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화. 팔두 역마차(八頭 驛馬車)
왜군 함대의 발견은 우연이었다.
순찰 중이던 함경 수영의 함선에 최근 장원에서 개발해 육군에 보급을 시작한 망원경을 빌려가지고 탑승한 군관이 있었다.
공식적인 해상 시험은 아니었고, 군관의 개인적인 궁금증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그 군관이 경비구역인 근해가 아니라 원해를 탐색했던 것도 궁금증에 기인했다.
정말 멀리까지 잘 보일까 싶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왜군의 함대 일부가, 그것도 돛대 상부가 발견됐던 것이다.
발견된 것이 겨우 돛대 상부였기 때문에 순찰중인 배의 군관들끼리 의견충돌을 벌이기도 했을 정도다.
결국 논의 끝에 여러 척의 배라 판단했다.
조선 수군의 입장에선 여러 개의 우연이 겹친 뜻밖의 결과였다.
동해 북부를 담당하는 함경 수영의 함선이 울진까지 내려왔던 것은 동해 남부를 담당하는 경상 수영의 함대가 부산포에 집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연락선도 양쪽으로 공히 달렸다.
조선 수군에 비상이 걸렸다.
함경 수영 전 함선이 출동하고, 부산포에 대기하던 경상 수영의 함대가 거슬러 올라왔다.
빠르게 움직인 덕에 다행히 왜군의 함대가 근해로 들어서기 전에 조선 수군의 함선들이 집결하여 저지선을 구성할 수 있었다.
대규모 조선 수군 함대를 확인한 왜군 함대가 배를 돌려 돌아갔다.
이 일로 순찰경비영의 탐망 영역이 동쪽으로 더 확대되었다.
또한 함경 수영의 순찰 횟수가 늘고 긴장이 높아졌다.
그렇게 조선의 바다는 여전히 전쟁 중이었다.
바다가 전쟁 중일 때 조선 본토에선 군제의 개혁이 다시 이루어졌다.
여진전사들과 노비출신들, 그리고 자원한 조선인들로만 구성되었던 광해의 초기 조선군의 기조가 바뀌었다.
조선인이면 무조건 18세부터 20세까지 모든 남자는 군역을 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이 군역병(軍役兵)이란 이름으로 군에 소집되었다.
물론 이 나이 때의 장정들 중 상당수가 이미 군으로 복무중이어서 사실상 늘어난 병력은 미미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완전히 달랐다.
새로 도입된 군역법엔 양반이고 중인이고, 양인, 남간도 출신의 가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림에서 가벼운 반발이 나왔지만 광해군은 그들을 사뿐히 지르밟았다.
반발한 이들 모두를 잡아 옥에 가두고 재산을 몰수했던 것이다.
타인의 희생으로 자신의 안전을 지키려는 파렴치한이란 죄목이었다.
오죽하면 이 나이 때의 승인들도 승병으로 입대해야만 했다.
그들에겐 군승이란 직책이 주어졌다.
일부는 군대내 종교인으로써 활동했지만 대부분은 일반 군역병과 마찬가지로 전투병의 역할을 맡았다.
간혹 불살생의 계율을 거론하며 무기를 잡길 거부하는 승인들이 나왔다.
그들은 공병대에 배치되었다.
만에 하나 전쟁이 터지면 맨몸으로 창칼과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진지를 복구하고, 군수물자를 날라야 하는 일이었지만 그들은 두말없이 받아들였다.
모든 승병들은 군복이 아니라 승복을 입고 머리를 밀수 있는 권리가 인정되었다.
그 외의 특혜는 일절 부여되지 않았다.
외란 시 자발적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승병으로 참여한 전례가 있어서였는지 불교계는 아무런 반응도 내놓지 않은 채 나라의 제도에 순응했다.
몸이 아프거나 장애가 있는 이들도 예외는 없었다.
아픈 이들은 이 시기 오히려 대규모 시설을 갖춘 군병원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기도 했다.
물론 꾀병을 부린 이들은 심도 있는 진료 후, 꽤나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이들에겐 2년의 추가 형벌근무가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일반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훈병원(訓兵院)을 수료한 군역병의 계급은 모두 세 단계로 평군병(平軍兵), 상군병(上軍兵), 만군병(晩軍兵)이다.
군병들 사이에선 이것을 줄여 평병, 상병, 만병이라 불렀다.
그 중 가장 아래계급인 평병으로 2년을 더 근무해야 했던 것이다.
자신보다 늦게 입대한 이들을 상관으로 모셔야 하는 곤혹스러움은 덤으로 겪는 고통 중 하나였다.
장애를 가진 이들도 해당 장애를 감안하여 각 군에서 소요되는 직책을 맡았다.
그런 일련의 군제가 도입된 이후 억울한 이들이 한명도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재산과 지위, 칭병을 이용해 군역을 피해가려는 시도는 조선에선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다.
3년의 군역 기간 전반에 걸쳐 각자가 원하는 직업교육 또는 철산 고등학당 수준의 심화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이때 소요되는 비용은 전액 국가 부담이었다.
