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경인옥사(庚寅獄事)
“십할입니다.”
틀릴 리 없는 정보란 뜻이다.
그 답에 무언가를 말하려던 이산해에 앞서 성혼이 입을 열었다.
“불가한 일입니다. 자고로 일어나지 않은 일을 방비할 땐 여럿이 둘러보고 확인하고, 그리고 나서도 다시 의견을 나누어 결정해도 실수가 나는 법입니다.”
“다수의 인원이 수많은 정보를 취합하고 내린 결론입니다.”
광해군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실제 역사에만 기대어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간 왜와의 철 교역과 황을 대상으로 한 밀무역을 진행하며 상당수의 사람들이 왜를 살피고 내린 결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광해군의 말에도 성혼은 단호한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타인의 입을 통해 전해진 것만으로 무엇을 결정한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한 일이지요. 더구나 전쟁인 것을. 불가합니다.”
단호한 성혼의 말에 이산해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한마디로 자신의 동의를 얻기 전에 성혼부터 설득하라는 뜻이었다.
그걸 알아들은 광해군이 성혼을 바라봤다.
“만에 하나 그러다 늦으면요.”
“늦어도, 오판으로 일어나지 않을 전쟁을 벌이는 것보다는 나을겝니다.”
“대응이 늦으면 전쟁으로 입는 피해가 한없이 클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반드시 전쟁이 일어난다는 가정이 아닙니까? 일어나지 않으면요? 괜한 일로 백성을 곤궁하게하고 나라의 재물을 소진시키는 일이될 겁니다. 그건 어찌 감당하려 하십니까?”
“돈이 필요하다면 내가 댈 것입니다. 백성들의 곤궁은 노임으로 대신하면...”
“나라의 일입니다. 군 마마의 재력이 크다 하나 어찌 그것을 일개 왕자의 일에 맡기라 하십니까? 주상 전하께서도 가납치 않을 일이십니다.”
“하면 전하를 설득하면 따르시겠습니까?”
“전하의 전교가 내려진다면야 신하 된 도리로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나 그 전교도 역시 조당의 논의를 거치지 않고서는 내려질 수 없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광해군의 이야기 몇 마디로는 결정을 할 수 없다고 버티겠다는 뜻이다.
기껏 온건파라 해서 데려다 놓았더니 광해군의 발목을 잡는 셈이다.
서인들을 움직일 사람으로 성혼을 택한 것이 큰 오판이 되어버렸다.
이후로도 여러 가지 말들로 광해군이 설득했지만 성혼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광해군은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이 이산해와 성혼을 돌려보내야만 했다.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광해군은 전라우수영의 이순신과 철산의 김수에게 서신을 보내 만일에 대비하라는 전갈을 보냈다.
아울러 완성되어 장원의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던 야포와 폭발탄을 보내 제물포 선거에서 완성한 장갑귀선들을 무장시키라는 명을 내렸다.
이순신이 광해군의 서신을 받고 한사람을 추천해 보냈다.
전라우수영에 있다 은퇴한 장수로 정걸이란 자였다.
그는 경상우수영과 전라우수영에서 수군절도사를 맡았던 노장이었다.
이순신이 보낸 추천서엔 자신과 함께 포함 전술 등을 연구하여 발전시킨 장수 중 한명이라는 설명이 딸려있었다.
그를 제물포의 해사학당으로 보내 무장한 장갑귀선들로 함대를 구성하고 실전 훈련을 빈틈없이 치르도록 당부했다.
현재까지 제물포 선거에서 만들어진 장갑귀선의 수는 80척이었다.
목표였던 1백 척엔 아직 20여척이 모자랐다.
*****
선조23년 6월, 왜인 승려 겐소(玄蘇, 현소)와 대마도주의 가신 야나가와(柳川調信, 류천조신)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소서행장)의 사신인 시마이(島井宗室, 도정종실)를 일본국왕의 사신이라 사칭하며 다시 부산포에 도착해 임금의 알현을 청했다.
이 또한 실제역사보다 1년이나 늦은 전개였다.
철물전을 통한 조선과의 교역이 왜가 움직이는데 어떠한 영향을 주었던 것이 분명했다.
물론 왜의 상황을 살펴보면 임진왜란을 향해 달려가는 시계는 그대로 흘러가고 있는 듯 했지만 말이다.
선조는 대마도주의 사신 때와 달리 옛 관례에 따라 움직였다.
명분이 왜왕의 사신이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조당의 논의를 거쳐 이조정랑이었던 이덕형을 선위사로 삼아 부산포로 보냈다.
하지만 그들도 통신사에 대한 답은 듣지 못하고 돌아갔다.
여전히 그들이 가져온 국서가 오만방자했고, 바라는 것이 조선의 생각과 달랐기 때문이다.
