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허를 찔리다
달빛도 어두운 새벽, 구키의 함대 후미에서 따르던 배들 사이에서 잠시 불빛이 깜박이더니 저들끼리 가까이 붙어 무언가 대화를 나누느라 잠시 부산스러웠다.
그리고 얼마 후, 구키의 함대 후미에서 따라오고 있던 배들 몇 척이 떨어져나갔다.
묘하게도 모두가 사야가의 병사들이 타고 있던 배였다.
대부분이 잠들고 최소의 인원만이 배를 운항하던 야음에 벌어진 일이라 구키도, 다른 배의 선장들도 미처 깨닫지 못한 일이었다.
*****
광해5년 9월 13일 오전 10시.
전포(戰袍)를 걸친 광해가 부산포의 정왜 사령부를 직접 방문했다.
그날 50척의 조선무역선으로 이루어진 수군 수송함대에 1만5천의 소총병이 탑승한 채 부산포를 떠났다.
그들이 떠난 잠시 후인 오후 1시, 다시 1만5천의 소총병을 태운 판옥선 교역선단도 부산포를 떠났다.
양 수송함대를 서태평양 함대와 전라 수영의 함대가 호위했다.
부산포에서 2개의 수송함대가 출발한 시점, 사전에 대마도에 전개되어있던 동태평양 함대가 작전 계획에 의거하여 왜의 본토를 향해 출발했다.
50척의 하백급 전열함으로 이루어진 동태평양 함대의 사령은 여전히 수군총사를 겸직하고 있는 이순신이 맡고 있었다.
같은 날 오후4시.
사야가와 그 수하들이 나누어 타고 있던 배가 부산포에 당도했다.
척수로는 8척, 선원들과 병사들을 합해 2천 가량의 왜군이 조선에 투항한 일대 사건이었다.
정왜군 장수들은 위장 투항이라거나 이중 첩자질을 하기 위해 온 것이라는 등의 말들로 소란스러웠다.
광해도 정왜 사령부에 있다가 그들의 투항 소식을 들었다.
한데 광해는 사야가란 이름에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 무릎을 쳤다.
사야가.
우리에겐 김충선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항왜다.
실제역사에서는 가토의 좌선봉장이었던 자였지만 이번엔 어쩐 일인지 가토의 군에서 빠져 있다가 투항했던 모양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세운 공으로 그 벼슬이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까지 이르렀던 자이니 변심이나 이중첩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할 필요가 없었다.
“그 사야가라는 자를 불러오라.”
광해의 명에 장수들의 소란이 잦아들고 이내 사야가가 무장한 내금위 별감들에게 둘러싸여 광해 앞에 당도했다.
오자마자 조선의 왕을 마주할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야가는 잔뜩 얼어있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그에게 광해가 물었다.
“어찌 된 일인가?”
광해의 물음은 곧바로 역관의 통역을 거쳐 사야가에게 전달되었다.
그 물음에 사야가가 내놓은 답은 광해만이 아니라 정왜 사령부의 장수들 모두를 놀라게 했다.
“왜군의 함대가 탐라와 대마도 사이를 지나 조선으로 온단 말인가?”
“예. 저희들이 그 함대에 있다 빠져나온 것이니 머지않아 그들도 조선에 도달 할 것입니다.”
사야가의 말에 수군 장수들이 탐망선을 띄우라 소란을 떠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에 광해가 물었다.
“탐망선은 탐라에도 있을 것이 아닌가?”
“그것이······. 탐라엔 탐망선이 5척 있나이다. 그 모두가 바다에 나가있지는 않을 것이니 많아야 두세 척일 터, 그 넓은 바다를 지키기엔 무리이옵니다.”
자세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애초 경비순찰영의 탐망선들에게 하달된 중점 감시 구역은 대마도와 부산포 사이의 뱃길이었다.
따라서 지금 왜의 함대가 지나간다는 탐라와 대마도 사이의 뱃길에 대한 경비는 온전히 탐라 수영이 맡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광해에게 말했듯 현재 탐라에 남아있는 탐망선은 겨우 5척에 불과했다.
그 모두가 상시 작전에 투입될 수는 없는 법이니 작전 중인 탐망선의 수는 많아야 두세 척에 불과할 것이다.
