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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84화 (84/325)

제84화. 해남 전투

장갑귀선이 선회하는 힘을 이기지 못한 사다리가 부러지면서 그 위에 있던 왜병들이 바다로 떨어지거나 개판위로 뛰어올랐다.

바다로 뛰어내린 왜군들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고, 개판 위로 뛰어내린 왜병들 중에서도 다수가 죽음을 맞았다.

날카롭게 솟아오른 송곳에 떨어진 왜병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행히 개판 위의 좁은 통로에 발을 딛는데 성공한 병사들이 있었다.

그들이 먼저 통로에 올라선 왜병들과 합세해 달렸다.

순간.

콰과과과쾅!

드디어 재장전을 마친 장갑귀선의 야포가 일제히 쏘아지며 붙어있는 왜선들을 때린 것이다.

하지만 워낙 많은 배가 달라붙어 있어 그런지 왜선들 한척에 쏟아진 폭발탄은 채 두 발을 넘지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위협적인 화염이 왜선 곳곳에서 일어나긴 했지만 달라붙어 있는 왜선들은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다시금 장갑귀선으로 갈고리 사다리가 걸쳐지고 있었다.

발포 충격으로 몇몇이 떨어져 얼마 남지 않은 개판 통로 위 왜병들이 그 모습을 확인하고는 다시 달렸다.

장갑귀선의 개판 위 통로는 돛을 수납하고 세우기 위해 개방된 형태를 취한다.

비가 올 때를 대비해 통로를 막아두는 판이 존재하지만 잠금장치가 있거나 상부의 공격을 방어할 만큼 충분한 강도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판이 깨어져나가며 왜병들이 장갑귀선 안으로 뛰어내렸다.

곧바로 선내 전투가 벌어졌다.

좁은 선내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짧은 칼을 뽑아든 왜병들의 능력은 탁월했다.

특히 이것을 위해 칼을 잘 쓰는 이들로 구성된 왜병들이었기 때문에 그 능력은 꽤나 출중했다.

삽시간에 장갑귀선 안이 조선군 병사들의 피로 흥건해졌다.

분전하던 함장과 무관들이 하나둘씩 왜병의 칼날에 쓰러져갔다.

살아남아 저항하는 조선군의 수가 안으로 뛰어든 왜병들보다 적어졌다.

거기다 개판 위 통로를 통해 왜병들이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다.

그걸 바라보던 한 조선 수군 병사가 화포 격발을 위해 피워놨던 화로와 저만치 쌓여있는 화약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움직였다.

잠시 후.

콰과쾅!

무시무시한 폭음과 함께 장갑귀선이 폭발했다.

안에 타고 있던 왜병들은 물론이고, 장갑귀선에 바짝 붙어있던 여러 척의 왜선들까지 모두 그 폭발여력에 휘말렸다.

그날 조선 수군은 분전했다.

하지만 그렇게 죽기로 싸웠음에도 상대적으로 적은 배와 인원으로 인한 중과부적을 결국 이겨내지 못했다.

30척의 조선 수군과 3백척의 왜군 해적함대의 전투였다. 단순히 중과부적을 말하기엔 너무 전력의 큰 차이였다.

그로인해 조선 수군은 개전 이래 최초의 패배를 당했다.

섬의 그늘에 숨어있었던 왜군에게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습격을 받은 까닭에 야포의 성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한 채 선상 전투가 벌어진 탓이었다.

너무 빠르게 선상 난전으로 들어간 탓에 27척의 판옥전선들 중 20척이 왜군의 손에 들어갔다.

나머지 판옥전선들은 위험을 인식하자마자 자폭하거나 전투 중 발생한 화재로 침몰했다.

이날 싸움에서 왜군도 3백 척의 함선들 중 31척을 잃었다.

짧은 포격전과 장갑귀선의 충파에 당한 희생이었다.

3척의 장갑귀선들 중 한척은 자폭했고, 한척은 왜군에게 빼앗겼다.

왜선들의 저지를 뚫고 탈출에 성공한 충청 수영 분함대의 배는 장갑귀선 1척뿐이었다.

*****

탈출한 장갑귀선을 통해 충청 수영 분함대의 패전 소식을 정왜 사령부가 접한 것은 14일 늦은 밤이었다.

적함대의 규모가 3백 척에 달한다는 탈출해온 장갑귀선의 보고에 심각한 위기상황을 인식한 정왜 사령부가 부산포 앞바다의 전력 약화를 감수하고 강화수군별영의 함대 80척을 다음 날 아침, 곧바로 완도 해역으로 급파했다.

