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아쿠마(悪魔)
“이겨야겠지. 아니면······. 곤란하니까.”
마치 자신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 같은 주군의 답에 수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길 수 있는 전쟁이었다면 자신의 질문에 당연한 소리를 묻는다며 화를 냈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준비······. 시키겠습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시마즈를 두고 수하가 물러갔다.
“승리라······.”
다시금 읊조리는 시마즈 요시히로의 음성이 낮게 흔들리고 있었다.
*****
조선군의 상륙지가 자신들의 권역에 속한 기타큐슈였기에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북부의 다이묘들을 대표한 고바야카와는 지속적으로 조선군에 대한 선공을 주장했다.
하지만 시마즈가 그 요구를 거부했다.
이미 떠나버린 자였지만 일전에 구로다가 한 주장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강군으로 이름난 조선 수군의 지원이 가능한 기타큐슈로 가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런 시마즈의 결정을 불만스러워했지만 다행히 고바야카와는 북부의 병력만으로 조선군과 결전을 벌이겠다며 나서지는 않았다.
그렇게 후쿠오카에 남은 왜군 지휘부는 조선군과 맞서 싸울 군략을 세우느라 분주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흐르고 기타큐슈의 조선군 수가 늘어갔다.
*****
광해5년 10월 20일을 기해 기타큐슈에 상륙한 조선군의 수가 4만을 넘어섰다.
그 중에는 정기룡이 지휘하는 개마 돌격기마 병단도 끼어있었다.
“병단장님. 전단장님 명령입니다.”
전령의 전갈에 정기룡이 물었다.
“무슨 명령이냐?”
“인근 진출로에 대한 사전 정찰을 시행하라는 명령이십니다.”
“병력 투사 시작하신 다더냐?”
“그것까지는 알지 못하옵니다.”
전령의 답에 정기룡이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전령이 그런 고급정보까지 알고 있을 리는 없었으니까.
“고생했다. 곧바로 시행하겠다고 보고 드려라.”
“예. 장군!”
군례를 올린 전령이 달려 나가자 정기룡이 부장을 바라봤다.
“정찰인데 누굴 보내지?”
“다들 나가고 싶어 할 겁니다. 너무 오래 동안 배에 있었던 데다 또 여기 묶여 벌써 며칠 째니까요. 모두가 보름도 넘는 기간 동안 말을 달려보지 못했습니다.”
“하긴 좀이 쑤시겠지. 황열이 보내지.”
“그 백정 놈을요?”
“출신을 입에 담지 마라. 왕명이 지엄하다.”
“소, 송구합니다.”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부장에게 정기룡이 말했다.
“적응할 때 됐잖아. 황열 같은 애들이 하나둘도 아니고.”
“그래도 벌써 대주까지 올라온 놈은 그놈이 유일합니다.”
“그만큼 노력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명 내려 보내.”
“다른 놈들로 하시지요. 그 무지막지한 놈들 보다는······.”
무지막지한 놈들.
맞다.
황열이 백정 출신이라 그런지 묘하게 딱 저 같은 놈들만 모아 둔 그의 백인대는 거친 놈들뿐이다.
“혹시 황열하고 무슨 일 있었어?”
“그, 그게······.”
얼른 답을 하지 못하는 부장의 얼굴표정 만으로도 대강 짐작은 갔다.
아마도 황열과 충돌이 있었으리라.
부장은 머리도 좋고, 전장을 바라보는 시야도 넓고 다 좋은데 고집이 셌다.
양인도 좋고, 노비도 좋은데, 천민은 너무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권문출신 치고는 생각이 넓다 싶었는데 도저히 천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 부장에게 정기룡이 말했다.
“전하의 말씀이 사람 나기를 귀천이 없다했다. 부모가 천민이어서 천민이 되었던 것이니 그의 잘못이 아니다.”
“그야······.”
“내가 이 부대의 아비라면 부장이 어미다. 자식을 미워하는 어미라니 아름답지 못하다.”
“송구합니다.”
“크게 마음먹고, 넓게 보라. 부장이 잘하는 것이 아닌가.”
“노력······, 하겠습니다.”
“믿겠네.”
그것으로 신경을 끊는 정기룡의 결정은 확고해 보였다.
그런 그를 일별한 부장이 병단 전령을 불러 명령을 전했다.
그런 부장을 힐긋 일별한 정기룡이 피식 웃었다.