그들조차 먼 바다에 대한 순찰이 아니라 탐라로 접근하는 왜선을 경비하는 것을 주 임무로 한다.
그러니 먼 바다로 지나가는 왜군 함대를 발견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워낙 넓은 바다가 그들의 담당 해역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나머지 탐라 수영에 속한 대부분의 탐망선은 함대와 마찬가지로 현재 모두 대마도에 진주하고 있었다.
지난 대마도 결전이후, 대마도 일대에 대한 전선 수급 증가만큼이나 탐망 수요도 증가했으나 전투가 벌어졌던 이즈하라에 비해 히타카츠의 전력 증강은 더뎠다.
한정된 전력을 배치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불균형이었다.
결국 히타카츠 포구 일대의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탐라 수영은 부족한 탐망 전력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들 휘하의 탐망선을 탐라에서 대마도로 끌어간 것이다.
그로인해 부족해진 탐라 일대의 탐망전력을 보강하기 위해 부산포의 탐망선들이 출항 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수군 장수들 중에 한명이 추가 작전을 전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다가오고 있다는 왜군의 함대를 맞아 조선 수군도 함대를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문제는 어디를 동원하는 가였다.
조선 수군이 보유한 대부분의 함대는 현재 대마도 일원에서 중요한 작전에 동원된 상태였다.
설사 그 작전을 중단시키고 불러들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작전의 개시와 함께 일체의 외부적 방해에 대응하지 말고 작전계획대로 움직이도록 명령을 내려뒀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왜군의 방해 전술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 취해진 조처였다.
그러니 그들은 불러들일 수 없다.
결국 현재 정왜 사령부가 동원할 수 있는 함대는 동해의 함경 수영, 서해의 충청 수영 분함대, 그리고 부산포에 집결해 있는 경상 수영과 강화수군별영의 함대뿐이었다.
함경 수영과 부산포에 집결해 있는 두 함대는 왜군의 주요 침공로를 지키는 첨병이었다.
만에 하나 왜군이 양동작전으로 부산포 쪽이나 이전처럼 동해 쪽으로도 진출을 해올 경우 그들을 막아야 하는 임무를 가진 함대라는 뜻이다.
그러니 함부로 옮길 수 없었다.
“명과의 무역로를 지키기 위해 대마도에서 돌아온 충청 수영의 분함대(分艦隊)가 있습니다. 그걸 불러내려야 합니다.”
한 수군 장수의 주장에 다른 장수들도 동의했다.
동해를 지키고 있는 함경 수영이나 부산포 앞바다의 두 함대를 동원할 것이 아니라면 사실, 충청 수영의 분함대가 유일한 가용 전력이었기에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곧바로 파발이 부산포의 정왜 사령부에서 충청 수영이 있는 보령으로 달렸다.
보령과의 거리 때문에 한나절은 지나야 소식이 닿을 터였다.
피가 마르는 시간이 흘러지나갔다.
광해5년 9월 14일. 오후.
장갑귀선 3척, 판옥전선 27척으로 이루어진 충청 수영의 분함대가 빠르게 남하하고 있었다.
돛을 모두 펼친 데다 노까지 미친 듯이 저어 내려가는 충청 수영 분함대의 대장선 선루에 분함대장 배설이 서 있었다.
“너무 급합니다. 이래서는 전투에 나섰을 때 노군들이 제 힘을 내지 못합니다. 장군.”
수하 부장의 간언에 배설이 짜증을 내었다.
“한시가 급한 일이다. 당장 왜놈들이 남해 일대에 상륙이라도 하는 날엔 그 치죄를 어찌 감당할 것이냐? 다소 위험을 부담하더라도 서둘러야 한다.”
평소에도 고집이 세었던 상관이 상부의 치죄까지 걱정한다면 말릴 방법이 없었다.
결국 부장은 더 이상 만류하지 못한 채 힘없이 물러섰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던 시점에 충청 수영의 분함대가 서해를 지나 남해로 접어들었다.
서해에 비해 섬이 많아 뱃길이 복잡하고 시야에 가려져 탐망이 불가능한 지점들이 많았지만 서두르라는 배설의 명은 여전했다.
녹초가 된 노군들이 그 독촉에 악을 쓰며 노를 저어 배를 몰았다.
