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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67화 (67/325)

제67화. 예수회 일본 순찰사

굳어진 표정의 관리가 광해의 물음에 답했다.

“서반아를 오고가며 폭풍이나 사략선을 만나 횡액을 당했거나 병들어 죽은 이들, 서반아의 조선소에서 사고로 죽은 이들, 그리고 대양항해를 나섰다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제외한 수입니다.”

관리의 답에 광해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넷 중 한명만 돌아온 그 참담한 결과 앞에 이들이 겪었어야 할 고초가 눈앞에 보일 듯이 그려졌다.

그런 아비규환으로 저들의 등일 떠민 이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광해 자신이었다.

저들은 자유를 찾기 위해 위험을 감수한 노비도 아니었고, 아내와 아이들을 둔, 먹여 살릴 가족을 두었던 그저 평범한 가장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대부분 돌아오지 못한 채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죽음을 맞은 것이다.

주르르륵.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단 채 광해는 살아 돌아온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잡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광해와 손을 잡은 귀환자들도 쏟아지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눈물을 거둔 광해가 궐로 그들을 들여 정갈한 음식을 먹여 노고를 치하했다.

그곳에서 그들이 겪은 일들과 성과를 직접 그들의 입으로 광해가 들었다.

갤리온 건조기술은 완벽하게 체득했다.

자신들의 기술자를 서둘러 데려오고 싶었던 서반아가 조선 기술자들에게 서둘러 과감하게 기술을 전수하였던 것이다.

설계, 제작, 수리 전반에 걸친 기술을 습득했다는 기술자들의 보고에 그들의 손을 부여잡고 광해는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말도 잘 통하지 않았을 타국 땅에서 그걸 얻기 위해 얼마나 모진 고생을 했을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원들은 대양항해술을 넘어 신세계, 그러니까 아메리카 대륙으로 항해하는 방법을 터득해 왔다.

위험하기 짝이 없어 귀환을 장담할 수 없다는 신세계로 가는 항로에 그들이 투입된 것은 자원에 의한 것이었다.

조선을 위해서 금이 쏟아진다는 신세계로의 뱃길을 어떻게 하든 알아야겠다는 결의가 저들 사이에서 있었단다.

그걸 알아내기 위해 1백인이 모두 신세계 항로에 자원했고, 살아 돌아온 이들이 21명, 그중 다시 7명이 풍토병에 걸려 조선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풍토병이 걸린 2명이 더 있었지만 그들은 배에서 숨을 거뒀다고 보고했다.

귀환자들은 그들의 가족에게 전해줄 유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유품을 안고 광해가 목 놓아 울었다.

다시 궐 안에서 광해와 귀환자들이 통곡을 했다.

그 울음 끝에 돌아온 선원들이 말했다.

신세계로 향하는 뱃길을 안다고. 조선도 신세계로 반드시 진출 하여야 한다고.

자신들이 다시 그 길을 앞장서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죽음이 도사리는 그 길에 다시 나서겠다는 그들의 충정에 광해가 끝없는 감사를 전했다.

귀환자들에게 보름의 휴식이 주어졌다.

가족과 만나 미뤄둔 회포를 풀라 전한 뒤 그들에게 은전을 내려 돌려보냈다.

또한 귀환하지 못한 이들의 가족을 각 관아의 수령들이 직접 찾아가 왕의 위로를 전하고 왕실의 은전을 전달하도록 하였다.

살아 돌아온 이들에게 주어진 은전은 출발 전에 약속된 품삯 외에 일인당 2천만 원이 주어졌다.

죽어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가족에겐 약속된 품삯 외에 5천만 원의 위로금이 전달되었다.

그것은 기준품삯으로 10년을 모아야 할 돈이었다.

또한 가장을 잃은 가족에게는 바라는 이가 있다면 2명을 왕실 소유의 작업장 어디라도 원하는 곳에 취업시켜주는 특전도 주어졌다.

자신들의 가장이 죽었다는 소식에도 오히려 유족은 왕의 은혜에 감사해 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광해가 그날 밤을 온통 울음으로 지새웠다.