병단 전령으로부터 출병명령을 받은 황열은 팔척 거구의 사내였다.
그가 키가 작은 과하마를 타고 달리는 모습은 우스꽝스러웠지만 기마 일체로 보여주는 그의 파괴력을 목격하면 입가에 웃음이 싹 달아난다.
상대가 누구든 황열과 마주하면 피떡이 된다.
훈련도 그럴 진데 실전이라면.
정찰 임무였기에 백인대라 불리는 1개 대, 전체가 나갈 일은 아니었다.
개마 돌격기마 병단 제13 돌격기마대장 황열은 자신을 포함해 서른을 추렸다.
인선이 마무리되자 곧바로 말에 올랐다.
“가자.”
황열의 명에 정찰대 서른이 조선군의 주둔지를 벗어났다.
어찌 그리 대장을 닮았는지 모두가 산만한 덩치를 가진 탓에 그들이 타고 있는 과하마가 유달리 작아 보였다.
주둔지를 떠난 조선군 정찰대는 기타큐슈 초입의 산을 돌아나갔다.
문제는 반대쪽에서도 일단의 기마대가 달려왔다는 점이었다.
양측의 조우는 완전히 우연이었고, 미리 대비된 일이 아니었다. 그런 탓에 서로를 발견하고는 움찔 놀라 급히 말을 세우고 그저 바라만 보았다.
수는 왜군 정찰대가 1백, 황열의 정찰대가 30명 이었다.
놀람이 먼저 가신 것은 황열이었다.
돌아갈 것인가?
불가했다. 자신들이 적을 두고 돌아서면 조선에 두고 온 동생은, 자신들과 같은 처지의 이들은 다시기회를 얻지 못할 수도 있었다.
이를 악문 황열의 외침이 울려나왔다.
“죽여!”
거친 소리를 질러댄 황열이 철추를 꺼내들고 말 옆구리를 찼다.
곧바로 대장을 따라 그 수하들이 각자의 무기를 꺼내들고는 말을 달렸다.
왜군도 반응했다.
수가 적은 조선군을 깔보았던지 비웃음을 머금은 장수가 칼을 뽑아들고 마주쳐 나갔다.
퍽.
제대로 휘둘러보지도 못한 칼을 든 채 머리가 반정도 날아간 왜장이 말에서 떨어졌다.
그것을 시작으로 양측이 거세게 충돌했다.
황열이 대장으로 있는 개마 제13 돌격기마대원들은 기존의 기마대원들이 아니라 바뀐 조선의 군제에 따라 새롭게 충원된 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훈병원에서 기마전투술이 다른 이들에 비해 눈에 띄게 뛰어난 이들을 뽑아 개마 돌격기마 병단으로 보내진 이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처음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기존의 기마대원들이 대부분 양반, 또는 중인 이상의 집안 자제였던 까닭이다.
그로인해 일종의 자존심 같은 것이 있었던 개마 돌격기마 병단의 기마대원들이 그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의 조선에선 하등 쓸데없는 생각이었지만 처음엔 분명 그랬다.
그 탓에 출신 신분이 하찮았던 이들로만 모아둔 곳이 바로 황열의 제13 돌격기마대였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구성이 꽤나 특이했다. 백정 출신들의 수가 가장 많았고, 나머지도 대부분이 노비 출신이었다. 양인 출신이 열손가락도 넘지 않을 정도로 그 출신들이 비루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군에 오기 전에 가졌던 직업들도 이전의 조선에선 업신여김을 당했던 것들이다.
백정에, 망나니, 광해가 왕이 되면서 내려진 대사면령으로 기회를 얻은 산적과 마적 출신에다 해적출신도 서넛이 끼어있었다.
출신들이 그렇다보니 손속과 성품이 거칠다.
무기를 다뤄온 기간도 제법 되고, 싸움은 악과 깡이라 믿는 부류가 대부분이다.
거기다 백정 출신인 황열의 성품이 워낙 드세서 훈련이 실전 같던 이들이다.
더구나 황열만큼이나 나머지 대원들도 자신들이 실패했을 때 돌아올 손가락질과 또 다른 기회의 상실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달려 나가는 조선군 기마대의 마음가짐은 절박함 그 자체였다.
그런 이들과 왜군이 충돌했으니 싸움은 처절, 그 이상이었다.