물론 이것은 근무시간 외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참여자 개인의 상당한 노력이 뒷받침 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원하지 않는 이들은 그 시간에 휴식을 취할 수도 있었다.
그것이 군역에 나서는 백성들 전반의 호응을 얻었다.
쉬는 이들보다 무언가를 배우는 이들이 절대적으로 많았던 것이다.
노비는 아직 이 군역에서 제외 되어있었지만 해당 나이대의 노비들은 전부라 해도 좋을 만큼 이미 군대에 있었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 아직 군역을 지지 않은 노비들도 면천될 이들이 대다수였기에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이미 군을 제대한 노비가 다시 군역을 지는 일이 없도록 중복 군역을 금지시켰다.
물론 자원하는 경우에는 상관없었지만, 이 경우에도 군역군보다 까다로운 직업군인 선발 자격을 갖추고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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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구도를 연결하는 교통망도 대대적으로 정비되었다.
각 읍과 리까지 연결하는 지방도로가 완비된 덕에 시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조선의 첫 대중 교통망에 광해가 역마차란 이름을 붙였다.
우정청 소관의 역참마다 서는 마차였기 때문이다.
여덟 필의 말이 끌고 1개의 승객칸과 하나의 화물칸이 딸린 이 역마차는 시 단위의 지역에서 한성으로 운행 되었다.
반대로 한성에서 각 시로 가는 역마차도 당연히 운행되었다.
이것이 활성화되자 이내 도 마다 시들을 연결하는 교통망도 생겨났다.
이것에는 시통마차(市通馬車)란 이름이 붙었는데 같은 도 산하의 시들을 통하는 마차란 의미였다.
다시 그 밑에 읍통마차가 생겨서 시내의 읍들을 연결하는 마차도 운행을 시작했다.
당연히 읍내에서 리들을 연결하는 이통마차도 운행했다.
한마디로 조선 구도가 정기 마차들로 연결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남간도와 함경도 지역의 역마차는 곧바로 한성으로 향하지 않고 먼저 평양으로 달린다.
그 후 평양에서 하룻밤 묵고 다시 한성으로 달리는 이틀의 여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거리 탓이다.
아무리 중간 역참에 들려 말을 바꾸어 달려도 하루에 한성까지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대중교통망이 완성된 광해1년 11월경엔 조선의 북쪽 끝인 안도에서 동남쪽 끝인 부산포까지 3일이면 닿을 수 있는 교통망이 완성되었다.
동일한 경로로 운행되는 짐마차들이 폭증했다.
육상 수송이 본격화 된 것이다.
북부도로와 남부도로가 확장되어 북부중앙로와 남부중앙로로 개칭되었다.
그 두 도로와 연결되는 수많은 이름의 지방도로가 조성되었다.
각 산지의 물산이 이동하는 속도가 빨라지자 각각의 산업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어업도 소규모가 아니라 대규모 어업이 등장했다.
처음 왕실이 아닌 개인이 시작한 사업이 등장한 것이다.
어선 5척으로 시작된 이 사업체가 마침 대량 보급되기 시작한 천일염의 활용으로 확장일로에 들어갔다.
순식간에 성장해가는 그 업체를 보고 여기저기 투자하는 이들이 생겼다.
각지에 어업 상단이 설립된 것이다.
이들은 왕명으로 확립된 조선 상법에 의거하여 소득분배 5원칙을 무조건 준수하여야 했다.
그것을 감독하고 관리하기 위해 호조 산하에 산업감독청이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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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1년 11월.
겨울로 접어들면서 왜군 함대의 출현이 극도로 줄어들었다.
하긴 겨울은 전쟁을 하기에 좋은 시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조선의 개혁은 겨울이라고 멈추지 않았다.
광해는 자신에게 절대적인 왕권이 있을 때 사회개혁 작업의 밑그림을 완성하길 원했다.
이익집단이나 왕권을 견제할 만한 권력집단이 다시 형성되기 전에 밀어붙인 것이다.
특히 백성들의 교육을 위한 개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일환으로 기존의 교육기관이 모조리 국가 교육기관으로 탈바꿈했다.
철산 소학당의 학비는 면제되었고, 모든 조선의 8살부터 12살까지의 아이들은 남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두 철산 소학당에서 교육을 받아야 했다.
의무교육의 시작이었다.
이후 교육받지 못한 성인들을 위한 철산 중학당이 개설되었다.
이곳도 국가 교육기관이었지만 학비를 받았다.
이전에 철산 소학당이 받았던 것과 같은 연1만원의 학비였다.
그럼에도 배우고자 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연일 이어지고 있었다.
철산 고등학당 같은 경우엔 연5만원의 학비를 내야 했다.
대신 심도 있는 교육이 이루어졌다.
학과도 철산 소학당과 철산 중학당의 훈장을 기르는 교육학과뿐만 아니라 기술을 가르치는 학과들이 생겼다.
제철학과, 무기학과, 조선학과, 의학과, 법학과가 그것이었다.