*****

부산포에서 강화수군별영의 함대가 떠난 시점, 전라도 해남 일대에서 전라 기마총병 병단 일부 병력과 상륙을 시도하는 왜군들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완도 해전에 거둔 승리의 여세를 몰아 구키가 전격적으로 상륙까지 시도한 것이다.

다행히 구키의 함대가 해남 해안가로 다가오기 시작한 직후부터, 조선 육군 순찰대가 그 모습을 포착했다.

그 덕에 왜군이 상륙을 시작하기 전에 해남 일대로 전진 배치되어있던 전라 기마총병 병단 소속 일부 부대에 비상을 걸 수 있었다.

곧바로 해남 해안가로 기마총병들이 출동하고, 전라도 각지의 해안가로 배치된 전라 기마총병 병단 전체를 향해 파발들이 달렸다.

가장 먼저 왜군의 상륙지점으로 달려간 것은 해남 일대에 배치되어 있던 기마총병 1개 단, 1천기였다.

그들이 왜군의 상륙을 저지하는 가운데 주변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기마총병들이 급히 달려왔다.

종래에 해남에서 방어전에 나선 병력은 3개 단, 6천의 병력이었다.

승마총병들이 하마해서 급히 소총진지를 구축하여 사격을 가하는 동안 기마병들이 너무 깊게 들어온 왜군들을 도륙했다.

가형 소총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울퉁불퉁 바위가 많은 해안가의 특성상 상륙한 왜군이 엄폐물로 삼을 것이 너무 많았다.

곧이어 조선군의 야포가 방렬되고 산탄포탄들이 왜병들을 향해 발포되기 시작했다.

조선 육군 1개 단이 보유한 야포의 수는 2개 포대 20문이다.

해남일대로 모여든 단이 3개였으니 방열된 야포의 수는 60문에 달했다.

그 야포들이 쉬지 않고 포탄을 쏘아댔다.

왜군들의 피해가 누적되자 저들에게 나포된 장갑귀선들이 해안가로 바짝 붙어 조선군을 향해 포를 쏘았다.

포도아의 상선에서 얻은 화포로 훈련을 거친 덕인지 제법 명중탄이 나오고 있었다.

하긴 포로로 잡힌 조선 수군 포병을 고문하여 포술을 알아낸 왜군이었기에 적응이 빨랐다.

장전은 야포나 포도아의 화포와 다를 것이 없었다.

화약의 양과 조준선을 맞추는 것이 중요했는데 그것을 고문으로 얻어낸 왜병들의 사격이 조선 육군을 향해 쏟아졌다.

그로인해 해안가에 가까이 다가가 왜병을 도륙하던 조선군 기마대가 큰 피해를 보았다.

이내 조선군 야포들이 해안가 가까이 다가온 장갑귀선들을 향해 발포했다.

그것에 왜군에게 넘어간 장갑귀선들이 응사를 하며 종래엔 포병들끼리의 포격전까지 벌어졌다.

포격전이 본격화 되면서 양측 보병들의 피해가 컸다.

특히 왜병들의 무기가 닿지 않는 곳에서 사격하던 조선군 소총병들도 그 피해의 범위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가득이나 열세였던 병력이 더 부족해졌다.

왜군은 1만의 육군에 육전에 능한 해적까지 2만에 달하는 병력을 상륙시켜 조선군을 압박했다.

왜군 손에 넘어간 장갑귀선들의 지원사격 덕에 차츰차츰 상륙거점을 확대해가는 왜군들에게 조선군이 밀리고 있었다.

지원군이 달려오고 있겠지만 시간이 문제였다.

전라 기마총병 병단 예하의 다른 부대들도 모두 전라도 각지의 해안가로 전진 배치된 탓에 달려오는데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군데군데 소총진지가 돌파당한 조선군과 왜군들 사이에 백병전까지 벌어졌다.

백병전에선 조선군이 열세였다.

총검으로 대응한다고는 했지만 칼로 주무장을 삼는 왜병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했던 것이다.

왜군 손에 넘어간 장갑귀선의 포격에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조선군 기마대가 백병전을 지원하며 분전했지만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해안가가 내려다보이는 마을 언덕에 모여 발을 동동거리며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해남읍민들 사이로 70노구의 읍장이 칼을 들고 나섰다.

“으, 읍장님!”

놀란 사람들의 부름에 칼을 든 읍장이 외쳤다.

“바라만 본다고 우리 조선군이 힘을 내겠는가! 저러다 조선군이 뚫리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죽음뿐일세. 왜놈들이 어디 백성이라고 살려준 적이 있던가, 그 말일세!”

읍장의 이야기에 읍민들이 동요했다.

