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귀향(歸鄕)
요시토시는 대마도에 상륙해 조선군과의 일전을 벌여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대마도주인 그의 입장 상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들은 반대했다.
조선군을 상륙시킨 조선 수군 함대가 해안선을 따라 섬을 돌아 나올 경우 자칫 함대가 발각되어 격파당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조선 수군에 겁을 집어먹은 연유였다. 싸우면 무조건 패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장들은 그런 상황이 되면 완전히 섬에 고립되어 퇴각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된다는 이유를 들었다.
양쪽의 의견에 휘말려 고심하는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요시토시가 다급히 물었다.
“조선군이 상륙했다면 마리아는요! 마리아는 어찌 합니까?”
고니시 마리아.
기리시탄(キリシタン, 천주교도)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자신의 딸에게 붙인 이름이다.
하긴 고니시 유키나가 자신도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사위이기도 한 요시토시의 물음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흔들렸다.
그런 그에게 요시토시의 주장이 이어졌다.
“가토가 아무리 능력이 없어도 한방에 밀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버티고 있을 그를 우리가 상륙하여 지원한다면 분명 조선군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그 말에 갈등하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결정이 떨어졌다.
곧바로 타고 있던 육군에 상륙이 명령된 것이다.
수군은 그대로 배들을 지키도록 했다.
현재 고니시 유키나가의 함대에 남아있던 육군의 수는 1만.
애초에 2만의 병력을 태우고 출발했지만 요시토시의 지휘 하에 벌어진 1차 부산포 해전에서 1만의 왜 육군이 조선 땅에 발 한번 붙여보지 못한 채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 1만의 왜 육군이 모조리 사스나 포구에 상륙했다.
*****
섬 뒤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한 송상현은 병사들을 부려 이즈하라와 히타카츠 일대에 포 진지(陣地)와 소총 진지를 쌓았다.
대부분의 진지는 해안가를 향하고 있었다.
탈환을 목적으로 상륙을 시도할지 모를 왜군을 상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에 반해 섬 안쪽으로는 단지 몇 개의 진지만을 쌓았을 뿐이다.
산속으로 가토 기요마사와 일부 왜군이 도주했다지만 크게 위협이 되진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 송상현에게 정발은 병력을 직접 산속으로 들여보내 토벌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리를 모르는 적지에서 굳이 위험한 산악전을 전개할 필요가 없다는 송상현의 판단 때문이었다.
더구나 적은 창칼에 능한 살수, 이쪽은 총병.
산림이 우거진 산속에선 총이 불리했다. 사격에 걸림돌이 많았기 때문이다.
다른 장수들도 대부분 송상현의 결정을 지지하는 터라 정발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송상현이 몇 개의 진지만 쌓고 후방을 방치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대의 마을들을 정렴해 나가며 그곳에 사는 대마도인들을 부려 마을마다 목책을 둘러쳤다.
그리고 그 목책을 조선군이 지켰다.
마을에 있는 식량이 산속으로 숨어든 왜군에게 전해지지 않게 하려는 조처였다.
대마도인들은 예상외로 순순하게 조선군의 명령에 따랐다.
물론 초기에 포로 주제에 강하게 반발하는 일부 무사들을 본보기 삼아 참수해 목을 장대에 내걸기는 했다.
하지만 그 반작용으로 보기엔 과할 정도로 고분고분했던 것이다.
그것에 대해 왜와의 교역에 다년간 참여했던 교역선의 한 선장이 한 말이 송상현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왜인들은 지배자의 명에 순응하도록 길들여져 있습니다. 자칫 영주나 무사들의 명을 어기는 일이 벌어지면 죽음을 당하는 이들의 생활상으로 비추어 반발은 생각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외국의 침략에 저리 무력하게 순응한단 말이오?”
굳이 강토를 침입한 몽골에 맞서 온 나라가 합심해 수십 년을 싸운 고려를 거론하지 않아도 조선 사람들은 수차례의 자잘한 외침에 모든 민관군이 힘을 합해 싸웠다.
