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화. 백성기본법
광해의 예상은 빗나갔다. 의외로 백성들은 여성들의 참여를 그러려니 그냥 넘겨버렸다.
신분제의 철폐와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부는 시기였던 데다가 아내와 여인들이 숨을 죽이고 사는 사대부가 중심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아내들의 발언권이 제법 강했던 양인과 노비 출신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었다.
그렇게 모인 수백 명이 서로 떠드는 일이니 결론이 빨리 날수 없었다.
그렇다고 몇날 며칠을 떠들 수는 없는 일, 광해는 이 회의를 선거회라 명하고 하루로 한정했다.
그렇다고 조선의 모든 마을이 한날한시에 모였던 것은 아니다.
일주일을 정해서 각 마을의 사정에 맞춰 인접마을과 다른 날짜로 선거회 날짜가 지정되었다.
그날 모여 토론을 벌였고, 다수의 추천을 받은 이들 중에서 최다 동의를 받은 이가 이장으로 뽑혔다.
읍장은 그렇게 선발된 이장들 중에서 이장들 간의 토의와 투표로 선출하였다.
그렇게 읍장이 나온 리는 다시금 이장을 뽑는 절차를 거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백성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마을 이장이 읍장으로 뽑혔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인물이 자신들의 마을에서 나왔다는 논리였다.
그런 이장을 뽑는 선거권에 남녀의 성별 차이가 없었듯이 그 출신도 가리지 않았다.
양반, 양인, 천민, 노비를 가리지 않고 계층의 백성이 다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피선출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보니 신분상 노비의 수가 많았던 몇몇 리는 이장에 노비가 선출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물론 이 경우에도 한글과 기초적인 산수는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어서 행정 공백이 발생하는 것을 막았다.
이 시기의 노비는 모조리 왕실의 소유로 넘어간 뒤라 신분만 노비였지 자유로운 사회 활동의 측면에선 양인과 다름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조당은 그 일을 결국 문제로 삼았다.
왕이 벌인 일에 대해 처음 반대가 나온 것이다.
그런 조당의 대신들을 바라보며 광해가 말했다.
“그들과 그대들의 차이가 없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어찌 차이가 없다 하십니까? 저들이 읽고 쓴다하나 언문에 비롯할 뿐이며, 생각이 짧고, 사고가 좁으니 그 여파가 잘못으로 나라에 미칠까 두렵사옵니다.”
영의정의 말에 광해가 말했다.
“그 짧은 생각에도 그들은 누란의 위기에서 고를 위해 창칼을 들고 일어났다. 배움이 많고, 사고 넓어 자신들의 보신에만 급급했던 그대들보다 못한 것이 무엇인가?”
뒤끝작렬이다.
치사하지만 그만큼 치명적이다.
이 말이 나오면 대신들은, 사림은 할 말이 없다.
영의정을 비롯해 조당의 대신들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가운데 광해의 말이 이어졌다.
“고를 위해 창칼을 들었던 이들을 제 몸 보신하는 것에 급급했던 자들이 모략하고 헐뜯는다. 고가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한다 생각하는가?”
답을 할 수 없어 전전긍긍하는 대신들을 향해 광해가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들이 고를 위해 창칼을 들었으니 고도 그들을 위해 창칼을 들어야 하겠지. 그것이 의(義)가 아닌가?”
헛소리 하면 죽이겠다는 소리다.
대번에 목을 움츠리는 대신들의 모습에 광해가 혀를 찼다.
“쯧. 백성을 헐뜯고 모자라다 손가락질하기 전에 그대들이 무엇이 부족한지 알고 배우며 채우라. 적어도 그래야 낯짝 두껍다는 소리는 듣지 않겠는가 그 말이다.”
차가운 광해의 음성에 대신들의 허기가 깊숙이 숙여져 들릴 줄 몰랐다.
“입이 없는가? 답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서,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대신들의 음성이 잘게 떨려나왔다.
조선의 모든 것을 움켜쥔 왕이었다.
작은 명분으로 그것을 조금이나마 뒤집으려던 사림의 시도는 그렇게 참담하게 무너져 끝이 났다.
그날 이후 조당에선 이 일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나오지 않았다.
왕이 공공연히 창칼을 들겠노라 말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괜히 나섰다가 어떤 횡액을 맞을지 몰랐던 것이다.
잠시 말이 나왔던 조당과 달리 백성들은 여전히 조용했다.
백성들 사이에선 이미 신분차별이 구태의연한 것으로 취급받기 시작한 뒤였기 때문이다.
불만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소리는 할 수 없었지만, 표면으로 분출되는 반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울러 조선 백성들 사이에 자신들이 정치에 참여한다는 의식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였다.
이장, 읍장과 달리 그 상위 기관장인 시장과 관찰사는 이전처럼 나라에서 관리를 내려 보냈다.
하지만 행정의 말단은 그렇게 직선제와 간선제가 적절히 혼합되어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
대마도 근해에서 왜군과의 접촉이 빈번했다.
