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71화 (71/325)

제71화. 거제 건선단지(建船團地)

목재 갤리온의 운항시험 중 조수간만의 차가 큰 서해의 환경이 침저선인 갤리온의 운항 시험에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개진되어 남해의 섬 거제에 대규모 건선단지 조성이 개시되었다.

이곳엔 육지인 통영과 연결하는 선박만이 아니라 의주를 떠난 교역선들까지 이용할 대규모 포구가 갖춰졌다.

이런 대규모 포구를 항구로 부르기 시작했다.

거제엔 서구식 대형 독과 한선을 만들 대형 선거가 만들어지고, 그들에게 철판을 비롯한 각종 철제 재료를 공급할 제철소도 건설되었다.

이곳에 세워진 로는 이전의 재래식 로에서 조금 더 발전된 형태로 흔히 현대시대에 용광로라 부르는 고로(高爐)였다.

제철단지의 기술자들이 수없는 개선을 거듭한 끝에 완성한 것이었다.

무산의 철산 제철단지에도 기존의 로를 고로로 바꾸어 나가고 있었다.

거제 제철소에 공급되는 철광석은 거리의 문제로 조선 남부의 철광에서 채굴된 철이 공급되었다.

이시기 철광은 모두 왕실이 사들여 국유화했다.

철을 완전 전략자원화 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8곳으로 늘어난 황 광산도 모두 왕실 소유였다.

또한 이 시기에 개발되어 있던 소수의 은광과 금광은 물론이고, 석탄을 캐는 탄광과 석회석 광산도 모조리 왕실 소유가 되었다.

자원의 무분별한 이용과 개발을 제한하기 위해서였다.

아울러 이즈음 조선은 코크스의 대량 생산 방법을 개발해 내었다.

기존 방법보다 몇 배는 더 높은 생산효율을 거둘 수 있었다.

과거 중국에서 전래 된 방법과 조선이 가지고 있던 코크스의 기술을 기반으로 하여 그걸 더욱 발전시킨 이 기술은 철산 제철단지의 숯쟁이들의 피와 땀이 서린 결과였다.

코크스의 수급문제로 선철을 만들 때도 절반정도에서 숯을 여전히 사용하던 부분을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코크스의 사용량이 폭증했다.

문제는 이로 인해 코크스용 역청탄의 수입이 폭증했다는 점이다.

코크스의 사용량이 증가하고, 아울러 철의 생산량도 연일 증가세였으니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역청탄 광산이 명나라 땅에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은 명나라 조정이 조필 상단의 뒷돈에 맛이 들려 무한정 개발과 채굴, 그리고 수출을 허락하고 있었지만 언제 그 기조를 바꿀지는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그걸 광해는 걱정했다.

물론 세계최대 유연탄, 그러니까 역청탄 광산을 알고는 있다.

그것도 무산 철광처럼 개발이 쉬운 노천 광산이다.

하지만 ‘타반톨고이’라 불리는 그곳은 몽골의 땅 한복판이다.

지금은 진출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또 다른 대량 매장 후보지역은 호주다.

아직은 그곳을 자국의 영토로 선포한 나라는 없다.

잉글랜드도 1788년에 처음 진출하는 곳이니까 지금은 원주민 외에는 경쟁자가 없어 차지하기 쉽다.

하지만 거리의 문제가 있었다.

조선과 호주와의 거리 상 그곳을 식민지로 가꾸어나갈 역량이 지금의 조선에는 없었다.

이래저래 아직은 명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에서 불안한 성과였다.

그런 까닭에 광해는 반 년 치에 해당하는 역청탄을 무산 제철단지에 쌓아두고 있었다.

유사시 버틸 수 있는 자원이었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무연탄을 활용하기 위한 개발도 지속적으로 진행 되고 있었다.

나무를 연료로 삼는 것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였다.

조림을 열심히 해도 나무를 땔감으로 쓰는 한 조선의 온 산들이 몸살을 계속해서 앓아야 했기 때문이다.

일전에 광해군이 군 시절 추진했던 구공탄 개발은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온 것이 약간의 진흙과 섞어 만든 조개탄이었다.

그걸 태울 조개탄용 화로를 만들어 보급하기 시작했다.

아궁이에 조개탄용 화로를 연결하는 기술도 개발되었다.

나무 아궁이를 대체하자면 필수였기 때문이다.

특히 배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배기장치를 만들었다.

작은 바람에도 잘 도는 바람날개의 변형을 적용한 가스배출 장치였다.

모든 굴뚝에는 의무적으로 부착하도록 왕명으로 못을 박아 놨다.

