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가라쓰(唐津) 습격
예수회와 포도아도 왜인들의 결정을 순순히 수용했다.
배를 넘겨주고 남게 되는 선원들과 은을 실어가기 위해서 포도아를 출발한 배가 아직 마카오에 도착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세한 사정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이순신은 곧바로 결정했다.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 왜놈들의 배를 그냥 두고 갈 생각은 없었다.
더구나 대량의 은까지 함께 있었다. 적의 재화를 아군이 쓸 수 있다면 그보다 통쾌한 것이 없었다.
“분류 작업이 끝나면 곧바로 마카오로 간다.”
이순신의 명에 정경달이 우려 섞인 음성으로 물었다.
“혹, 명나라가 개입해 오지 않을까요?”
“마카오가 명나라에 붙어있다고는 하나 포도아가 세금을 바치고 자신들의 땅처럼 쓴다하니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왜선을 목표로 한다. 그들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명도 인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신경 쓸 것 없다.”
이순신의 단호한 명에 정경달이 곧바로 복명했다.
“예! 총사.”
조선 대양함대는 구출한 생존자들을 최하갑판 선실을 일부 개조해 만든 수감시설에 가뒀다.
직후 조선 대양함대는 이순신의 명으로 20여척의 함선에서 칼과 가형 소총으로 무장한 포수들을 같은 수의 다른 전열함으로 나누어 옮겼다.
20여척의 전열함에 백병전 병력을 충원하여 선상전투를 준비시킨 것이다.
그로써 포격전을 전개할 수 있는 전열함의 수가 30척으로 줄어들었지만 이순신은 그 위험을 감내하기로 했다.
그 상태로 조선 대양함대가 마카오로 접근했다.
대규모 함대의 접근에 마카오 항구에 난리가 났다.
출구가 막히기 전에 서로 출항한다고 정박해 있던 배들이 난리 법석을 떠는 가운데 조선 대양함대가 마카오 항구의 출입구를 봉쇄했다.
그 탓에 상선들이 출항준비를 멈춘 채 두려움에 휩싸인 시선으로 다가오는 조선 대양함대의 함선들을 바라봤다.
조선 대양함대는 인원을 충원하여 선상전투 준비를 갖춘 20여척을 항구 안쪽으로 들여보냈다.
목표는 항구 한쪽에 즐비하게 서있는 왜선들이었다.
그걸 발견하자마자 선두의 3척에서 왜선들을 향해 폭발탄을 발사했다.
콰과과과쾅!
곧이어 서로를 결박한 채 항구에 접안해 있던 왜선들 여기저기서 폭음이 들려왔다.
폭발탄이 폭발한 것이다.
불길은 일지 않았다. 조선군이 사용한 폭발탄이 평소와 달리 산탄포탄이었기 때문이다.
비명과 피가 난무하는 가운데 남아서 배와 은을 지키던 왜인들이 혼비백산하여 배를 버리고 도주하는 모습이 보였다.
바다 쪽에 접해있는 왜선으로 전열함들이 붙어 줄사다리를 내리고 이내 병사들이 건너갔다.
그 모습에 다시 배로 돌아오려는 왜인 선원들을 향해 대기하고 있던 전열함들이 포격을 가했다.
콰과쾅!
놀란 왜인들이 메뚜기 떼 마냥 흩어져 항구 이곳저곳으로 도주했다.
포격에도 불구하고 왜선에 남아있던 왜병들이 저항해왔지만 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들은 가형 소총에 의해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왜선들이 확보되자 조선군 병사들이 왜선을 뒤져 은을 찾았다.
곧바로 발견된 은들이 왜선에서 조선군 전열함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50척의 범선과 그 배가 무장할 철포, 거기다 화약까지 구입하기 위해 실려 있던 막대한 양의 은이 그대로 조선으로 옮겨진 셈이었다.
은을 실은 전열함이 이탈하자 포수들을 내어주었던 전열함들이 다시 붙어 남겨진 은과 왜선으로 옮겨갔던 포수들을 태웠다.
직후 항구 입구까지 거리를 벌린 조선군 전열함들이 일제히 포격을 가했다.
이번엔 화염포탄이었다.
영길리와 왜만이 경험했던 조선 폭발탄의 위력이 온 세상에 알려지는 일대 사건이었다.
더구나 포격 거리가 1천보였다.
그 어마어마한 화력을 십여 척이 넘는 유럽 상선 선원들이 경악으로 부릅뜬 눈으로 지켜보았다.
100척의 왜선이 모조리 불타 가라앉는 가운데 조선 대양함대가 유유히 마카오를 떠나 귀로에 올랐다.