이쯤이면 왜의 상황을 살피고, 그에 따라 대응책을 구할 법도 하건만 조당도, 선조도 그저 모리배라 왜를 탓하고, 못마땅해 할 뿐이었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광해군이 선조와의 독대를 청했다.
왕이 도승지를 보내 독대를 청한 연유를 물었다.
광해군은 군제와 왜에 관한 이야기를 청할 것이라 답하여 보냈다.
불허가 내려올까 노심초사 하는 가운데 광해군의 요청은 수락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독대는 아니었다.
도승지가 배석하고 무장한 오위도총관까지 동석한 자리였다.
어차피 독대를 청한 일이 군제와 왜에 관한 일이라는 언질을 주었던 까닭에 그들의 배석을 광해군은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광해군은 왜의 전쟁 준비 상황을 전하고, 그에 대한 대응과 대비가 하루속히 이루어져야 함을 역설했다.
아울러 그를 위해 다시금 군제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간곡히 청하였다.
하지만 선조는 평화로운 시기에 백성들에게 불안을 조성한다며 광해군을 책망했다.
단순히 장사치 몇몇의 호들갑에 일국의 왕자가 부화뇌동하여 나라를 흔들려 한다며 호통도 들었다.
아울러 왕실의 위엄을 더 크게 세우기 위해 궐을 중건하는 이때에 왕자가 나서 불필요한 논쟁을 일으켜 오히려 왕실의 체통을 깎아 내리는 행동을 하려 한다며 경고망동하지 말라는 경고도 받았다.
왕의 침전을 물러나오는 광해군의 표정이 실망으로 가득했다.
일전에 제물포에서 만난 정걸의 말에 의하면 조선 수군은 실제역사와 다를 바 없이 제대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나마 이순신이 머물고 있던 전라우수영만이 전선을 준비하고, 군적을 정리하여 병사를 모아 훈련을 완비했을 뿐이라 답했다.
또한 전라병마절도사를 엮임 했던 정걸은 육군도 수군들과 사정이 다를 바가 없다고 전해 광해군의 걱정을 깊게 만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군제조차 손을 대지 않으면 방비가 어려웠다.
하물며 아쉬운 대로 수군의 확대만이라도 추진하려던 광해군의 주청도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명과의 교역을 제외한 해금령이 살아있는데 굳이 수군을 늘일 이유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리되면 결국 믿을 것은 무산에 마련해둔 철산 예비군뿐이었다.
하긴 임진년을 대비해 여진을 활용해 거짓 준동까지 벌이며 만들어 둔 철산 예비군이긴 했다.
하지만 광해군의 계획에 그들은 반격 전력이었다.
조선이 제대로 무장되어야만 제 기능을 발휘할 전력이라는 소리다.
사실 광해군은 제대로 준비된 조선군이 초반에 왜군을 상륙지점에서 막아내고, 철산 예비군을 불러내려 반격을 가해 몰아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전란이나 터져야 철산 예비군을 조선의 영토로 불러들일 수 있을 것이 분명했기에 세워진 작전이었다.
그전에 철산 예비군을 조선 영토로 불러들이면 의심 많은 선조는 둘째 치고, 여진에 뿌리 깊은 불안감을 갖고 있는 조당의 대소신료들조차 그냥 있지 않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광해군이 세울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군제개혁도 하지 못했고, 조선군을 방비시키지도 못하게 되었으며 대대적인 수군의 증강도 물 건너갔다.
개전초기 조선군이 왜군에게 상륙거점을 빼앗기는 것은 바꿀 수 없게 되었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그 직후라도 철산예비군을 최단시간에 움직여 왜와의 전쟁에 투입할 계획을 세워야 했다.
그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빠른 이동이었다.
지상군을 빠르게 이동시키기 위해서 도로는 필수였다.
그것을 위해 무산에서 부산포까지 도로를 놓자는 제의를 선조와 조당에 넣었지만 단호한 거절만 돌아왔다.
여전히 여진을 비롯한 북방 기마민족에 대해 불안감을 깊게 가지고 있던 선조와 조당은 도로의 확충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특히 선조의 거부가 강경했다.
왕은 도로의 확충을 음험하고 위험한 일이라고까지 말하며 거부했다.
그 상황에서 광해군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결국 육로의 활용을 포기한 광해군은 철산단지의 김수에게 서신을 전해 의주에서 배를 타고 부산포로 병력을 전개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라고 명했다.
김억수에게는 조선과 명의 교역에 투입되고 있는 교역선들을 유사시 의주로 보내 철산 예비군을 실어 나를 수 있도록 대책을 수립해 두라고 지시했다.
유사시 도로가 미비한 상태에서 무산의 철산 예비군을 부산포까지 이동시키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을 걱정한 광해군의 고육지책이었다.
아울러 광해군이 이순신에게 비밀리에 자금을 보내 전라우수영의 판옥전선을 30척으로 늘였다.