관이 무너지고, 군이 퇴각해도 민이 일어나 의병을 만들어 저항을 지속했던 조선인의 생각으로는 전혀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 송상현의 물음에 선장이 답했다.
“왜가 한나라라고는 하나 그 안에 수도 없는 나라가 있어 같은 나라의 백성이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안위가 보장받는다면 새로 정복한 군주의 명에 순응하는 것이 몸에 배어있는 것입죠. 원채 전쟁이 빈번하고 군주가 바뀌는 일이 많으니 저들만 욕할 것도 아닙니다요, 나리.”
선장의 말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송상현은 수긍했다.
오랜 시간 지켜본 이가 그렇다는데 이제 처음 저들을 접한 자신이 왈가불가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대마도 정벌이 성공적으로 진행 중이라는 전갈이 부산포의 정왜 사령부에 도달한 것은 4월 20일 오전이었다.
풍랑이 가라앉자 다시 구성된 경비순찰영의 탐망선들이 이즈하라 포구까지 진출해서 송상현의 대마도 전단과 연결한 것이다.
이틀을 노심초사하며 기다렸던 광해와 고위 장수들이 수척해진 얼굴로 환호성을 질렀다.
근해 작전용인 평저선으로 외해 항해를 동반하는 상륙작전을 펼친 데다 갑작스런 풍랑까지 만난 탓에 크게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완전한 상륙은 아니라서 다소 아쉽기는 했으나 삼분지 이가 넘게 제대로 도착했다니 사령부의 예상보다는 나은 결과였다.
흩어진 이들에 대한 수색은 경비순찰영의 탐망선들이 진행 중이었다.
이미 몇몇은 부산포로 돌아오거나 탐라로 흘러가 정박했다는 소식도 들어왔다.
그런 이들은 더 늘어날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돌아오길 정왜 사령부는 바랐다.
정왜 사령부의 노고를 치하하고, 대마도 전단에 승리를 축하한다는 전갈을 보낸 광해가 비로소 다시 한성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광해가 한성으로 돌아간 그 시간, 대마도 전단은 한창 전투 중이었다.
사스나로 상륙한 고니시의 부대가 산을 넘어 히타카츠에 주둔 중이던 조선군 후방을 습격한 것이다.
후방에 조성된 몇 개의 포진지에서 야포를 쏘고 소총병들이 다섯 곳도 안 되는 소총진지에서 사격을 가했으나 뒤를 들이친 왜군의 수가 너무 많았다.
놀란 정발이 곧바로 포구에 진을 치고 대기하던 병력들로 대응에 나섰지만 후방 언덕에 마련해둔 포 진지와 소총 진지가 왜군의 손에 넘어갔다.
야포를 확보한 왜군이 그것으로 조선군에 포격을 가했다.
야포의 포격술을 제대로 모를 왜군들이 포를 쏜다는 것은 포로로 잡힌 조선군 병사가 방법을 알려주었다는 뜻이다.
그 난감한 상황이 히타카츠 포구를 비롯한 조선군 밀집지역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아군의 산탄포탄에 조선군이 무더기로 죽어나갔다.
해안에 설치되어 있던 야포들을 일부 돌려 왜군의 포탄 세례를 받으면서도 전진 배치해 맞섰다.
양측이 그렇게 포탄을 주고받길 얼마, 드디어 보다 많은 수의 야포를 동원한 조선군이 왜군이 장악하고 있던 포진지를 제압했다.
수군에게 조달받은 화염포탄으로 연이어 사격한 덕이었다.
곧바로 정발이 칼을 뽑아들고 달렸고, 그 뒤를 수천의 조선군이 쫓아 돌진했다.
전투개시 2시진 만에 후방언덕을 조선군이 탈환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는 곧바로 산을 타고 도주했다.
조선군의 피해는 2천5백, 왜군의 피해는 4백에 불과했다.
언덕에서 쏘아진 야포의 산탄포탄에 의한 피해와 돌격 이후에 벌어진 백병전에서 왜군의 단병접전에 휘말려 죽어간 병사들의 희생이 컸기 때문이었다.