수십 척에서 어쩔 땐 수백 척에 이르는 왜군의 배들이 다가왔다가 조선 수군과 조우하고는 돌아가는 일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초기에는 전투가 벌어지는 일도 종종 있었지만 선두부의 왜선 수십 척이 파괴되면 곧바로 배를 돌려 도주하는 탓에 대규모 결전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도주하는 왜선들을 조선 수군은 따라 잡을 수 없었다.
속도 면에선 확실히 왜군 함선들이 빨랐다.
종래에는 왜군 함대가 조선 수군에 결전을 걸어오지 않는 상황이 계속 되었다.
조선 수군과의 전투를 고의적으로 회피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럼에도 왜군 함대의 침공 시도들이 계속되었다.
아무래도 조선 수군의 틈새를 노리는 모양새였다.
그로인해 조선 수군 경비순찰영 소속 탐망선들의 탐망구역이 넓어지고 피로도가 높았다.
잦은 왜군 함대의 출현에 대마도에 전개되어 있던 충청 수영과 탐라 수영 함선들의 회군이 보류 되었다.
사스나 포구 전투 직후 서해의 경비를 위해 충청 수영의 함선 30척이 회군한 이래 두 수영의 함선들은 대마도 방어에 발이 묶였다.
이것은 상륙한 육군으로 강력한 방어진을 갖춰 왜군의 대마도 역상륙을 저지한다는 애초의 작전 계획과는 어긋난 일이었다.
물론 조선 본토가 아니라 대마도와 그 근해를 전쟁 지역으로 삼아 본토의 피해를 방지한다는 애초의 1단계 작전계획은 성공을 거둔 셈이었지만.
외해에서의 함선 운영을 부담스러워하는 수군으로써도 어쩔 수 없는 상황 전개였던 것이다.
사실 지금도 조선 본토와 대마도를 잇는 보급선 항로에서 거칠고 높은 외해의 파도에 자주 뱃길을 벗어나는 일이 벌어진다.
그로인해 보급선의 도달률은 8할에 불과했다.
기상이 좋지 않은 때엔 아예 배를 띄우지 않음에도 그러했다.
그 8할도 보급선으로 동원된 교역선까지 백분의가 보급된 덕이었다.
백분의의 도움으로 어떻게 하든 다시 찾아오는 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2할은 결국 되돌아가거나 전혀 다른 포구로 향한다.
몇 척은 왜의 수역으로 흘러가 나포되거나 나포직전 자침한 사례도 있었다.
확실히 평저선인 판옥선은 외해의 높은 파도에 취약했다.
그로 인해 군부에서 외해의 거친 파도에 적응성이 좀 더 좋은 침저선을 활용한 전선의 개발이 검토된 적도 있지만 광해가 중단을 지시했다.
범선 개발이 시작된 이상 국력을 흩을 필요가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가을이 짙어가는 9월이 찾아왔다.
이시기 조선에선 거주우선신분법이란 명칭의 법이 왕명으로 공표되었다.
거주우선신분법이란 태생보다 거주 지역을 우선한다는 법이었다.
이법에서 규정한 조선인은 ‘조선인 부모 밑에서 조선 땅에서 태어난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적법한 방법으로 조선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뜻한다’ 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 땅에 적법하게 들어와 살고 있는 모든 인종, 민족이 모두 다 조선인으로 규정되는 최초의 법이었다.
그로 인해 남간도에 살고 있는 여진인들 모두가 조선인으로 인정되는 시점이었다.
거주우선신분법의 반포를 기점으로 전향 여진인. 여진전사 출신이란 표현이 공문서에서 사라졌다.
대신 ‘만주어 가능자’ 또는 ‘남간도 출신’이란 표현이 군에 처음 등장한 시기도 이때였다.
이 법이 반포되어 시행된 지 열흘 만에 백성들의 기본권을 성문법으로 보장하는 백성기본법이 반포되었다.
이법이 반포된 일환으로 백성들의 주거이전 자유가 보장되었다.
물론 주거이전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기존 거주지 관할 관청과 새로 이주한 관할지 관청에 공히 이주 신고를 하여야 했다.
또한 이주를 위해서는 반드시 주거공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조항을 끼워 넣어 무분별한 이주를 막았다.
또한 백성기본법엔 모든 백성이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는 항목이 명문화 되어 있었다.
그것은 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에 맞춰 사법체계가 정비되었다.
각 관아에 남아있던 사법권이 철폐되고 사헌부로 넘어왔다.
한성의 사헌부가 조선 구도의 모든 재판을 담당할 수 없었기에 왕명에 의해 사헌부 관할 각 지방판소(地方判所, 지방법원)가 설치되었다.
사헌부 관리가 파견되는 지방판소는 죄인을 심문하고 죄를 결정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지방판소의 결정에 불복한 이들이 다시 판결을 받아 볼 수 있도록 각 도마다 하나씩 감영이 있는 곳에 도판소를 두었다.
