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왜군의 큐슈 철군(撤軍)
간몬 해협으로 진입한 동태평양 함대는 해협을 통과하며 무차별적으로 일대의 포구를 공격하여 잿더미로 만들기 시작했다.
왜 본토에 가해진 첫 번째 조선 수군의 공격이었다.
해안가의 왜인들이 전화(戰火)를 두려워해 내륙으로 도주했다.
그렇게 동태평양 함대가 안전을 확보한 간몬 해협을 통해 정경달이 지휘하는 서태평양 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조선 수군 수송함대가 일본 본토 동부해안으로 깊숙이 진출했다.
서태평양 함대와 조선 수군 수송함대가 왜 본토인 혼슈 지역과 시코쿠 지역 사이의 해협인 세토(瀨戶, 뢰호) 내해를 통해 깊이 파고들었다.
수송함대를 호위하는 서태평양 함대의 긴장도가 높았지만 왜군의 함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가끔 고기잡이배가 보이면 서태평양함대가 포격을 가해 모조리 격침시켰다.
정왜 전쟁의 2단계 작전이 시작되면서 왜 본토는 고립된다.
바다에서 보이는 왜선은 고기잡이배든, 나룻배든 가리지 않고 격침시키도록 되어 있었다.
조선은 더 이상 왜군이 바다로 나오는 것을 묵과할 생각이 없었다.
세토 내해를 거쳐 깊게 파고든 서태평양 함대와 수송함대가 아와지(淡路, 담로) 섬에 접근했다.
저항하는 왜군의 함대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해안선을 포격선 안으로 둔 서태평양 함대의 엄호 하에 수송함대의 조선무역선들이 아와지 섬에 병력을 상륙시켰다.
섬이었지만 왜의 본토 깊숙한 곳에 처음 조선군이 발을 디딘 일대 사건이었다.
조선 수군 수송함대에서 아와지 섬으로 1개 소총 병단 1만의 병력과 다량의 야포를 포함한 물자가 하역되었다.
하역을 마친 수송함대는 서태평양 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곧바로 떠났다.
또 다른 상륙작전을 위해 대마도에 대기 중인 병력들을 실어 날라야 했기 때문이다.
조선군의 정왜 전쟁에 필연적인 상륙작전은 사전에 점령한 대마도를 중간 기착지로 삼아 이루어졌다.
교역선단이 전라 수영 함대의 호송을 받으며 1차로 조선과 대마도를 오가며 병력을 수송하면, 조선무역선으로 이루어진 수군 수송함대가 서태평양 함대의 호송 속에 그렇게 대마도로 전개한 조선군을 왜 본토까지 수송하는 형태였다.
왜의 본토 남부에 있는 아와지 섬에 처음 발을 디딘 조선 육군은 야포 사격훈련에서 평가점수가 가장 높았던 경기 소총 병단이었다.
병단장은 김경서가 맡고 있었다.
조선 육군에서 포병대는 포대별로 구성되어 각 부대에 배속된다.
각 병단의 병력은 이 포병대의 숫자를 합해 소총 병단은 1만, 기마총병 병단은 2만을 채우는 것이 조선 육군의 정규편제였다.
1개 포대는 45명의 병사들과 10문의 야포로 이루어져 있었다.
최소 배치 단위는 1천명 규모인 단(團)이다.
1개 단엔 2개 포대가 배치되며, 병단엔 별도로 10개 포대가 추가로 배속된다.
따라서 정규편제 상 1개 병단엔 30개의 포대, 3백문의 야포가 배속되는 것이다.
하지만 최초의 왜국 본토 상륙을 앞두고 경기 소총 병단은 정규편제보다 많은 야포를 배정받았다.
상륙거점을 요새화해 왜군의 반격을 방어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경서는 곧바로 부대를 움직여 진을 쌓고 포를 배치하는 등 분주히 움직였다.
그런 조선군을 향해 일단의 왜병들이 접근해 왔다.
이와지 섬에 남겨진 수비병들 같았다.
“타격대 투입해.”
김경서의 명령에 곧바로 타격대로 지정된 1개 대가 투입되었다.
상륙지에서 앞으로 나선 타격대가 최대 사거리인 6백보 거리에서 외병들에게 가형 소총으로 사격을 가했다.
놀란 왜병들이 흩어져 도주했다.
“3개 단을 내보내. 놈들의 숨통을 끊어서 추가 위협요소를 제거한다.”
김경서의 결정에 3개 단, 3천의 병력이 도주한 왜병들을 쫓아 아와지 섬 내부로 진입했다.
아와지 섬에 대한 조선군의 점령전이 개시된 것이다.
김경서는 분명히 기억한다.
왕은 출전 전의 김경서에게 말했었다.
<조선군이 피를 흘려 한번 발을 디딘 땅은 설사 왜국의 본토라 해도 절대로 돌려주지 않을 것이오. 그걸 실현하는 첫 조선군 장수가, 장군이 되어주시오.>
김경서는 왕의 그 말을 반드시 실현시킬 생각이었다. 죽어서도 지금 밟고 선 이 땅을 왜놈들에게 돌려줄 생각이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단호하고 과감하게 움직였다.
