적의 장병기가 들이닥치면... 뭐, 지금 보는 왜군 장수 놈처럼 골로 가는 거지.
그냥 힘으로 찔러서 갑옷을 관통시킬 자신이 없으면서 왜 창은 들고 나오는지.
개마 돌격기마 병단의 햇병아리도 하지 않을 실수를 저지른 왜군 장수를 내려다보던 정기룡이 말을 앞으로 몰았다.
고통에 신음하는 적장은 끝내 주는 게 도리였다. 그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뭐 서로 죽이자고 만난 사이에서 그것까지 신경 쓸 이유는 없으니까.
퍼걱.
말발굽에 밟혀 머리가 짓 터져나간 왜군 장수를 확인한 정기룡이 편곤을 들어 올리곤 마치 왜군을 향해 위협을 가하듯 고성을 질렀다.
“우아아악!”
놀란 왜군 선두의 말들이 투레질을 하며 물러섰다.
“크하하하하.”
그 모습에 크게 웃은 정기룡이 말머리를 돌려 조선군을 보고는 피가 흥건한 편곤을 힘차게 들어올렸다.
그런 정기룡을 향해 조선군 진영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립이 피식 웃었다.
“저 새끼 겉멋만 들어가지고서는.”
말은 그리해도 입가로 깃든 미소가 꽤나 만족스러워 보였다.
하긴 김여물이 보기에도 적의 사각을 정확히 파고드는 정기룡의 편곤술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
일기토의 패배가 주는 충격이 군 전체로 퍼져나가기 전에 전투를 진행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고바야카와는 곧바로 병력의 진군을 명령했다.
궁수를 앞에 세운 왜군 병력이 천천히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걸 확인한 정기룡이 자신의 기마대로 돌아가자 조선군 전열도 전투준비를 갖추기 위해 병사들을 독려하는 지휘관들의 고함소리로 가득 찼다.
신립은 점진적으로 접근해 오는 왜군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저것들 우리 앞까지 저렇게 다가설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건가?”
“포격이 시작되면 뛰겠죠. 먼저 뛰어서 체력을 갉아먹을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기마대 수가······. 얼마 안 되네.”
“신경 안 써도 될 거 같습니다.”
“저기 안 보이는 놈들이 뒤로 돌아오는 건 아니고?”
“후위가 알아서 하겠죠.”
시큰둥한 음성만큼 후위를 탄탄하게 구성해 놨다는 뜻이기에 신립은 그런 김여물을 힐긋 바라보며 피식 웃고서는 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었다.
애들 말대로 몇 년간 부부처럼 꼭 붙어있었더니 이정도의 의사소통은 표정과 말투만으로도 이루어지는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왜군과 포병대 지휘부를 번갈아 바라보던 김여물이 말했다.
“청깁니다.”
포 발사준비를 뜻하는 청기가 포병대 지휘부에 올라가자 길게 배치되어있던 포병들이 분주하게 움직여 왜병을 향해 포를 조준했다.
잠시 후, 황기가 올라왔다. 왜군이 1천2백보 안에 들어왔다는 뜻이다.
포장들이 불이 붙은 점화막대를 들고 포 곁에 붙어 섰다.
잠시 후, 백규의 포병 지휘부에 적기가 올라갔다.
콰광쾅쾅쾅.
요란한 폭음과 함께 6백문의 야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움찔거리면서도 전진을 계속하던 왜군들의 군열 사방에서 피가 튀고 군열이 흩어졌다.
재수가 없던 몇몇 왜병은 직격당해 피 떡이 되었지만 대다수의 포탄은 무른 요시하라 벌판에 반쯤 틀어박혔다.
기타큐슈에서 조선군의 폭발탄에 호되게 당했던 본토의 병력 3천은 포탄 주변에서 도주한다고 군열이 흩어지고 난리가 났지만 대부분의 왜군들은 멀거니 바라봤다.
조선군의 포탄이 터진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그게 얼마나 멀리 퍼지는지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포탄에서 겨우 한두 걸음 떨어진 것이 다였다.
그 상태에서 포탄들이 터졌다.
콰과과과쾅!
폭발 반경 일대가 싹 쓸려나갔다.
여기저기서 비산하는 쇳조각에 죽어나간 병사들의 시신들과 그 사이사이 쓰러진 부상자들의 비명이 가득했다.
놀란 왜병들 중에 도주하는 이들이 생겼다.
뒤에 서 있던 독전대가 그런 왜병을 가차 없이 베는 것이 보였다.
도주할 수 도 없게 된 왜병들이 두려운 얼굴로 전진을 계속해갔다.
콰과과과쾅!
다시금 울리는 굉음과 함께 포탄이 또 날아왔다.
이번엔 멀리 떨어진다고 떨어졌다. 그렇게 흩어지고 깨어지는 군열과 달리 병사들은 몇 명씩 뭉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쾅콰광쾅!
땅에 떨어진 포탄이 일제히 폭발했다.
포탄에서 거리를 두고 떨어진다고 떨어졌음에도 폭발한 쇳조각의 비산거리가 너무 넓었다.
인근에 있던 왜군 병사들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완전히 군열이 무너지고 병사들의 위계가 사라졌다.
그 혼란 속에 두셋씩 뭉친 병사들이 뛰기 시작했다.
가만히 보면 가운데 선 병사가 밖에 선 농민병을 칼로 위협해 뭉쳐서 뛰는 양상이었다.
그런 왜군들을 향해 조선군 포병대의 자유사격이 벌어졌다.
장전을 마무리하면 포장의 명으로 곧바로 발사되는 조선군 포탄들이 사방에 떨어졌다.
그 포탄을 피하고자 흩어진 채 내달리는 왜군의 군열은 아무런 통일성도 집단성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저 조선군 앞에 당도하는 것 하나만을 목표로 둔 채 흩어져 달리기만 한 것이다.
그런 왜군의 무질서한 돌진을 바라보던 신립이 곁에 선 김여물을 바라봤다.
“작전 바꾸지. 왜놈들의 군열이 흩어졌는데 굳이 소총병 투입해서 드잡이 벌일 필요 있나.”
“그럼 초반부터 개마 투입할 까요?”
“그래. 아주 싹 갈아엎으라고 해.”
신립의 명에 복명한 김여물의 지시가 떨어지고 이내 지휘부에서 말 그림이 그려진 커다란 깃발이 휘둘렸다.
그걸 확인한 개마 돌격기마 병단이 정기룡의 지휘 하에 일제히 뛰쳐나갔다.
목표는 왜군이었다.
기마대는 좌측에서 뛰고 조선군의 포는 중앙으로 쏘아졌다.
포의 사격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 개마 돌격기마 병단의 기마들이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런 기마대의 최선두에 섰던 기수의 깃발이 정기룡의 명을 받아 앞으로 숙여지자 조선군 야포의 사격이 거짓말처럼 멈춰졌다.
순간 전장의 좌측을 일직선으로 달리던 개마 돌격기마 병단이 사선을 그리며 왜군의 옆구리를 그대로 파고들었다.
오로지 하늘을 보며 포탄을 피해 돌진만 하던 왜군들은 옆구리를 파고드는 기마대의 돌진에 혼비백산했다.
선봉에 선 정기룡의 편곤(鞭棍)이 휘둘리고 맞서나오던 왜군 장수의 머리를 터트려버렸다.
그것을 시작으로 무자비한 조선군 기마대의 돌진이, 무너지고 흩어진 왜군 무리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