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신인(神人)의 저주
이순신은 김수가 활을 잘 쏘는 것에서 넘어 이젠 소총에 대한 개념과 운영 전략에도 능통해 있다고 알려왔다.
그를 군장으로 삼고 그 아래 이순신이 김수와 함께 보내준 이억과 투삼구 등 여진족 족장들을 부장으로 삼아 지휘부를 맡겼다.
특히 5만의 여진 기마병 중 4만을 승마총병과 엮어 기마총병대를 구성했다.
남은 1만의 기병은 특히 날래고 용감한 이들로만 추려 돌격기병으로 삼았다.
조선인과 조선 노비 11만중 남은 7만을 전부 보군으로 삼았다.
그중 날래고 담이 큰 이들 5천을 추려 기동보군이라는 조직으로 삼았다.
이들은 광해군이 가져간 수레들 중 5백대를 고치고 3천 마리의 전마를 붙여 6두 마차로 만들어 그곳에 타게 만들었다.
여기에 기마총병대 1만기, 2만 병력을 붙여 기동부대를 만들고 이억에게 맡겼다.
여진의 영광을 간직한 1만의 돌격기병은 족장들의 합의에 의해 내음 씨족의 족장인 내음타방이 맡았다.
다른 병사들과 다르게 그들에겐 특별히 단단하게 만들어진 조선의 두정갑이 주어졌다.
검은색으로 통일된 두정갑은 기마대 전체를 단단하게 느껴지도록 만들고 있었다.
남은 보군들 중 6만을 가형 소총으로 무장시켜 소총병대를 만들었다.
내음타방이 맡은 돌격기마대와 이억이 맡은 기동부대를 제외한 모든 부대는 실전경험을 갖춘 중심 여진 부족장들이 맡았다.
남은 5천의 조선인으로 이루어진 부대는 3천으로 이루어진 포병과 야전군의들, 보급부대, 치중대 등으로 구성해 중군으로 삼고 김수가 직접 지휘했다.
이렇게 분류된 철산 예비군은 1개의 기동부대 2만5천, 1개의 돌격기병대 1만, 3개의 기마총병대 6만, 가형 소총병으로 무장한 소총병대 6만, 그리고 포병을 포함한 중군 5천으로 구성되어있었다.
이들의 훈련이 시작되었다.
*****
선조21년 4월 초.
부대의 구성을 마친 철산 예비군이 배후단지를 벗어났다.
배후단지의 목책을 벗어나자마자 광해군과 지휘부의 지시에 의해 황량한 황무지에 밭을 일구기 시작했다.
훈련이라면서 밭을 일구는 모습에 참관하러 왔던 북위별시위의 장수들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걸 트집 잡을 수는 없었다.
광해군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름을 그렇게 황무지를 개간해 밭을 일구고 물길을 내고 두만강의 물을 끌어들여 농지를 가꿨다.
16만 명의 장정과 5만3천 마리의 말이 일거에 움직여 만들어낸 농지가 끝없이 펼쳐졌다.
그 농지에 무산 철산 단지에 조성한 염초밭에서 나온 퇴비를 뿌렸다.
그리고 이루어진 진짜 훈련.
여진전사들로 이루어진 기마대원들은 훈련을 시작한지 며칠 만에 전성기 시절의 제 기량을 모조리 되찾았다.
북위별시위의 노비군이었다가 면천되었던 조선인 1만도 순식간에 군인의 모습을 되찾았다.
특히 북위별시위에서 가형 소총병의 임무를 수행했던 이들은 곧바로 신기에 가까웠던 사격술을 되찾았다.
나머지 조선인들도 이전에 사용했던 가형 소총과 야포의 교육에 순식간에 적응했다.
그들을 조교로 삼아 10만 조선 노비들의 군사교육이 강도 높게 진행되었다.
여기저기 체력이 달려 구토하고 쓰러지는 이들이 속출하는 훈련이 지속되었지만 불평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들에겐 목표가 있었다.
