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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51화 (51/325)

제51화. 아! 상국(上國)!

선조21년 11월부터 제1거주구역 여진인들 중 원하는 이들 10만을 모집해 철산 제철단지에 투입했다.

너나할 것 없이 철산잔지에서 일하기를 원하는 바람에 제비뽑기를 해야만 했다.

그렇게 모여든 것은 배후단지에 사는 여진인들의 생활이 굉장히 발전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식량의 풍족함을 넘어 비단과 은제 장신구를 사용하고 있을 정도였다.

삶이 풍족해지자 모옥형태의 집을 조금 더 살기 좋은 형태로 바꾸길 원하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광해군이 몇몇 일꾼들과 함께 제철과정에 쓰기위해 채굴해온 석회석을 이용해 초보적인 시멘트를 만들었다.

그에 더해 구운 벽돌과 기와를 생산하는 설비를 갖추고 본격적으로 벽돌과 기와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 세 가지에 철물전 철산 지부가 팔기시작한 자기편(타일)을 활용해 몇 가지 형태의 집을 지었다.

여진인들과 조선인들이 따라짓기 쉽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종래엔 솜씨가 좋은 조선인과 여진인을 섞어 건설단을 만들었다.

그들을 중심으로 배후단지의 집들이 빠른 속도로 벽돌기와집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주변 여진인들이 철산 배후단지의 여진인들의 생활을 부러워하여 모여드는 것과 같이, 무산 인근의 조선인들도 자신들보다 나아보이는 배후단지의 생활여건을 보며 제철단지 인근으로 모여드는 일이 발생했다.

처음엔 배고프고 갈 곳 없는 이들이 움막을 짓고 생활하기 시작했다.

수십 호에서 시작된 일이 이내 수백 호를 넘어섰다.

그들을 위해 광해군이 제철단지 인근에 땅을 고르고, 건설단을 보내 집을 지었다.

그 일에 그렇게 모여든 조선인들을 고용해 일을 시켰다.

나중엔 그렇게 완성된 집에 그 조선인들을 수용했다.

그리고 그곳에 제2거주구역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조선인 거주구역라는 이름을 붙이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광해군은 단호히 거부했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철산 단지에서는 조선과 여진 두 단어를 사용해 구별 짓는 행위를 금지시켰다.

그렇게 제2거주구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에겐 조건이 붙었다.

철산 단지에서 일을 할 것, 여진인들과 우애 있게 지낼 것.

갈 곳 없고, 당장 끼니 때우는 것이 어려웠던 조선인들은 그 두 조건을 두 말 없이 받아들였다.

품삯은 기존의 조선인이나 여진인과 동일하게 지급되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감지덕지했다.

하루 한 끼 먹고 살기도 어려웠던 이들이 배부르게 삼시 세끼 다 챙겨먹는 생활을 영위했다.

살이 뽀얗게 올라, 여기저기서 까르르 거리며 몰려다니는 아이들의 수가 늘었다.

할일 없이 몰려다니며 노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광해군이 언문을 아는 이들을 추려 제2거주구역에 작은 학당을 세웠다.

향후 조선 팔도에 한글을 대중화 시키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철산학당의 시작이었다.

기왕 시작하는 거 조선시대의 언문이 아니라 현대시대의 한글을 가르쳤다.

초기 훈장을 맡을 이들을 광해군이 가르쳤다.

이미 언문을 알고 있던 이들을 골라 뽑은 까닭에 습득이 빨랐다.

그렇게 광해군에게서 현대식 한글을 배운 이들이 다시 아이들을 가르쳤다.

글을 배운 아이들이 집에 가서 그걸 자랑하며 몇 글자씩 써 보였지만 알아보는 부모가 드물었다.

그것이 부끄러웠던가. 미적미적 철산학당을 기웃거리는 이들이 늘었다.

그들의 뜻이 글을 배우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광해군이 만학도(晩學徒)들을 위해 야간 교습을 열었다.

고된 일을 끝낸 후이니 쉬고 싶을 만도 하건만 조선인 수천 명이 참여했다.

종래엔 여진인들까지 한글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통에 철산학당을 배후단지는 물론이고, 제1거주지로까지 확대했다.

다만 그 두 그곳에선 광해군의 명으로 만주어와 한글을 모두 가르쳤다.

이당시만 해도 만주어엔 글자가 없었다.