*****
본격적인 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광해3년 11월 말.
대양함대가 거제로 귀환했다.
포로로 잡아온 포도아인과 왜인 들을 하선시킨 후, 대량의 은이 내려졌다.
포구에 쌓이는 어마어마한 양의 은에 거제의 조선군 병사들과 건선단지 기술자들이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모든 하역을 마친 대양함대는 건선단지로 옮겨져 정비에 들어갔다.
처녀항해의 결과로 얼마만큼의 손상이 가해졌는지 검사와 정비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포구에 내려진 포로들은 곧바로 통영을 거쳐 부산포 왜인 수감시설로 옮겨졌다.
그곳엔 부산포 해전에서 구조되거나 대마도에서 잡혀온 왜인 포로들이 이미 갇혀 있었다.
포도아 포로들도 그곳으로 옮겨져 별도로 구별하여 구금되었다.
대량의 은을 실어 나르기 위해 백여 대가 넘는 수레가 동원되었다.
광해가 승전하고 돌아온 대양함대에 상승함대(常勝艦隊)의 휘장을 내리고, 대량의 은을 가져온 보답으로 전 선원들에게 막대한 포상금을 지급했다.
대양함대 장수와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
광해3년 12월 중순.
검사와 정비를 마친 대양함대가 거제를 출항했다.
이들에게 내려진 임무는 왜국 본토에 남아있는 왜선들의 파괴였다.
이시기 거제 건선단지는 새로운 전열함의 건조 준비에 분주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마카오에서 들어온 은에 힘입어 광해가 전열함 50척을 추가로 만들어 2개의 대양함대를 운영하기로 결정한 까닭이었다.
이미 하백급 전열함의 건조 경험을 바탕으로 설계되었던 차기 전열함에 이순신이 제출한 하백급 전열함의 운용 개선요구사항이 적용되어 설계가 마무리 되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은 전장 42M, 전폭 11M, 3층 포갑판을 갖춘 전열함으로 거의 새로운 배라 해도 좋았다.
특이한 것은 맨 아래층 포갑판을 포갑판이 아니라 선실로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이미 포갑판 아래에 최하갑판으로 선실이 마련되어 있었음에도 이순신은 그것을 요구했다.
하부 포갑판이 파도에 의해 사격에 제한이 생긴다는 이유에서였다.
실제로 왜인 탑승 포도아 범선단과의 전투에서 하부 포갑판이 들이치는 파도로 인해 사격을 하지 못한 경우가 다수 보고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들이친 파도로 인해 보관중인 화약까지 젖는 사고도 보고되었다.
이순신은 포의 수를 깎아 먹더라도 그것을 방지하고자 했다.
그로인해 차기 조선수군 제식 전열함은 선창과 최하갑판을 포함해 5층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물론 그러해도 하부 포갑판이 선실로 만들어짐에 따라 실체 포갑판은 2개 층을 보유하게 되었다.
여전히 상부 갑판에는 포를 탑재하지 않았다.
기상여건에 따라 포를 쏠 수 없다는 것이 그 연유였다.
이 시대 유럽이 탑재하는 포의 수를 최대한으로 늘리고, 그걸 모조리 운용할 선원들을 꽉꽉 눌러 채우는 방식을 택한 반면 조선 수군은 언제라도 운용가능한 포수를 중시했고, 그것에 맞춰 선원들의 수를 최대한 억제하는 형태로 배를 만들었다.
확연한 차이였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역시 조선군이 장비한 야포와 폭발탄의 성능 우위였다.
상대보다 적은 수의 포를 장비하더라도 더 먼 거리에서, 더 정확하게, 더 치명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체가 커진 만큼 탑재 함포의 수도 늘었다. 한 층의 포갑판에 수용된 측면포의 수는 20문이었다.
따라서 개량형 전열함에 실린 함포의 수는 선수포와 선미포를 합해 84문이었다.
거기다 이번엔 충각돌기와 선수 장갑도 적용하지 않았다.
마카오 해전을 거치며 범선의 경우 충파보다는 속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조선 수군 지휘관들이 깨달은 까닭이었다.
이 함체엔 고구려본기에 천제(天帝)의 아들로써 등장하는 해모수(解慕漱)의 이름이 붙었다.
앞선 하백급 전열함에다 이 해모수급 전열함의 건조에 소요되는 막대한 전비의 지출에 산처럼 쌓여있던 왕실의 재정이 끝없이 소모되고 있었다.