함경도에만 국한되었던 탄광의 개발이 조선 각지로 확대 되었다.

그럼에도 조개탄용 보일러 보급 속도를 조개탄 공급이 따라가지 못했다.

매연 등 환경오염이 적은 코크스를 가정연료로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제철단지에 사용하는 양을 충당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현실이었기에 감히 검토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

황해도 옹진 일대를 왕실 직영지로 삼아 일체의 광산 개발을 금지시켰다.

해당 지역의 금광은 유사시 조선을 지킬 마지막 보루로 삼아 보존하기로 했다.

마찬가지로 왜에 막대한 부를 안겨줄 사도 금광을 확보하는 계획도 수립하도록 지시했다.

아직은 왜가 그 금광의 존재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따라서 정왜 작전 계획에 사도 금광이 존재하게 될 사도가(佐渡, 좌도)섬의 확보 계획이 별도로 수립되어 있었다.

이런 일련의 일들은 조선 왕실 기록에만 남겨 유사시를 대비하도록 광해가 준비하는 것들이었다.

*****

광해2년 1월.

매년 새해 첫 5일에 열리는 정례 확대 고위관료회의가 열렸다.

부산포의 정왜 사령부에 있던 장수들과 대마도 정벌에 투입된 수군총사 이순신을 비롯해 다수의 장수들이 참여하지 못했다.

소강상태를 맞은 왜와의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이시기 조선은 아직 사대의 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산업 기반을 명에 의존하고 있었기에 광해도 그것을 개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삼정승들을 중심으로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지금이라도 명에 고명사신을 보내 광해의 국왕 즉위를 추인 받으라고 주청해왔다.

광해 개인적으로는 하등 쓸모없는 요식행위라 생각했지만 아직은 명을 거스를 상황이 아니었다.

수출양의 7할을 명에 보내고 있었다.

나머지 3할은 전쟁 중인 왜를 통하고 있었으니 조선의 경제 여건상 아직 명과 대척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렇게 3할을 수출하는 왜에서 거두는 은 수익이 7할을 파는 명에서 거두는 수익과 거의 같았다.

주요 교역품인 철과 은, 생사를 명에 파는 가격의 두세 배는 비싼 가격에 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조선이 전쟁 중인 왜와 교역을 끊지 못하는 이유였다.

한창 발전해 나가는 조선의 산업과 상업에 해가 될 일을 아직은 벌일 수 없었다.

결국 환갑을 넘은 홍순언이 다시 고명사신으로 명으로 향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대동하길 원했고, 광해는 그것을 허락했다.

석성과 홍순언의 인연을 그 아들을 통해 계속 이어나가길 희망했기 때문이었다.

*****

이 당시 왜의 분위기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여러 번 시도했던 대마도 탈환 작전은 실패했고, 피해를 감수하고 거친 외해의 물살을 헤치며 나아간 기습도 번번이 발각되어 회군했다.

그런 상황에서 본격적인 전투도 벌이지 못하면서 대규모의 육군 병력을 오랜 시간 유지해야 했던 다이묘들의 분위기가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나빠졌기 때문이다.

그냥 두면 그 불만이 폭발할 수 있다고 판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협판안치)를 불러들였다.

직후 왜군이 모여 있던 후쿠시마의 사쓰마 포구가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이전과 달리 대규모의 육군 병력도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서기1593년, 광해2년 4월.

조선군이 차지하고 있는 대마도 포구의 일상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지난 겨울철로 접어들며 사라진 왜군 함대의 활동은 아직 재개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탐망이 느슨해지진 않아서 대마도를 기점으로 하는 경비순찰영 소속 일부 탐망선들의 일과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한 달이면 이십일은 바다에서 보냈다.

한척의 탐망선을 맡고 있던 이소강의 일과도 그와 같았다.

물과 음식물 등 보급품을 실은 채 대마도 포구 한쪽에 묶여있는 탐망37호가 그가 근무하는 배였다.

동료들은 모두 넷. 이소강 자신까지 모두 다섯이었다.

“준비 다 됐습니다.”

부장의 보고에 이소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줄 풀고, 출항하자.”

“예. 정장.”

탐망선의 경우 책임자의 직책은 정장이었다.

그로인해 탐망선을 달리 탐망정이라고도 불렸다.

그렇게 정장을 맡고 있는 이소강은 9품에 불과했지만 정식 무관직을 제수 받은 관리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라도 한 양반가의 노비였지만 지금은 4명의 수하들을 책임지는 군관이었다.

북방 거친 그 땅으로 끌려갔을 때만 해도 그냥 고된 노동 속에 죽어나갈 줄로만 알았는데······.