추가로 2개 단, 2천의 병력을 더 섬 내륙으로 들여보내 먼저 투입한 3개 단의 병력과 합세하여 아와지 섬 각지에 숨어든 왜병을 소탕하고, 섬의 주민들에게 조선군의 점령과 통치사실을 주지시켰다.
반항하는 왜인 몇을 참살하고, 그 목을 장대에 걸어 경고로 삼기도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와지 섬 왜인들의 표정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점령에는 채 사흘이 걸리지 않았다.
완벽히 섬 전역을 장악한 김경서가 해안가를 돌며 중요지역마다 포진지를 쌓고 수비요새를 지었다.
그렇게 조선군이 아와지 섬을 장악하면서 본토의 오사카(大阪, 대판)와 시코쿠(四国, 사국) 지역을 연결하던 고리가 끊어졌다.
그럼으로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본거지인 오사카가 위험해 졌다.
이와지 섬이 오사카만을 사이에 두고 오사카를 마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
서태평양 함대와 상륙함대가 간몬 해협을 빠져나가며 이와지 섬 상륙작전이 완료되었다는 보고를 건네자 이순신이 동태평양 함대에 명령했다.
“함대를 간몬 해협에서 빼낸다.”
“조만간 큐슈로 아국 육군이 상륙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래서 빼는 것이다.”
이순신의 답에 새로 그의 부장으로 배치 되어온 손일원은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실제로 이 작전을 이순신이 제의했을 때 정왜군 사령부의 육군 장수들도 저와 같은 표정이었으니 부장만 탓할 수도 없었다.
“큐슈로 왜군이 증강되지 않을 까요?”
“이와지 섬을 그냥 장악한 게 아니다. 오사카가 위협당하면 풍신수길은 자신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 돌아가려 할 것이다.”
“다른 군대로 수비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배치되기 전에 들은 정보설명에선 아직 20만도 넘는 병력이 왜놈들의 본토에 남아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영지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는 질문이다.
이순신도 그걸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으니 부장을 탓하진 않았다.
“왜에서 영지는 하나의 나라와 같다. 그걸 잃으면 풍신수길은 권력도 잃고, 자기 휘하의 병력을 먹여 살릴 능력도 잃는다.”
놀라는 부장에게 이순신이 설명을 이었다.
“당연히 풍신수길은 불안해서 다른 병력에게 자신의 영지를 맡기지 못한다. 그러니 그는 후쿠오카에서 자신의 병력을 빼내갈 것이다. 그러면 본토에 영지를 가진 다른 다이묘들도 병력을 빼려 들 거다. 자신도 병력을 빼는 상황에서 풍신수길은 그걸 막지 못할 것이고.”
“하오면······?”
“큐슈의 왜군 병력이 줄어들겠지. 아군이 지상전을 전개할 때 훨씬 수월할 게다. 그러니 함대를 뺀다. 저들이 해협을 건너 본토로 철군할 수 있도록.”
이순신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던 부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본토 공략 때 더 어려워지는 것이 아닙니까? 차라리 큐슈에 가둬놓고 괴멸시키는 것이 본토의 대병을 상대하는 것보다 쉬울 것 같습니다만.”
“왜놈들의 본토에선 전투보다는 기략과 심리전이 주가 될 게다. 전략을 구사하는 것에 복잡함이 더해지겠지만 그만큼 아군 병사들의 희생을 줄일 수 있는 일이 될 테니 가치는 충분하겠지.”
어떤 기략과 심리전인지 부장은 더 묻고, 이순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그걸 설명 듣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함대는 현재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내 복명한 부장이 이순신의 명을 그대로 복창하여 외쳤다.
“함대를 해협에서 빼라신다. 서둘러라!”
병사들을 부리는 부장의 외침을 들으며 이순신이 해협 양쪽의 땅을 바라봤다.
왼쪽은 큐슈, 오른쪽은 왜의 본토였다.
조선군은 먼저 큐슈를 칠 예정이었다. 정왜 작전의 2단계는 그렇게 규수에 대한 점령전을 담고 있었다.
그날 이순신의 동태평양 함대가 그간 장악하고 있던 간몬 해협에서 철수했다.
*****
동태평양 함대가 간몬 해협에서 철수한 직후, 본토와 다시금 연결된 연락선에 의해 이와지 섬에 조선군이 상륙한 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머물고 있던 히젠나고야성에 알려졌다.
“태합 전하. 아와지 섬에 조선군이 상륙하였다 합니다.”
수하 장수의 보고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얼굴에 놀람이 들어섰다.
“오사카는! 오사카는 어찌 되었다 하더냐?”
“아직 오사카에 대한 조선군의 공격은 없사오나 풍전등화이오니 서둘러 돌아오시라는 가문의 전언이옵니다.”
불안할 것이다. 코앞에 조선군이 진주했으니.
불안하긴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마찬가지였다.