수군의 확대를 선조가 반대한 시점이었기에 그것이 최선이었다. 더구나 그 모든 일들은 드러내놓고 할 수도 없었다.
오죽하면 그렇게 늘어난 전라우수영의 판옥전선들을 무장시키기 위해 장원에서 야포를 반출하는 것도 야밤에 몰래 이루어졌다.
선조의 눈을 피해 벌리는 일이었기 때문에 마치 살얼음 위를 걷는 느낌이었다.
그러던 선조23년 9월, 느닷없이 이순신에게 전라좌수사가 제수되었다.
같은 날, 최만덕이라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장수가 그동안 이순신이 맡고 있던 전라우수영의 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광해군은 곧바로 전라우수영의 판옥전선들을 전라좌수영으로 보낼 수 있는지 알아봤지만 거부되었다.
군선들은 관할권을 넘어 함부로 옮길 수 없다는 것이 그 연유였다.
광해군으로써는 선조가 수군 증강을 반대한 탓에 제물포의 장갑귀선들을 전라우수영으로 보낼 수 없었던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같은 달 말일, 왜인 승려 현소를 단장으로 하는 일왕의 사신단이 다시 부산포에 닿았다.
조당에선 다시금 소란이 일었고, 선위사를 맡은 이덕형이 그들을 맞아 부산포로 내려갔다.
*****
선조23년 10월.
경인옥사가 터졌다.
실제역사에서는 기축옥사라 기록된 사건이 1년이 늦은 경인년에 터진 것이다.
이른바 정여립 모반사건.
바쁘다 보니 광해군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서둘러 광해군이 도래당시 적어놓은 정보에서 정여립 모반사건이라 적혀있는 내용을 찾았다.
그 정보 아래 적힌 내용들을 살펴보며 아득한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 이걸 잊고 있었는지 광해군은 스스로도 믿기 어려웠다.
조당 전체가 휘말렸다.
성리학을 버리고 실학을 중시한 결과라는 성토가 세력을 잃은 채 지방으로 밀려났던 훈구세력으로부터 튀어나왔다.
절제와 겸양을 버리고 축재와 과욕을 부린 대가로 군신의 도리가 무너져 역모가 벌어졌다는 그들의 논리에 선조가 움직였다.
여전히 술독에 빠져있던 정철이 가장 먼저 끌려갔다.
정여립의 도당들과 술자리를 가졌다는 이유였다.
실제역사에서는 동인이 곤혹을 치르고 정철이 속한 서인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는 것인데 상황이 변했다.
선조의 날카로운 눈초리 아래 정철을 비롯한 서인의 거두들이 연이어 잡혀 들어갔다.
모두가 함께 술자리를 했다는 이유였다.
동인들 속에서도 희생자가 나왔다.
정여립 자체가 동인에 가까웠다는 것엔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와 나름의 접점을 갖고 있던 이발, 이호, 백유양 등 동인들이 국문장에 끌려와 모진 고문을 받았다.
서인과 동인이 모두 움츠러들었다.
그 모든 국문을 선조가 갑자기 판중추부사에 임명한 최목중이 주도했다.
난데없는 최목중의 부상에 광해군의 위기의식이 높아졌다.
광해군이 서신을 써 알지를 통해 김억수에게 전했다.
서신의 내용은 간단했다.
<상황이 명확해 지기 까지 피신해 있을 것.>
광해군의 서신을 받은 김억수가 몸을 피하기 전에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최목중의 행사가 거칠게 이어졌다.
그런 그를 밀어올린 것은 지방에 칩거하던 훈구 인사들이었다.
돈 맛에 들려 실학 쪽으로 기울었던 사림의 조정 주요 대소신료들이 일제히 몸을 사리고 움츠러들었다.
절제와 겸양을 미덕으로 삼는 성리학의 본류로 돌아가야 한다는 훈구파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최목중의 칼은 선조의 묵인 하에 사납게 휘둘렸다.
그렇게 날아간 벼슬자리에 지방으로 내쫓겼던 훈구 인사들이 하나 둘, 기용되어 조당으로 들어왔다.
사화의 와중이었다.
사림은 동인과 서인을 가리지 않고 선조와 최목중의 눈치를 볼뿐, 나서서 그걸 막지 못했다.
*****
대전에 선조가 최목중과 마주 앉았다.
“훈구의 대신들이 널 중용하라 청해 앞에 세웠다. 고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 것이다.”
“소신, 전하의 깊은 뜻을 헤아려 따르고 있나이다.”
“좋은 일이다. 모두가 간악한 자의 재물에 끌려 군왕을 욕보였으니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나이다.”
바짝 엎드리는 최목중에게 선조가 물었다.
“하면 이제 어찌할 생각이더냐?”
그 물음에 최목중이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