다음 날, 무산 제철단지에 머물고 있던 서반아 철포 기술자들과 제철 기술자들의 출국이 허락되었다.

그들은 허락이 떨어진지 나흘 만에 의주를 출발해 천진을 거쳐 귀국길에 올랐다.

광해1년 5월.

본격적으로 제물포 선거에서 대규모 독(dock) 공사가 진행되었다.

한선을 짓던 기존의 선거와는 다른 형태였다.

서반아에서 돌아온 기술자들을 중심으로 독 공사가 연일 이어졌다.

그곳에서 갤리온을 만들어 낼 예정이었다.

시제함이 만들어지면 곧바로 부분 개량이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그걸 위해 제물포에 건설된 선박용 철판 제작소 기술자들과 기존의 철선 기술자들이 서반아에서 돌아온 갤리온 기술자들과 수많은 토의를 진행 중이었다.

광해가 그곳을 찾아 기술자들을 격려하고 함께 토의했다.

이중에는 공(工, H형)자 철강과 철판에 구멍을 뚫어 무게를 줄이는 방법이 중점적으로 들어있었다.

부족해진 내구성은 구(口)자형 철심으로 만들어 내는 것으로 보충하는 안까지 나왔다.

그것들로 개조되는 갤리온의 골격을 삼을 요량이었다.

외피도 나무판을 쓸 곳과 장갑판을 쓸 곳이 정해지고 있었다.

수도 없는 실험에 의해 정리된 철선의 개선 방향들이 그렇게 설계되는 갤리온 개량형 함선에 모조리 적용되고 있었다.

그것은 이 시대, 그 어떤 나라에도 없는 최신기술들 이었다.

일부에서는 유럽에서도 이제 도입단계인 전열함의 설계사상도 도입되었다.

서반아에 있을 때 전열함의 설계 작업에 참여했었다는 한 기술자의 제의로 갤리온보다 큰 전열함의 설계도 함께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게 제물포 선거가 분주하게 돌아갈 때 대마도는 여전히 전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

산속으로 숨어든 고니시와 가토의 병력은 하루하루 투항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굶주림에 지쳐 탈영한 병사들이었다.

이미 언급했던 대로 살아남은 고니시의 병력과 가토의 군대는 대마도의 지리와 자연 생태를 잘 알지 못했다.

애초에 대마도의 토병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쟁에 참여했던 대마도의 병력은 요시토시가 지휘하는 1차 부산포 해전에서 조선 수군에 걸려 대부분이 죽었다.

소수가 살아남았지만 그들도 히타카츠 기습 때 길을 잘 안다는 이유로 선봉을 선 까닭에 대부분이 죽었다.

일부 섬에 남아있던 토병들은 조선군의 상륙초기 이즈하라 포구 포격전에서 모두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당연히 고니시와 가토의 병력은 거의 모두 본토에서 건너온 병력으로 구성되어있었다.

숨어든 대마도 산속의 생활에 적응이 쉽지 않은 이유였다.

생소한 생물과, 식물들로 인해 삶을 연명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던 것이다.

*****

히젠나고야성((肥前名護屋城, 비전명호옥성,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하기 위해 전진지휘소로 세운 성)에 차려진 왜군 지휘부는 조선의 대마도 정벌 사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히타카츠 포구에서 도주한 왜선 2척이 가져온 소식은 대마도에 조선군이 상륙했다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함대에선 일체 정보가 전달되지 않았다.

더구나 도도 다카토라의 단독 행동에 의해 초기 투입 전력이 늘었다.

자그마치 9백 척의 함선과 육군만 2만5천명이 동원된 고니시, 도도의 함대가 실패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고니시와 도도는 물론이고, 대마도의 가토까지 소식이 끊기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무언가 중대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의 명령을 받은 3군의 주장, 구로다 나가사마(黑田長政, 흑전장정)가 수십 척의 탐망선을 풀어 대마도와 조선간의 뱃길을 살피게 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고니시와 도도의 함대를 찾을 수 없고, 대마도엔 조선군이 가득했다는 탐망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이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 구로다의 탐망선들 중 대마도로 지나치게 가까이 접근했던 5척의 탐망선은 해안가에 설치되어 있던 조선군 해안포에 걸려 격침당하기도 했다.