아와지 섬을 조선군이 차지하고 들어앉았다는 것이 어떤 전략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지 단박에 눈치 챘기 때문이다.
이제 조선군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자신의 근거지인 오사카를 공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오사카의 방어력은 그리 단단하지 못했다.
오사카 성 본연의 방어기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성은 믿을 만 했지만 그걸 지키는 병력이 문제였던 것이다.
최대치의 병력을 끌고 나온 것은 휘하 다이묘들만이 아니었다.
본보기를 보여야 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자신도, 오사카에서 대량의 병력을 끌고 후쿠오카로 나와 있었던 것이다.
그 말은 지금이라도 아와지 섬에 진주한 조선군이 공략에 나서면 적절히 대응할 병력이 오사카에 제대로 남아있지 않음을 뜻했다.
그 위험을 방치할 수 없었다.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회군을 결정하고, 그 사실을 후쿠오카에 대기하고 있던 다이묘들에게 통보했다.
그들을 불러들여 상황을 설명하고, 향후 이어질 향배를 결정하는 과정이 필요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것을 건너뛰었다.
다이묘들을 모아놓고 조선 정복전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구키 요시타카가 실패하면서 명분을 쥐는 것도 틀어진 이상, 그런 자리를 마련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패퇴한 채 돌아온 모습에 분노하여 찻잔까지 집어던져가며 쫓아냈던 구키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시금 히젠나고야성으로 불러들였다.
간몬해협을 건너 본토로 들어가자면 그의 함대가 필요했던 까닭이었다.
지금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에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함대가 구키 요시타카의 해적함대 뿐이었기 때문이다.
“차, 찾으셨습니까. 태합 전하.”
“너의 배가 필요하다.”
“명만 내려주십시오.”
“가장 이른 시간에, 가장 신속하게 내 병력을 큐슈에서 빼내고자 한다. 어디를 통하면 되겠느냐?”
아와지 섬이 조선군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모르는 왜군 장수는 없었다.
충격적인 소식이었기 때문에 전파가 빨랐던 것이다.
그러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력을 빼려는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기타큐슈를 통해 시모노세키로 향하는 것이 가장 빠릅니다.”
“하지만 간몬 해협은 조선 수군의 영역이다.”
“지금은 조선 수군이 빠져나갔으니 서두르면 가능할 것입니다.”
“다른 곳은 없더냐?”
“사쓰마는 이전의 조선군 습격 사건 이후로는 위험해서······. 현재 제 함대가 머물고 있는 사세보를 통해 움직인다 해도 뱃길이 너무 멀어져서 태합 전하의 병력을 모두 실어 나르자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입니다.”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경로는 취할 수 없었다.
그 시간 동안 오사카가 안전할지 장담할 수 없었고, 조선 수군이 언제라도 뱃길을 막아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구키 요시타카의 권고를 따르기로 했다.
“네 결정에 따른다. 병력을 기타큐슈로 옮겨놓겠다. 서둘러 배를 대라.”
“예. 태합 전하.”
바닥에 바짝 엎드려 읍을 한 구키가 물러가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무장들을 불러들였다.
서둘러 병력을 후쿠오카에서 빼내 기타큐슈로 옮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역사에 큐슈 철군이라 기록되는 일대 사건이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후쿠오카 일대와 인근의 포구인 사쓰마에 모여 있던 병력들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영지인 오사카의 병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다이묘들의 표정이 굳어있었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본토라 불리는 혼슈에 영지를 가진 다이묘들의 경우엔 단순히 지금 사태에 대한 불만만 담겨있지 않았다.
그들의 입장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아와지 섬을 장악한 것으로 조선군이 어디라도 상륙작전을 전개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된 이상, 다른 다이묘들의 영지 어디라도 조선군이 투입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들의 영지에 남겨둔 병력이 얼마 없었던 다이묘들이 불안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칫 이전처럼 간몬 해협이 막힌 상태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손가락 하나 까닥해보지 못하고 영지를 조선군에게 빼앗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오사카 병력의 뒤를 따라 기타큐슈로 항하는 병력들이 많아졌다.
모두가 혼슈에 영지를 둔 다이묘들의 군대였다. 종래엔 그 행렬에 시코쿠 지역에 영지를 둔 다이묘들이 합류했다.
큐슈에서 철수하려면 시코쿠의 병력이든, 혼슈의 병력이든 배를 이용해 바다를 통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러니 철군하는 왜군 병력이 구키의 함대가 오고가는 기타큐슈로 몰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로인한 기타큐슈 포구의 혼잡함이 문제가 되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침묵했다.
자신이 병력을 빼면서 저들 보러 남아있으란 말은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타큐슈에 모인 병력들 중에서 가장먼저 옮겨지기 시작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사카 병력이었다.
실제로 오사카의 병력이 큐슈를 떠나가는 모습을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한 다이묘들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마음이 다급해진 것이다.
오사카 병력 다음으로 누가 먼저 구키의 함대로 큐슈를 떠날 것인지를 두고 다이묘들 사이에서 분란이 일었다.
종래엔 다툼이 심해져 칼부림까지 일어날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