자신이 끌려갈 때 울고 불던 여동생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했다.

그 조그마한 녀석이 커서 이젠 철고 은행에 다니며 제 밥벌이를 한다.

못 생긴 게 성질만 독해서 걱정을 했었는데······.

오히려 그렇게 딱 부러지는 성품이 은행에 잘 맞았던지 제법 상도 받고, 칭찬도 많이 받는다.

그 녀석 시집보낼 때까지는 무탈하게 살아야 하는데.

조실부모하고 둘만 남은 탓에 여동생을 챙길 사람이 자신뿐이 없었다.

상념을 털어내며 확인하니 배가 포구에서 떨어졌다.

열심히 손으로 선미에 달린 바람날개를 돌리는 수하를 보며 싱긋 웃었다.

노를 사용하지 않는 탐망선은 포구를 떠날 때 부지런히 저걸 돌려야 했다.

선미에 거세게 일어나는 물거품을 바라보던 이소강이 외쳤다.

“돛을 펴라.”

이소강의 명에 배에 설치된 두개의 돛대에서 돛이 일제히 펼쳐졌다.

탐망선의 크기에 비해 월등히 큰 돛이 배를 빠른 속도로 끌기 시작했다.

대마도와 왜놈들 본토 간의 뱃길에 대한 탐망에 투입된 탐망선은 모두 12척이다.

그중 8척이 매일 밤낮으로 바다에 나와 있었다.

멀리 다른 탐망선이 보였다.

그쪽도 이쪽을 보았는지 손을 흔드는 것이 망원경에 보였다.

이소강이 같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햇빛이 바다에 반사되는 데다 까마득히 멀어서 눈으로는 식별이 불가능할 것도 망원경을 통해서는 코앞에 있는 것처럼 잘 보였다.

망원경을 시야에서 내려 바라보며 이소강이 미소를 그렸다.

신기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었다.

하긴 임금님이 만들어서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런 임금님을 만난 것을 이소강은 행운으로 여겼다.

다른 이들은 생각도 못하는 것을 만드시기만 한 게 아니다.

헐벗고 굶주린 백성을 위해 모든 것을 거신 분이었다. 더구나 가진 것 아무것도 없던 노비도 잊지 않고 돌보신 분이 바로 그분이었다.

임금님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아직도 그저 노비 소강이었을 것이고, 여동생도 아무런 희망도 없이 양반가 여식의 몸종이나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여동생은 돈을 모아 우리 남매가 살 집을 사는 것이 꿈이었고, 자신만의 멋진 옷가게를 차리는 것이 희망이었다.

그렇게 여동생에게 꿈을 가져다준 임금님이 맡긴 임무였다.

이소강은 아직도 탐망선 근무자들의 교육이 마무리 될 때 제물포 교육장까지 찾아와 격려를 해주었던 임금님의 말을 기억한다.

<그대들의 눈이 나라를 지키는 방패가 되고, 보루가 된다. 그러니 반드시 지켜다오. 이 조선을.>

탐망선 근무자들은 그 말을 천금처럼 여긴다.

그러니 누구도 허투로 하지 않는다.

“자, 더 가자. 우리 담당수역은 훨씬 더 앞이다.”

이소강의 명에 탐망선 병사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그런 병사들의 움직임에 탄력을 받은 듯 탐망37호가 바다 위를 빠르게 달려 나갔다.

대마도에서 왜놈들의 본토로 가기 위해서는 대략 두 가지의 뱃길이 존재했다.

하나는 기타큐슈를 출발해 히타카츠를 거쳐 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후쿠오카를 출발해서 이키(壱岐, 일기) 섬을 거쳐 이즈하라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 외의 길은 조류나 거친 물결로 잘 이용되지 않는다.

왜놈들의 배도 그 길을 따라온다.

이번에 이소강의 탐망37호가 맡은 구역이 바로 그 이키 섬을 돌아 나오는 구역이다.

이키 섬에도 왜놈들이 있기 때문에 너무 바짝 붙지 않는다.

어떤 술수를 써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도 안전한 거리까지는 다가간다.

그래야 섬 그늘을 돌아 나오는 왜놈들을 배를 조금이라도 빨리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이키 섬이 코앞이었다.

“3천보 거리까지 붙는다. 섬의 좌우를 모두 시야에 넣어야 하니까 자리 잘 잡고.”

이소강의 명에 병사들이 재빨리 움직였다.

벌써 1년 가까이 손발을 맞춰온 이들이라 그런지 동작이 빨랐다.

그걸 이소강이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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