뼈와 살의 분기점을 귀신처럼 아는 이들이 백정이다.
사람이라고 다를까.
뼈와 살 그사이에 귀신같이 칼을 박아 비틀어 베었다.
피를 폭포수처럼 쏟으며 쓰러지는 왜병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일도양단. 말과 사람을 한 번에 베어내는 이들은 대부분이 망나니 출신들이다.
한 번의 칼질에 혼을 담는 그들의 기세는 가히 벼락같았다.
산적이 왜 산적일까. 무자비하기 때문이다. 도끼를 쓰는 이들이 많았는데 그들의 도끼가 말머리고 사람머리고 가차 없이 둘로 쪼개놓았다.
혹시 말로 가해지는 충파를 본적이 있는가?
말과 사람이 한 덩어리가 되어 달려들어 상대 기마병을 밀쳐 쓰러트려서는 무식하게 짓밟는다.
마적의 장기다.
말이 주인을 닮았는지 눈의 흰자를 번뜩이며 제 동족을 미친 듯이 짓밟아 죽이는데 보고 있노라면 소름이 돋는다.
해적은 야비했다.
해적 출신인 주제에 저런 기마술을 어디서 배웠는지 이말 저말 옮겨 타길 마치 돛대 위에서 밧줄을 밟고 곡예를 하듯 몸놀림이 좋았다.
미친 듯이 달려오다 냉큼 적군의 뒤에 올라타서는 목덜미에 비수를 찔러 넣는데 막아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왜군들이 생소한 조선군 기마대의 전투방법에 휘말려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냥 당하고 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왜군에 있어 기마대는 사무라이들이다. 말을 탈수 있는 권리를 얻는 이들인 까닭이다.
그렇게 명색이 왜군 무력의 꽃이라 불리는 사무라이들이 아닌가.
기세를 올리며 무자비하게 돌진하여 칼을 휘두르는 이들의 반격이 하나둘 먹혀들기 시작했다.
문제는 조선군 기마대의 반응이다.
복부에 창을 박아 넣었더니 눈을 희번덕거리며 도끼를 던져 창을 찔러 넣은 왜병의 머리를 쪼개 버렸다.
그래놓고는 칼을 꺼내 배에 박힌 창대를 잘라내고 다시 왜병에 달려들었다.
그와 같은 일들이 전장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간혹 가다 서너 개의 창칼을 받은 조선군 기마대원이 악착같이 달려들어 왜병의 목에 칼을 박아 넣은 채 숨이 끊어지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렇게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조선군 기마대는 절대로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그 처절할 만큼 거칠고 야만적인 조선군 기마대의 공격 방식에 거친 기질이라면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는 왜군 기마대가 질린 눈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 조선군은 26명이 전사했다.
왜군 기마대에서 살아 도주한 이들의 수는 겨우 7명뿐이었다.
93명의 왜군 기마대가 조선군과의 전투에서 베이고 찢겨 죽었다.
이 당시에 살아 돌아간 왜군 기마병들은 두려움에 휩싸인 채 조선군 기마대를 아쿠마(悪魔, 악마)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았다.
복부에 창칼을 서내 개씩 받고서도 악착같이 창을 찌르고 칼을 휘둘러 왜군을 기필코 죽이고야 마는 조선군 기마대의 악바리 근성에 질려버린 것이다.
난전이라면 이골이 난 왜군 기마대가 그렇게 넝마가 되어 들어온 탓에 왜군들의 두려움이 깊었다.
양측의 정찰대가 충돌한지 며칠 후.
그간 조용히 간몬 해협에 주둔하고 있던 동태평양 함대가 다시금 용트림을 시작했다.
큐슈 고립 작전을 계속 수행하기 위해 20여척을 간몬 해협에 남겨둔 동태평양 함대가 이순신의 지휘 하에 큐슈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오이타(大分, 대분)부터 시작해서 미야자키(宮崎, 궁기)와 가고시마(鹿児島, 록아도) 등 큐슈 동부와 남부 해안가 일대의 포구란 포구는 모조리 포격하여 잿더미로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마쿠라자키(枕崎, 침기)를 포격하여 불태운 동태평양 함대가 사쓰마 반도를 돌아 센다이(川内, 천내) 강까지 진출, 일대의 포구도 전부 포격하여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 소식을 들은 남부의 다이묘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순신의 동태평양 함대가 센다이 강에 접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