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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68화 (68/325)

제68화. 한성 시계탑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예수회 일본 순찰사 발리냐노의 만남이 있었던 날로 부터 이틀 후인 6월 14일.

무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던 대마도에선 삐쩍 마른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나머지 병력을 데리고 조선군에 투항해 왔다.

송상현이 그들을 맞았다.

이로써 대마도 정벌이 성공리에 마무리 되었다.

그 소식이 탐망선을 통해 부산포로, 또 한성으로 전해졌다.

*****

발리냐노의 전갈을 받은 예수회의 아시아 본부는 마카오에 있었다.

그곳에서 조선과 일본의 전쟁에 끼어들어도 되는지에 대해 심각한 토론을 벌였다.

사실 실제 역사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선교사 추방령에 맞서 일본순찰사의 병력 파병을 아시아 본부가 거절한다.

일본의 선교사 추방에 대해 더 이상의 관여를 포기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돈이 함께 걸렸다.

여러 나라에서 선교 활동을 하는 조직인 이상 예수회도 막대한 비용을 필요로 했고, 그것을 충당하는데 애로를 겪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결정의 변화를 가져왔다.

물론 이번 결정을 위해서는 전선과 화포의 제공이 전제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한 일들은 로마 예수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에스파냐나 포르투갈의 지원 없이는 이루기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이 사안은 예수회 본부가 있던 로마로 전해졌고, 본부의 결정을 기다리기로 합의되었다.

아시아 본부로부터 해상 사안을 넘겨받은 예수회 본부는 이 사안을 단순히 종교적 시각으로 접근했다.

예수회 자체가 선교를 목적으로 한 조직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 결과 일본이라는 나라의 선교활동을 다시 제대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그들의 요구를 수용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물론 아시아 본부가 특히 강조해 보낸 ‘일본의 막대한 대가’부분이 크게 작용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솔직히 그것이 예수회가 아시아의 전쟁에 끼어든 실질적인 연유였다.

여기서 예상외였던 것은 이 결정 과정에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한 검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그 바탕에는 명에 있던 예수회 관계자들로 부터 올라온 보고가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 조선은 명의 속국으로 아주 작은 나라로 예수회의 접근을 불허하는 미개국으로 표현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회 본부의 결정에 따라 연관을 맺고 있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상단들이 일제히 전선과 화포 조달에 뛰어들었다.

공짜로 달라는 것도 아니고, 교황이 보증하고, 후일 막대한 은으로 되갚겠다는 조건이 걸렸기 때문이다.

이 일을 에스파냐 국왕인 펠리페 2세가 몰랐던 것은 아니다.

사실 이 시기 펠리페 2세는 직계자손의 명맥이 끊긴 포르투갈의 왕위를 계승하여 동군연합(同君聯合)으로 이루어진 이베리아 연합을 통치하고 있었다.

각각의 주권을 가진 두개 이상의 독립국이 한 군주 밑에 있게 되는 것을 뜻하는 동군연합은 국제법상 해당 국가들의 개별 주권을 인정한다.

따라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한 국왕의 지배를 받긴 하지만 각기 다른 주권 국가로써 움직일 수 있었다.

솔직히 조금 이해가 잘 안가는 조합인데 유럽에서는 가끔 일어나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두 국가를 통치하고 있음에도 펠리페 2세의 부채는 막대했다.

선왕에게 물려받은 상당한 빚에서 시작되긴 해지만 그가 다수의 전쟁을 치르며 추가로 막대한 전비를 지출한 결과이기도 했다.

특히 1588년에 치른 잉글랜드와의 칼레 해전에서 패배한 것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지금은 그걸 만회하기 위해 굉장한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어지간하면 아무것도 가리지 않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 펠리페 2세에게 로마 예수회는 상당한 이익금의 배분을 약속했다.

더구나 이 사업에 뛰어든 상인들에게서 일부 채무를 면제받는 조건도 붙었다.

높은 채무에 시달리던 펠리페 2세로써는 외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펠리페 2세가 묵인을 선택했다. 서기1593년 12월 10일의 일이었다.

이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청이 있었던 날로부터 1년6개월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배를 조달하고, 포를 만드는 시간은 또 추가로 필요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기다림이 길어지고 있었다.

*****

펠리페 2세의 묵인이 선언된 직후 시작된 건선 작업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상인의 농간이 끼어들었다.

시일을 줄인다는 명목 하에 폐선(廢船) 직전의 함선들을 수리해 일본에 제공하는 전함들의 수에 포함시킨 것이다.

심각하게 파손된 부분을 대충 수리하고 도색을 마친 재건선들은 외견상 꽤나 깨끗해 보였다.

포는 조선에서 귀국한 에스파냐 기술자들이 만들어낸 조선철포가 실렸다.

함포로 사용하기 적당한 무게로 줄인 새로운 철포를 개발하기 이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일본에 전달될 함선들에 실리는 함포 수에 제한이 생겼다.

지나치게 무거운 조선철포의 무게로 인한 문제였다.

그럼에도 서반아가 생산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철포였기에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펠리페 2세는 여기에 한 가지 수작을 부렸다.

에스파냐가 제작한 철포에 에스파냐 왕국의 문장이 아니라 포르투갈 왕국의 문장을 찍은 것이다.

그러니까 외견상 에스파냐가 아니라 포르투갈의 철포가 수출되는 모양새를 취한 것이다.

눈 가리고 아옹이었지만 그것으로 펠리페 2세가 자신이 이일에 관련되었음을 감추기 위한 방편이었다.