“가세. 가서 함께 싸워 지키세!”

그 말을 던져놓은 읍장은 누가 따르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해안으로 바삐 움직였다.

다른 이들이 따르지 않더라도 홀로 나아가 싸울 작정인듯 싶었다.

그런 읍장을 바라보던 몇몇 장정들이 날카로운 농기구들을 챙겨 황급히 뒤따랐다.

그게 시작이었다.

이내 수명이 수십 명이 되고, 종래에 수백 명의 장정들이 무기가 될 만한 농기구를 챙겨 읍장의 뒤를 따랐다.

전라 제5 기마총병단에 속한 제57 기마총병대 병사들은 사력을 다해 진지로 뛰어든 왜병들과 백병전을 벌이고 있었다.

원거리에서 가형 소총은 무적에 가까웠지만 이렇게 백병전이 벌어지면 왜병이 휘두르는 창칼에 일방적일 정도로 밀렸다.

더구나 단병접전에서 조선군과 왜병 사이의 전투력에 현격한 차이가 벌어졌다.

하긴 왜국에서 벌어진 수많은 싸움에서 창칼로 싸우는 전투에 익숙한 왜병과 총을 쏘는 것을 훈련받은 조선군은 그 개념자체가 달랐다.

그 탓에 벌써 반수 이상의 조선군 병사들이 주검이 되어 널브러진 사이로 밀고 들어오는 왜병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었다.

제57 기마총병대의 지휘관이었던 정충신은 그 모습에 피눈물을 흘렸다.

사력을 다해 칼을 휘둘렀지만 죽어가는 병사들의 수가 점점 늘어갔다.

결국 이대로 모두 끝인가 싶었던 그 순간.

와!

큰 함성과 함께 백성들이 달려 들어왔다.

삼지갈고리에 죽창, 심지어 낫을 든 이들까지 섞여 있었다.

그들이 왜군에 맞서 밀리던 조선군을 도와 전투에 가세했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던 와중에 달려 와준 백성들에 힘입어 정충신을 비롯한 조선군 제57 기마총병대의 병사들이 악착같이 왜군을 밀어냈다.

그 사이 군인이 아닌 탓에 훈련이 미비했던 백성들의 피해가 컸다.

수많은 백성들과 조선군의 시신을 발판삼아 적을 밀어내는데 성공한 제57 기마총병대 승마총병들이 일제히 총을 쏘았다.

타다다다탕!

진지에서 밀려난 왜군들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다시금 소총진지를 확보한 조선군의 반격이 매서웠다.

그와 같은 일들이 해안가 일대에 조선군이 급조한 진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을 위해 용감하게 달려든 해남 백성들과 조선군 병사들의 피로 해남 해안가가 붉게 물들었다.

그런 악착같은 조선군의 저항에 막혀 고전하던 왜군이 갑자기 상륙을 포기하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멀리 보내놓았던 왜군의 탐망선에 급히 달려오는 강화수군별영의 함대가 잡힌 까닭에 더 이상 해안가에 묶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구키의 해적함대가 해남에서 물러나던 시기, 급히 달려온 구원군들이 해남에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

수군 부총사 이억기의 지휘로 밤을 도와 달린 강화수군별영의 함대가 완도 인근 해상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인 15일 오후였다.

급히 달리느라 장갑귀선은 물론이고, 판옥전선도 노군들의 피로도가 높았다.

배설처럼 치죄를 두려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억기도 왜군의 남해 해안지역 상륙에 대한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그렇게 달려왔지만 충청 수영의 분함대가 당했다는 완도 일대에선 왜선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수하 장수들과 논의한 이억기는 왜군 함대를 찾기 위해 함선들을 나누어 내보내기로 했다.

그렇다고 적은 숫자로 보냈을 때 적함대와 조우해서 살아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었기에 순찰분함대를 조직해 내보냈다.

1척의 장갑귀선과 4척의 판옥전선으로 짝을 지은 순찰분함대 4개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진출했다.

이억기로써는 남해에 대한 추가 상륙을 시도하기 전에 왜군 함대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강화수군별영의 함대가 완도 해역에서 밤을 맞았다.

적선들의 기습에 대비해 섬에서 떨어져 등불을 켜 달고, 경비에 만전을 기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함대에서 쪼개 보낸 순찰분함대들 중 한 곳에서 연락선이 달려왔다.

일단의 왜선이 장흥 해안가로 상륙을 시도해 저지 작전을 전개 중이라는 보고였다.

곧바로 이억기의 명령이 떨어지고, 강화수군별영의 본대가 장흥 지역으로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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