교수진들로 철산단지와 제물포 선거, 장원의 기술진, 그리고 왕실 내의원의 실력 높은 의원들과 사헌부의 법률전문가들이 포진했다.
특히 의료계의 발전에 광해가 막대한 투자를 진행했다.
외과적 치료법이 적극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다.
그 선두에 어의, 허준이 자리하고 있었다.
허준을 중심으로 한 내의원 의원들을 통해 내과적 치료방법 뿐만 아니라 약학과 수술을 통한 외과적 치료방법들이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죽은 이들의 시신을 활용할 수 있는 법이 제정되어 기증자, 또는 무연고자의 시신을 해부하여 의료연구에 쓸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내의원을 확대하여 국가종합병원을 세우고, 군에도 대규모 시설을 갖춘 군사병원을 열었다.
철산 고등학당 의학과의 학생들은 군역이 보류되었다.
이곳을 졸업한 이들은 의무적으로 3년간 국가 병원에서 실제 치료를 도우며 의술을 갈고 닦아야했다.
이후 다시 3년간 군에서 의무관으로 군역을 대신해 의무복무를 거쳐야 했다.
그 과정을 모두 수료하면 왕실에서 진행하는 고난도의 의원 시험을 치러야 했다.
그것을 통과해야 왕실이 인정하는 왕실 의원의 자격을 득할 수 있었다.
왕실 의원의 자격이 없는 이는 외과적 치료를 시도할 수 없었다.
만일 왕실 의사가 아닌 이가 외과적 치료를 시도하면 중히 처벌하였다.
그런 복잡한 과정에도 불구하고 의학과는 상당한 경쟁률을 보이고 있었다.
여기서 조선의 학생 선발 기준을 살펴볼 필요성 있는데 조선은 조금 특이한 선발 과정을 거쳤다.
각 학과에서 사용되는 교재를 읽을 수 있을 정도의 한글, 산수가 가능하면 입학엔 제한이 없었다.
하지만 각 학년을 올라가며 치르는 전공수업의 성취도에 따라 유급 또는 제적 처리가 이루어졌다.
현대 시대처럼 영어, 수학을 잘한다고 사람의 병을 잘 고치고, 법을 잘 집행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육군학당과 수군학당, 전문적인 포청의 인력을 수급하기 위해 새로 신설된 포청학당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전문기술학교들도 수없이 문을 열었다.
어업, 농업, 상업, 건설, 경영까지. 이들을 엮어 산업중학당과 산업고등학당이 문을 열었다.
마찬가지로 국가 교육기관이었다.
각 학교마다, 각 학과마다 실질적인 현장의 전문가들이 교수진들로 포진했다.
그들은 교수로만 재직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의 실질적인 어부였고, 농부였으며 장사를 영위하는 상인이었고, 건물을 짓는 건축가였으며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업가였다.
자신들의 실질적인 지식과 경험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에 아낌이 없었다.
그렇듯 모든 조선 백성에게 직업선택의 기회는 열려있었다.
그리고 그 분야를 정말 잘하는 이들이 해당 분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렇게 조선은 무섭게 변화하고 발전해가고 있었다.
그런 일의 선봉에 선 교수란, 직업 이상의 명예직으로 여겨졌다.
교수들은 1년에 한번, 추석에 왕이 대궐에서 여는 대연회에 가족과 함께 참석할 수 있는 영광이 주어졌다.
이 연회는 왕이 연회장을 돌아다니며 교수들과 손을 마주잡고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는 행사여서 그 참여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영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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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산업과 상업이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제도적 개혁이 연일 벌어졌다.
그에 맞춰 계속해서 발전하고 개선되는 조선의 법률은 두 가지 명확한 기조를 띄었다.
만인에게 공평해야 할 것.
할 수 있는 것을 정하지 말고, 하지 못할 것을 정할 것.
그렇게 제정된 법이다 보니 미처 제한하지 못한 일들이 있었다.
그렇게 법이 미처 금지하지 못한 일일지라도 도덕적으로 비판받을 일은 왕이 직접 나서서 비난할 정도로 민감했다.
나라의 소식이 모조리 실리는 신문이 그런 일들을 조선구도 전체에 전하는 일을 맡았다.
처음엔 왕립신문인 대한신보만 있었지만 신문이 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몇몇이 신문사 설립 허가를 요청하여 승인되었다.
이로써 조선엔 왕립신문인 대한신보 외에 한성일보, 그리고 평양주보가 추가로 생겼다.
한성일보는 대한신보와 마찬가지로 매일 신문을 만들어냈지만 평양주보는 일주일에 한번 소식을 모아 내는 주간지 형태였다.
광해1년 12월.
조선이 만들어낸 최초의 목재 갤리온이 완성되었다.
범선의 설계 및 건조 기술을 조선의 기술자들에게 교육시키기 위해 제작된 시제함이었다.
그 시제함을 활용해 서반아에서 대양항해술을 배워온 선원들을 중심으로 항해교육이 실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