적어도 그가 조선과의 관계를 그 정도쯤은 생각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여하간 그로인해 조선철포가 이역만리 에스파냐에서 다시 일본으로 흘러드는 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 일련의 상황이 진행되는 기간 동안에도 일본의 다이묘들은 자신들의 군대를 온전히 후쿠오카에 보전해 두고 있어야만 했다.

물론 그 비용은 모두 각 다이묘들이 책임졌다.

이와미 은광에서 나오는 대량의 은이 있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것을 지원하지 않았다.

명분은 교역에 필요한 은과 예수회를 통한 전선과 화포의 수입을 위해 비축해 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왜의 교역은 정상적으로 진행 중이었다.

아이러니 한 건 그 대상들 중 가장 큰 교역이 상대가 전쟁 당사자인 조선이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외형적으로는 명나라의 조필 상단과의 교류였지만 왜도 그것이 조선과의 교역임을 모르지 않았다.

더구나 이때는 국왕이 된 광해의 명으로 황이 정상 교역품으로 인정되고 있었기 때문에 교역품 중에는 황도 끼어있었다.

다시 말해 화약의 원료인 황을 왜가 조선으로 수출하고, 무기의 재료가 되는 철이 조선에서 왜로 수출되는 웃긴 교역이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도 대량의 은이 조선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건 이때까지도 조선의 통신사가 후쿠오카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처음 일본 땅에 들어와 거의 2년을 머물고 있는 셈이었다.

하긴 그들은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가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들의 귀환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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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와 유럽에서 일련의 상황들이 벌어지던 시기, 조선은 천지가 개벽할 만큼 막대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그 흐름을 되짚어 보면 이러했다.

정왜전쟁 중 대마도 정벌이 막 완료된 직후인 서기1592년, 광해1년 8월.

조선에선 시간 개혁이 이루어졌다.

12시진 제도가 24시간 제도로 바뀐 것이다.

이 시간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조선 각지에 물시계와 해시계로 이루어진 시탑(時塔)이 세워졌다.

한성엔 여전히 장원이라 불리는 신문물 발명원이 개발한 태엽시계 탑이 건설되었다.

영국이 1859년에 만든 빅벤보다 260여년이나 빠른 1592년에 만들어진 이 시계탑은 사실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다.

태엽시계의 기술을 들여온 것은 사실 광해가 아니라 에스파냐에서 조선 기술을 배워온 한 기술자였다.

그가 태엽시계에 관심을 가져 그 기술을 함께 배워왔던 것이다.

그 기술을 배울 수 있었던 것도 상당한 우연에 근거했다.

같은 조선소에서 근무하던 시계 기술자의 아들을 위험에서 구해준 인연에서 출발했던 것이다.

시계기술에 관심을 보이는 조선인에게 기술을 가르쳐주는 것으로 구함을 받은 청년의 부모가 은혜를 갚았던 것이다.

그로 인해 조선에 처음 태엽시계가 도입되었다.

장원의 기술자들과 심도 있는 토의를 걸쳐 완성된 한성 시계탑은 높이 5장, 그러니까 15미터 정도로 시계의 직경은 3자, 현대도량형으로 90cm 남짓했다.

멀리서 보면 잘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당시대의 조선의 기술로는 가장 크게 대형화 시킬 수 있는 한계였다.

만족할 만한 투명도를 갖춘 유리는 아직 완성되지 못해서 달지 못했기 때문에 비나 눈이 오면 관리직원들이 달려가 사다리를 대고 올라 방수포를 씌워야 했다.

그래서 빛 좋은 개살구란 오명도 써야했지만 한성 백성들에겐 자부심의 하나였다.

흔히 현대초기 ‘너희 동네에 백화점 있어?’와 같은 맥락이라고나 할까.

그런 의미에서 지방에서 올라온 이들이 꼭 들리는 한성의 관광명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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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 조선은 왕명에 의해 관제개혁이 이루어졌다.

복잡했던 조선의 직제는 모조리 사라지고 육조를 중심으로 하는 실질적인 행정부로 조당을 변화시키는 작업이 일련해서 같이 일어났다.

현대시대로 보면 장관과 차관인 판서와 참판은 그대로 두고 이하 각 국, 과가 만들어지고 해당 직제에 국장과 과장 등 현대적인 직함이 대거 도입되었다.

관리의 품계도 정, 종을 나누었던 것을 폐하고 단일 품계로 만들어 9품부터 1품까지 두었다.

명예직은 기존의 관직을 받은 이가 죽을 때까지 존치하되 새로운 명예직은 제수하지 않기로 하여 철폐했다.

당연히 공신전 등 땅으로 주어지는 혜택도 폐기되고 환수되었다.

공신전을 환수당한 이들에겐 해당하는 가치만큼의 통화가 주어졌다.

이후에도 부득불 나라가 개인에게 대가를 주어야 하는 일이 생기면 통화를 기본으로 하는 돈이나 현물을 선물로 주기로 하였다.

직제 변화는 자방으로도 확대되었다.

한성을 왕도(王都)로, 평양을 북도(北都)로 두어 중히 다루었다.

구도(九道) 체계는 유지되었지만 예하 지방관제는 대대적인 개편이 이루어졌다.

주목군현 등으로 대변되던 관제를 손봐 시와 읍, 리로 구성되는 현대 방식으로 변경했다.

당연히 그것을 관장하는 관리체계도 변화가 생겼다.

도를 담당하는 관찰사는 유지되었지만 그 이하 시와 읍, 리에 대해선 시장, 읍장, 이장으로 대변되는 현대적 직제로 변화되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장을 해당 지역 백성들이 직접 뽑았다는 점이다.

날을 정해 18살 이상의 마을 사람들 모두가 모여 논의를 했다.

왕명에 의해 여기엔 남녀의 구별이 없었다.

이 일을 시작하며 광해는 첨예한 반발을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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