자신들의 말을 기록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하긴 만주어는 지금 부족들을 통합하느라 분주한 누르하치가 1599년에 몽골문자를 차음하여 쓰기 시작하면서 자리를 잡았고, 이후 1632년에 한차례 또 발전한다.

지금은 그 전이라 문자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광해군은 만주어를 한글로 쓰게 만들었다.

음을 따라 쓰는 것으로는 세상 거의 모든 나라의 말을 기록할 수 있는 게 한글이었으니까.

같은 글자로 다른 말을 쓸 수 있는 한글을 여진인들이 굉장히 신기해했다.

그런 여진인들이 다니는 학당엔 여지없이 ‘뿌리를 잃어버리면 지금의 나조차도 없다’란 교훈이 걸렸다.

그것을 여진족 부족장들과 제사장들이 기꺼워했다.

철산학당에 아이들을 보내는 것을 족장들과 제사장들이 권하기 시작했던 것도 그런 조처에 힘을 받은 것이었다.

배움의 열풍이 철산단지를 휩쓸었다.

나이가 많고, 적고, 여자고, 남자이고를 가리지 않고 배워야 한다는 생각들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조선 팔도 그 어디보다 큰 야공별당이 들어선 곳도 철산단지였고, 천명이 한 번에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철산학당이 6곳이나 들어서 있는 곳도 철산단지뿐이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던 12월, 두툼한 솜옷으로 단단히 무장한 일꾼들이 철광과 탄광을 향해 일을 떠나는 모습이 철산단지의 아침을 가득 채웠다.

*****

선조21년 12월 20일.

벤투 자작을 위시한 5명의 영길리 사절단이 공식적으로 조선을 방문했다.

엘리자베스 1세 영국 여왕의 친서를 영문으로 쓰인 원본과 한자로 쓰인 번역본까지 준비해 찾아온 영길리의 사절단은 예상외로 단정하고 공손했다.

칼레 해전에서 서반아의 무적함대를 완파한 직후라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영길리의 사신이 보이는 행보로는 정말 의외였다.

그들의 단장은 벤투 자작이 아니었다.

여왕의 친서를 가지고 본국에서 직접 온 에덤스 백작이 단장을 맡고 있었다.

영길리의 외무부 부대신이라는 애덤스 백작은 지난 정해양변이 양측의 오해에서 비롯된 충돌이며 그 오해의 단초가 영길리 측에 있었음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오만한 유럽식 외교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그들이 조선이란 나라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영길리의 사절단은 또한 조선과 영길리의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정해양변에서 포로로 잡힌 30명의 영길리 군인을 돌려주길 원했다.

광해군이 철산단지에 세운 철산외역원에서 키워낸 조선인 역관의 통역으로 사절단장인 에덤스 백작의 요청을 전해들은 선조는 두 가지는 허락하고, 한 가지는 거부했다.

허락한 것은 영길리의 사과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또, 정해양변에서 포로가 된 영길리 군인 30명의 석방도 허락했다.

하지만 영길리와의 외교관계 수립은 거부했다.

상국인 명의 허락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타국의 사신 앞에서 다른 나라의 허락이 없어 외교관계를 수립할 수 없다고 당당히 말하는 선조의 모습에 광해군은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역관을 통해 그 말을 전해 듣고선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에덤스 백작과 영길리 사신들을 보며 광해군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외교관계의 수립을 거절했으나 선조는 그들에게 가볍게 연회를 열어주는 성의를 보였다.

물론 매우 잠깐 참석하고 돌아가 버렸지만.

결국 그들에 대한 접대는 무산에서 역관과 급히 귀환했던 광해군이 맡았다.

그런 광해군에게 에덤스 백작이 물었다.

“조선이 그리 작은 나라입니까?”

“과거의 예입니다. 곧 바뀌겠지요.”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는 에덤스 백작의 귀에 벤투 자작이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에덤스 백작이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광해군을 바라보며 물었다.

“곧 명나라 황제 폐하의 매부가 되신다고요?”

“아하하하.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어색하게 웃는 광해군에게 무언가를 생각하던 에덤스 백작이 물었다.

“결정이 되지 않은 일이라면······. 그럼 저희 공주님과의 혼례는 어떻겠습니까?”

에덤스 백작의 제의에 놀란 광해군은 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에덤스 백작은 아쉬운 표정으로 한성을 떠나 무산으로 향했다.