완도 일대에 접어들던 충청 수영 분함대의 앞을 갑자기 섬의 그늘에서 튀어나온 배 수십 척이 가로막았다.
깃발은······.
왜선이었다.
“놈들이다! 장갑귀선에 돌격을 명하라. 적선을 앞에 두고 포선을······.”
배설의 명이 끝나기도 전에 부장의 외침이 들려왔다.
“장군! 뒤에서도 적함이 다가옵니다!”
황급히 뒤를 돌아본 배설의 시야로 무서운 속도로 섬을 돌아 달려오는 왜선들이 보였다.
수가 앞을 가로막은 것보다 훨씬 많았다.
“포를, 선미포를 쏴라!”
배설의 명에 선미에 장착된 포들이 발포를 시작했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채 몇 발 쏘지도 못한 채 뒤쪽으로 접근한 왜선들과 난전이 벌어졌다.
악착같이 거리를 벌리려는 조선 수군의 함선들과 포를 맞으면서도 달려들어 배를 맞대려는 왜군 전선들과의 싸움이 치열했다.
가장 힘을 내야할 순간에 지친 노군들이 제 힘을 내지 못했다.
선회를 비롯한 배의 움직임이 왜군 전선보다 좋은 조선 수군의 함선들이 오히려 왜군 전선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상대적으로 속도가 느린 판옥전선들이 왜선을 따돌리고 포격전을 위한 거리를 만드는 것도 불가능했다.
결국 판옥전선 한척에 서너 척의 왜선이 달라붙어 배 위로 병사들을 올려 보냈다.
선상난전이 벌어진 것이다.
“백병전!”
갑판장의 고함에 하갑판에서 노를 잡고 있던 노군들이 일제히 칼을 들고 상갑판으로 뛰어올라갔다.
조선 수군에서 남간도 출신의 비율은 3할 가량이다.
이런 난전에서 그들의 전투력은 나머지 팔도의 병사들에 비해 두세 배에 달한다.
그럼에도 왜군들에 밀렸다.
왜군이 워낙 단병접전에 능한 데다 노군들이 다수였던 남간도 출신들이 체력적으로 한계치에 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군의 피해가 삽시간에 늘어났다.
육군 학당이 설립되기 이전에 무관이 된 무과 출신 조선군 장수들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배를 장악당하는 일이 도처에서 벌어졌다.
배설의 명에 의해 개전초기 앞으로 치고 나갔던 장갑귀선들도 여러 척의 왜선에 둘러싸였다.
장갑귀선 특유의 돌파를 위해서는 노군들의 힘찬 노질이 필요했지만 지친 노군들이 이를 악물고 노를 저었음에도 제 속도와 힘을 내지 못했다.
그것이 왜군 함선들에 휩싸인 채 빠져나가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어 냈다.
그런 상황에서 몇몇 왜선에서 끝에 갈고리가 달린 사다리가 장갑귀선의 개판 위로 내려졌다.
쿵.
거친 소리와 함께 갈고리가 개판 위를 파고들었다.
철판이라고는 하나 얇게 두드려 편 개판의 철편이 날카로운 갈고리에 힘없이 뚫려 버린 것이다.
그렇게 고정된 사다리를 타고 왜군들이 마치 곡예하듯 내달렸다. 사다리를 타고 개판위로 올라선 왜군 병사들이 좁은 개판위의 통로에 발을 디디는데 성공했다.
이 작전은 사실 해적함대의 창작물은 아니었다. 대마도 결전에서 장갑귀선과의 전투에서 효과를 본 작전이 전수된 것이다.
이것을 위해 대마도 결전에 참가했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왜군 함대가 구키의 함대에 합류했다.
그들은 이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상당기간 훈련에 매진해 왔었다.
그런 배들을 전방에 배치한 것은 왜군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도박이었다.
조선군 함대가 장갑귀선들을 후방에 배치했을 경우 모든 준비가 수포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키의 예상대로 조선군 함대는 돌파를 위해 장갑귀선들을 앞으로 내보냈고, 지금의 상황에 이른 것이다.
왜군의 그 작전이 막 성공을 거두려는 시점, 장갑귀선이 선회를 시도했다.
우지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