멀리 있지도 않았다.
눈앞에서 조교로 활동하는 이들이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자신들과 같은 처지의 노비였지만 지금은 조선의 양인들이었다.
개중엔 악착같이 돈을 모아서 값을 치르고 면천시켜 자신들의 가족을 데려온 이들도 있었고, 그렇게 번 돈을 가족에게 보내 면천시켜서 기름진 삼남 땅에 버젓한 농지를 가진 자영농으로 만든 이도 있었다.
여긴. 그들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광해군은 그들에게도 분명히 약속했다.
5년. 5년만 열심히 일하고 싸우고 살아남으면 면천시켜주겠다고.
약속의 증거가 버젓이 눈앞에 있었다.
그 약속을 철석같이 믿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감독관들의 눈 밖에 나 쫓겨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실제로 게으름을 피우거나 사고를 치는 이들은 가차 없이 다시 돌려보내졌다.
그들은 노비라는 굴레를 벗어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린 것이었다.
조선인들이 강도 높은 훈련에 매진할 때 여진전사들로 구성된 기마대도 매일같이 거친 훈련에 내몰렸다.
그들에겐 일정한 군진을 짜고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방법들이 교육되었다.
특히 사격훈련을 시행하는 포병대의 포성에도 불구하고 말을 다루는 훈련을 중점으로 시행되었다.
그렇게 단련되어 가는 철산 예비군은 점점 강력한 군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한 달을 훈련에 매진한 철산 예비군들이 새로 도착한 치중대에서 푼 씨감자들을 개간해 놓았던 농지에 심었다.
그리고 이내 다시금 훈련이 시작되었다.
훈련은 개간사업기간을 포함해 5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선조21년 8월 말일.
그간의 훈련 결과를 확인하기 위한 전 철산 예비군이 참여하는 기동훈련이 드넓은 만주 벌판에서 시행되었다.
5백문의 야포가 일제히 불을 뿜는 가운데 6만 가형 소총병들이 천천히 전진했다.
사격선에 도달하자 포격이 멈추고 가형 소총병들의 사격이 시작되었다.
철산 예비군의 군제는 매우 간단하고 조밀했다.
5명을 오(伍)로 삼고, 그 오 20개를 대(隊)로 삼아 최소 작전 단위로 정했다.
사람들은 1개 대가 1백 명으로 구성되는 것 때문인지 흔히들 백인대라 불렀다.
그 대 10개를 모아 단(團)이라 하고, 단 10개를 모아 병단(兵端)으로 칭했다.
병력 2만5천으로 이루어진 기동부대 같은 경우는 달리 군단이란 이름을 붙여 차별성을 주었다.
그들을 이리저리 섞어 만드는 일단의 무리는 전단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되어있었다.
그 각각의 지휘관을 정해 일사분란하게 명령이 하달되고, 그 명령에 따라 움직이도록 훈련된 철산 예비군의 움직임은 굉장히 기민하고 민첩했다.
과거의 조선군이나 여진족 전사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심지어 훈련이 강하고, 기강이 센 북위별시위에서조차 본적이 없는 기민함이었다.
적을 단숨에 제압하는 제압사격이 끝난 소총병대의 좌측을 크게 돌아온 기마총병대 3만기가 가상적군의 후미로 진출했다.
곧바로 뒤에 앉아있던 승마총병들이 가상 적군을 향해 총을 쏘아댔다.
전형적인 모루와 망치 전술이다.
후방에 나타난 기마총병대에 놀란 적이 쫓겨 전방의 소총병대를 추돌할 것을 상정한 백병전 대비가 이루어졌다.
일제히 총검을 가형 소총에 장착하고 내뻗는 소총병대 병사들의 동작에 절도가 있었다.
저걸 위해 광해군이 논산훈련소에서 짧게 배웠던 총검술을 떠올려 복원하느라 무던히 애를 써야만 했다.