그가 철산 제철단지를 구경하길 원했고, 선조의 동의를 받은 광해군이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영길리의 사신인 에덤스 백작이 무산 제철단지를 보길 원했던 것은 명나라에 공급되는 조선제(製) 철정이 뛰어남을 알아본 까닭이었다.

그가 바로 잉글랜드에서 철포를 공급하는 서식스(Sussex) 지방의 영주들 중 한명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 그는 조선이 서반아와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한 것이 아니라는 확답을 선조에게 받았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큰 짐을 던 표정으로 한성을 떠났다.

애덤스 백작은 그렇게 한성을 떠나는 그 날까지도 자국의 공주가 굉장한 미인이며 그녀를 아내로 맡는 것은 행운이라는 말을 시시 때때로 해서 광해군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영길리의 사신단을 경호하기 위해 선조는 통 크게 금군인 내삼청의 겸사복 기마병 열과 우림위의 가형 소총으로 무장한 총통병 20명을 딸려 보냈다.

영길리의 사신들은 가형 소총의 모습에 큰 관심을 보였다.

광해군은 그 어떤 설명도 해주지 말 것이며 총기의 관리를 철저히 하라고 경호부대 지휘관에게 엄명해 두었다.

아마 영길리의 사신단은 가형 소총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얻는 것 없이 돌아갈 것이었다.

*****

선조22년이 밝았다.

아직도 광해군과 만력제의 여동생에 대한 혼담은 진행 중이었다.

선조의 느긋한 진행과 말만 꺼내놓고 적극적이지 않은 만력제의 의도가 만나서 만들어진 일이었다.

뭐, 아직 신체나이가 15살에 불과한 광해군으로써는 결혼이 급할 것도 없었다.

그해 5월 드디어 제물포 선거에서 연통이 왔다.

철선이 완성된 것이다.

급히 말을 달려 간 광해군은 제물포 선거에 위용을 드러내고 있는 철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철판의 연결을 위해 온통 리벳으로 도배를 한 모습이었지만 외피 전체가 철로 된 배였다.

원형은 판옥선이었다.

철판과 강철 골격으로 만들어진 철제 판옥선의 후미엔 프로펠러가 달려있었다.

광해군이 사전에 전수한 지식으로 만들어진 프로펠러였다.

조선에선 바람날개로 명명되었다.

가장 효율적인 크기와 각도를 찾아내는 것은 역시 조선 기술자들의 몫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프로펠러를 돌리는 것은 우습게도 말이었다.

본래라면 노군(櫓軍)들이 노를 저었을 아래갑판의 뒤쪽에 기관실이라는 곳이 생겼다.

기관도 없는 기관실에 프로펠러와 기어들로 연결된 회전판이 솟아있고, 그것에 연결된 봉을 짊어 맨 말 4마리가 2마리씩 짝을 지어 빙글빙글 돌면 프로펠러가 회전하는 방식이었다.

이걸 위해 철선엔 마구간이 만들어졌고 모두 12마리의 말이 실려 있었다.

말들은 항해가 시작되면 1시진씩 교대로 프로펠러를 돌린다.

그 정도가 큰 무리 없이 말이 프로펠러를 돌릴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도 실험으로 확인했다.

이렇게 말들이 돌리는 회전 운동이 직선으로 연결된 청동(靑銅)막대를 타고 아래에 위치한 기어박스로 전달된다.

조선 기술자들에게선 톱니바퀴 상자라 불리는 기어박스의 톱니는 모두 청동, 그러니까 놋쇠로 만들어져 있었다.

바다염분에 의한 부식을 조금이라도 늦춰보기 위해 선택된 재료였다.

그걸 연결하는 모든 막대도 전부청동이다.

그러다보니 다량의 동이 사용되었으나 광해군은 폐기된 총통의 일부를 회수해 그 재료로 삼았다.

그렇게 기어박스로 전달된 회전운동이 크기가 다른 몇 개의 톱니바퀴를 통해 비율과 운동방향이 바뀌어 고속으로 프로펠러가 달린 구동축을 돌리게 된다.

단순 계산상 기어박스의 기어비(歯数比)는 12대 1, 지름 15센티미터 정도인 구동축의 초당 회전수는 46회 정도로 2,800rpm의 회전력을 얻는다.

문제는 추력(推力)이다.

아무리 12대 1의 기어비를 써도 4마력이라는 힘은 어쩔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인지 완성된 철선의 최고 속도는 2노트(약 시속 3km) 정도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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