대양함대가 마카오에서 빼앗아온 대량의 은이 추가로 사용되었음에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대규모 재정 소모가 뒤따랐다.
마카오에서 들어온 은에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던 왕실 재정을 관리하는 환관이 요사인 하루가 다르게 낯빛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을 정도로 과도한 지출이었다.
광해3년 12월 말.
새벽에 불쑥 나타난 조선 대양함대가 후쿠오카 인근의 가라쓰 포구를 틀어막고 포격으로 수백 척의 왜선을 불태웠다.
조선 정벌을 위해 몰려 있던 왜군의 함정들이 모두 불타올랐다.
육지에 배치된 왜군의 화포는 닿지 않는 거리에서 이루어진 대양함대의 포격에 가라쓰 포구가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다.
3시간이 넘게 포격을 퍼부은 대양함대가 잿더미로 변한 가라쓰 포구를 떠났을 때 해안가에 온전히 떠있는 왜선은 단 한척도 없었다.
막대한 지출을 각오하고 왜가 재건한 6백 여척에 달하는 함선이 이 한 번의 공격으로 사라진 것이다.
사실상 왜 수군의 괴멸이라 평가해도 부족하지 않은 결과였다.
조선은 가라쓰 습격 이후에 정왜 전쟁의 작전을 잠정 중단했다.
연일 대양함대 소속 함선들을 몇 척씩 보내 정찰 활동을 벌이기는 했으나 이렇다 할 추가 작전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그 사이 광해3년도 저물고 새해가 찾아왔다.
*****
서기1595년, 광해4년 1월.
거제 건선단지에 대규모 수송선 개발이 명령되었다.
화물과 병력을 빠르고 쉽게 태우고 내릴 수 있으며 대량의 화물 또는 다수의 병력을 실어 나를 수 있는 범선의 개발이 목적이었다.
전통적인 범선과 한선, 거기다 철선의 제작 기법까지 두루 갖춘 거제 건선단지의 기술자들이 총동원된 개발 작업이었다.
광해4년 4월.
첫 잠수함이 선을 보였다.
이창이 만든 이 잠수함에 용왕이란 이름이 붙었다.
용왕이 그 이름에 분노해서였을까? 첫 운항 시험에 나섰던 용왕함은 침몰했다.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판옥선들이 구조에 나설 겨를도 없이 용왕함은 바다 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버렸다.
개발자인 이창과 실험 수병 2명이 타고 있었다.
그들의 희생을 광해가 안타까워했다.
남아있는 자료들로 잠수함 개발은 지속하도록 조치하였다.
장원에서 전해진 안타까운 소식에 이어 남간도에서 생각지 못한 소식이 전해졌다.
누르하치가 통교와 선린우호의 관계를 원한다며 사신을 보내온 것이다.
거기다 뜬금없이 왜와의 전쟁에도 참여할 의사가 있다고 알려왔다.
실제역사에서도 있었던 일이긴 했지만 그때와는 전혀 다른 지금 상황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에 광해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조당의 대신들이 오랑캐가 감히 통교와 선린우호를 입에 담았다면서 길길이 뛰었다.
그 한심한 작태를 광해가 묵인했다.
누르하치와는 다른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는 이대로가 좋았다.
결국 누르하치의 사신은 얻은 것이 없이 돌아갔다.
광해4년 7월.
해모수급 전열함 50척이 완성되었다.
광해는 그 함선들을 묶어 또 하나의 대양함대를 만들었다.
기존 대양함대의 숙련 선원들을 반분하여 새로 건조된 대양함대로 이전하고 새로운 선원들로 부족인원을 채웠다.
이미 해군학당에서 교육을 받은 이들이었지만 그들에 대한 추가 교육이 실시되었다.
광해는 기존의 대양함대에 동태평양 함대란 이름을 내리고, 해모수급 전열함으로 구성된 새로운 대양함대를 서태평양 함대로 명명했다.
서태평양 함대의 사령으로는 이순신이 추천한 정경달을 광해가 임명했다.
정경달은 이순신의 부장으로 다수의 해전을 치렀고, 마카오 해전과, 가라쓰 습격작전에서 활약해서 전열함 작전에도 능통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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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4년의 여름이 저물어가던 8월.
고명사신으로 명에 갔던 홍순언으로부터 서신이 도착했다.
<명으로 망명한 사림의 잡것들이 감히 살부찬위(殺父簒位)를 입에 담으며 고명을 반대하고 있나이다. 그들은 상국인 명이 나서서 조선의 그릇됨을 바로잡아야 한다며 명나라 황실과 조정을 부추기고 있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