히타카츠의 소식이 이즈하라에 도달한 것은 그날 늦은 오후였다.
연락선 편으로 소식을 받은 송상현은 곧바로 후방지역에 대한 방어를 강화했다.
하지만 이즈하라 포구 뒤편의 산으로 도주한 가토의 부대는 산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들이 고니시의 부대와 합류한 것은 이틀이 더 지난 22일경이었다.
고니시의 부대에도 대마도 출신 병사들의 수가 적었기 때문이다.
요시토시가 1차 부산포 해전에서 대마도 병사들 대부분을 말아먹은 탓이었다.
*****
송상현과 정발은 섬 뒤편으로 탐망선을 보내 고니시 유키나가의 함대를 확인했다.
곧바로 배들을 모았다.
양측이 모은 전선의 수는 장갑귀선 37척과 판옥전선 74척이었다.
애초에 부산포를 출발했던 충청 수영과 탐라 수영이 보유했던 전선수에서 장갑귀선은 13척, 판옥전선은 26척이 이탈한 규모였다.
그 함대가 해안선을 따라 항진하여 23일 미시(未時, 오후 1~3시)에 사스나 포구에 도착했다.
놀란 왜군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가운데 조선 수군의 함포사격이 시작되었다.
섬의 그늘을 이용해 조용히 접근한 조선 수군을 왜군들이 늦게 발견한 까닭에 곧바로 포격전에 휘말린 것이다.
최대 사거리인 2천보에서부터 차례차례 퍼부으며 접근한 조선 수군을 피해 왜 수군들이 모두 배를 버리고 상륙해 도주해버렸다.
유효사거리 밖에서 사격이 시작된 탓에 다수의 화염포탄들이 왜선의 선체를 뚫지 못하고 헛되이 바다에 빠졌음에도 그랬다.
물론 수십 발이 왜선 상갑판에 떨어져 폭발하긴 했다.
하지만 그것도 전체적인 왜선의 규모에 비하면 몇몇 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왜군들은 혼비백산하여 배를 버리고 도주했다.
왜군들이 얼마나 조선 수군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아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배후를 장악한 조선 수군이 야포로 사스나 포구에 들어선 모든 왜선을 포격하여 불태웠다.
이후 조선 수군은 탐망선을 대마도 곳곳에 보내 왜군 함선이 다가서는 것을 감시했다.
고니시와 가토의 왜군이 대마도 산속에 갇혀 고립되었다.
*****
광해1년 4월 25일.
지난 선조 20년에 서반아로 떠났던 조선 기술자들과 선원들이 돌아왔다.
의주를 떠난 지 해수로는 5년, 만으로는 4년 8개월 만이었다.
계획보다 훨씬 빠른 귀환이었다.
애초에 그들을 보낼 땐 7년을 계획하고 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계획보다 이른 귀환은 사실 서반아가 서둔데 따른 것이다.
그들은 조선에 맡겨둔 자신들의 기술자를 하루라도 빨리 데려가고 싶어 했다.
선조21년, 그러니까 서기 1588년에 벌어진 칼레 해전의 패배로 에스파냐가 잉글랜드에게 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은 자국의 기술자들이 제대로 기술을 배워서 돌아오지 않는 이상, 에스파냐의 철포기술자들과 제철기술자들을 돌려보낼 수 없다는 뜻을 보였다.
그것이 에스파냐로 하여금 조선인 기술자들에 대한 조기 귀국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여하간 고생한 이들이 돌아온 일이었다.
왕이 직접 궁 밖까지 나아가 돌아오는 이들을 맞았다.
한데······.
수가 달랐다.
출발할 때 인원은 조선 기술자 1백, 선원 1백 도합 2백 명이었다.
하지만 귀환자라며 서 있는 이들의 수는 아무리 많이 쳐줘도 50명을 넘지 않았다.
의아해 하는 광해에게 제물포에서 먼저 그들을 맞이했던 관리가 보고했다.
“조선 기술자들 중에서는 32명, 선원들은 12명이 귀환하였습니다.”
“나머지는?”
광해의 물음에 관리의 표정이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