아무리 빠른 왜의 탐망선도 긴 사정거리와 무서운 정확도를 가진 조선군 야포의 포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결과를 받아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격분했다.

곧바로 전군을 소집해 재공격을 가하려던 그에게 기리시탄 선교사가 접근해왔다.

이 시기에 기리시탄 선교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접근한 연유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얼마 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간 우호적으로 대해왔던 기리스탄 선교사들에게 추방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종교와 불교를 중점으로 한 다이묘들의 반발과 기리시탄을 중심으로 한 예수회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한 조처였다.

그것에 따라 일본 땅에서 쫓겨나게 생겼던 기리시탄 선교사들 입장에서는 어떻게 하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마음을 돌려야 했고, 그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것에서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런 기리시탄 선교사의 노력에 의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수하들이 왜 패배했는지 그 이유를 찾게 되었다.

화란이나 포도아의 함선과 비슷한 능력을 갖춘 영길리의 함대가 조선 수군이 갖춘 화포에 걸려 맥을 추지 못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던 것이다.

그것을 기반으로 더 많은 정보를 양이의 상인들을 통해 수집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망연자실 했다.

조선군이 양이마저 놀랄 만큼 뛰어난 화포를 가졌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미처 몰랐던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조선의 화포가 문제라면 이쪽도 화포로 무장하면 된다는 생각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왜는 발전된 화포를 만들어낼 수 없었다.

기껏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블랑기의 일종인 석화시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조선이나 명이 사용하는 것보다 성능이 좋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왜가 포보다는 조총에 중점을 둔 까닭이었다.

오죽하면 조총에 철포(鐵砲)란 이름을 붙였을까.

단시간에 왜가 화포를 확보할 수 있는 길은 조총을 수입했듯이 양이의 상인을 통하는 길 뿐이었다.

그것을 왜를 방문하는 양이 상인들에게 확인하는 과정에서 생각지 못했던 문제가 발견되었다.

왜군의 함선엔 포를 실을 수 없었다.

무게도 문제지만 발사 반동을 배가 잘 견디지 못했다.

석화시조차 그래서 많이 싣지 못한다는 것을 수하 다이묘들에게 설명 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또 다시 분노했다.

그런 그에게 구로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화포를 사들일 수 있다면 배도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태합 전하.”

그 말이 해결책이 되어버렸다.

곧바로 왜에 기항하는 양이 상인들을 상대로 대량의 화포와 전선을 구매하려 했다.

하지만 그걸 가능케 할 수 있는 상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상인들은 그 정도의 거래면 나라가 개입해야할 거라는 말을 했다.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에게 조선 화포에 대해 처음 소식을 가져다주었던 기리시탄 선교사를 불러들였다.

그 선교가 다녀간 후, 예수회 일본순찰사 발리냐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머물고 있던 히젠나고야성을 방문했다.

이것이 서기1592년, 조선에서는 광해1년 6월 12일의 일이었다.

로마 가톨릭의 가장 큰 수도회 중에 하나인 예수회의 이익을 대변하는 발리냐노는 포도아의 이익도 함께 대변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포도아가 서반아와 같은 국왕 밑에 있어 한나라처럼 움직이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 그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화포와 견줄 수 있는 포도아의 화포를 요구했다.

거저 달라는 것도 아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원하는 만큼의 은을 대가로 지급할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거기에 더해 선교사 추방령도 거두어들이겠다는 조건까지 걸었다.

뿐인가 일본이 조선을 점령할 경우 조선에 대한 기리시탄 포교도 허용하겠다고 말했다.

발리냐노에겐 분명 구미가 당기는 일었지만 덥석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퍼지고 있는 조선 화포의 성능에 관한 이야기도 마음에 걸렸고, 에스파냐가 조선 화포의 기술을 습득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잉글랜드의 무장상선들이 실제로 조선 수군에게 걸려 박살이 난 사건도 있었고.

발리냐노는 상부에 상신해 답을 받아보겠다며 물러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의 답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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