물론 관찰사는 이 도판소의 판결에 관여할 수 없었다.
판소는 무조건 법률에 의거해 판관이 결론을 내리기 되어있었다.
이곳의 결정에도 불복할 경우 한성에 있는 사헌부의 최고판소에 항고할 수 있었으나 여기서도 패소할 경우 도판소의 형량에 1할, 그러니까 10퍼센트를 더한다는 규정이 있어 무분별한 항고를 막았다.
이로써 광해는 조선에 삼심제를 정착시켰다.
법률에 의한 공정한 집행은 결국 공정한 법률에 의한다.
그것을 위해 왕이 주재하고 사헌부가 주도하는 법전의 개정이 완료되어 반포되고 실행되었다.
경국대전 임진판이라 명명된 이 개정 법률은 경국대전을 기본으로 삼되 시대의 변화를 적용하여 상당부분을 개정한 법률이었다.
그 법 안에는 판소의 판관들이 고의적으로 판결을 불공정하게 내렸다는 것이 증명될 경우 판관을 처벌할 수 있는 조항도 들어 있었다.
조선의 치안체계는 포청으로 일원화 되어있었다.
그런 포청의 비리를 방지하고 적법한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어사대가 감찰을 맡았다.
국왕 직속 기관인 어사대는 포청만이 아니라 다른 관부의 감찰도 함께 맡고 있었다.
그렇게 어사대의 상설기구화가 이루어지면서 사헌부의 감찰 기능은 폐지되었다.
사헌부는 판소의 운영과 법률의 관리만을 전담하게 되었다.
대신 사간원을 존치시켜 최고 사정기관인 어사대와 사헌부의 감찰기관으로 삼았다.
그러한 사간원엔 두 기관의 감찰기능 만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기능이었던 언로 기능도 함께 두었다.
왕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특히 사간원의 직언은 과거와 달리 사림의 뜻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여론을 전하게 하였다.
왕의 귀가 사림이 아니라 백성을 향한다는 것을 명문화해서 규정해놓았던 것이다.
그런 사간원에 대한 감찰은 포청이 맡고 있었다.
포청을 어사대가 감찰하고, 어사대는 사간원이 감찰하며, 다시 그 사간원을 포청이 감찰하는 형태였다.
가능한 감찰 기관과 피감찰 기관을 달리하여 서로의 견제가 이루어지도록 만든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왕이 자주 특명어사를 임명, 파견하여 수시로 이곳저곳을 들쑤시는 통에 비리를 알면서도 덮어 두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만에 하나 특명어사의 감찰에서 비리를 알면서도 덮어둔 것이 발견되면 곧바로 국왕에게 보고되었고, 국왕이 직접 국문을 열어 죄의 유무를 따졌다.
이 경우 죄가 인정되면 왕은 관련자의 3족을 멸했다.
그로인해 감히 비리를 알면서 덮는 일은 그렇게 온 가족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 되었다.
광해는 의금부의 역할도 바꾸어 버렸다.
감찰과 형옥의 기능을 폐하고 국가 위기관리 기관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삼정승과 육조판서, 육군 병단장급 이상의 장수들, 수군 수사 이상급 장수들이 모여 회의하는 최고 토의 기관으로 바뀐 의금부는 별도의 권한이 주어진 것은 없다.
오로지 의금부는 왕실로 인한 국가 위기상황, 다시 말해 국왕의 독단과 전횡이 발생했을 때, 또는 왕실 내부의 분란이 혈투로 변질 되었을 때 그 관리를 맡게 되었다.
선조와의 일화를 남기고 자결한 금부도사의 뜻을 이어받은 셈이다.
당연히 죽은 금부도사와 그 휘하 군관들처럼 왕실의 일에 의금부가 관여하여 변경을 초래할 경우 자신들도 목숨을 끊어야 한다는 전통이 생겼다.
압박감이 담길 수밖에 없었다.
왕실의 일에 가볍게 개입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되는 셈이었다.
그래도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현격할 것이다.
광해는 그렇게 의금부에 단독으로 모든 국사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국왕의 폭주를 견제할 수 있는 일종의 브레이크 기능을 맡긴 것이다.
이러한 의금부의 기능 전환에 대해 이항복은 감히 신하들이 왕권을 제한 할 수 있거나 찬탈을 모의할 수 있다며 반대했지만 광해는 그대로 밀어붙였다.
시간이 더 지나면 결국 의원제가 시작되고 권리를 자각한 국민들에 의한 민주주의가 들어올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련의 사항이 백성기본법엔 모조리 성문법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광해1년 10월.
왜군의 함대가 대마도 인근이 아니라 울진 원해에서 발견되었다.
왜의 본토에서 조선으로 곧바로 향한 함대였다.
험한 뱃길을 각오한 극히 이래적인 항로였다. 워낙 거친 파도를 헤치고 와야 하는 뱃길이었기 때문에 조선 측에서도 예상하지 못하던 경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