소총병대와의 백병전에서조차 패배한 적군이 패퇴한다는 가정에 기다리던 돌격기마대가 무서운 속도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저들의 추격에서 살아남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의 훈련이 끝나고, 오후엔 오전 훈련에 참석하지 않았던 기동군단의 단독 작전 훈련이 시행되었다.
군복 오른쪽 팔뚝에 수놓아진 달리는 말 표식을 단 이들이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다.
1만기 2만의 기마총병대와 그 뒤를 따르는 5천의 기동소총병을 태운 5백대의 6두마차가 무서운 속도로 벌판을 질주했다.
기동군단의 가장 무서운 점은 바로 저 속도다.
달리 기동군단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었다.
곧 전투 예상지점으로 표시된 곳에 도착한 기동소총병들이 정지한 마차에서 쏟아져 내려서 전투 진형을 짰다.
가상 적 기마대의 돌진을 일제사로 막아낸 기동소총병들의 뒤에 대기하고 있던 기마총병대가 진출하며 도주하는 적을 추격 사살하는 훈련 모습이 연출되었다.
실제 적과의 교전에서 저렇게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지만 상당히 훈련이 잘 되어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훈련의 말미 모든 병사들이 소총과 포, 기마를 정비하고 배후단지로 귀환했다.
그들이 귀환한 뒤로 끝없이 펼쳐진 농지가 남아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철산 예비군이 훈련을 끝내고 배후단지로 귀환한 다음날, 호이합 씨족을 중심으로 뭉쳤던 여진족이 흩어졌다.
조선의 조당과, 북위별시위는 몰랐지만 그렇게 흩어진 여진족들 대부분이 철산 예비군이 일궈놓은 농지 주변에 모옥을 짓기 시작했다.
그들을 돕기 위해 광해군이 조선 노비군 1만을 파견했다.
그들은 여진족이 설치 방법을 모르는 구들을 모옥에 놓아주었다.
모옥이 완성된 직후 철산 예비군이 개간했던 드넓은 농지에서 감자수확이 시작되었다.
그 많은 감자가 농경지 주변으로 모옥을 짓고 들어선 호이합 씨족을 비롯한 30만 여진부족들에게 골고루 분배되었다.
며칠 후, 철산 배후단지에서 광해군과 함께 수십 명의 취사병들이 그 여진 부족들의 집단 거주지로 들어왔다.
그들은 각 부족에서 뽑혀온 여진족 아낙들을 모아놓고 감자로 만들 수 있는 요리들을 가르쳤다.
그 요리들의 대부분은 광해군이 현대요리들을 떠올려 복원해낸 것들이었다.
광해군이 알려준 요리라는 소리를 들은 여진족들은 감자요리가 조선의 왕실 요리인줄로만 알았다.
왕실요리, 당연히 고급 요리다.
익숙지 않은 맛과 식감에도 불구하고 불만을 표하는 이들은 없었다.
하긴 고질적으로 따라다니던 굶주림을 해결한 것만으로도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더구나 여진족들에게 광해군은 천둥과 번개를 마음대로 부리는 신인(神人)이었다.
그를 따르는 것에 아무런 걸림돌이 없었다.
심지어 해서 여진의 중심부족이라는 휘발 씨족의 제사장이 멀리서 찾아와 광해군의 발에 입맞춤을 하고 휘발 씨족을 축복해 달라 간청했을 정도였다.
사실 여기엔 웃긴 뒷이야기가 있다.
광해가 천둥과 번개를 부린다는 소문이 여진을 뒤 흔들었던 시절.
몇몇 여진의 부족장이나 제사장이 광해군의 소문을 부정하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라 주장했던 것이다.
그걸 확인시켜주기 위해 자신들도 똑같이 제단을 쌓고 쇠막대를 구해 그 꼭대기에 꽂았다.
그리고 치러진 기우제.
시도한 이들 중 반수는 비가 오지 않는 제단 앞에서 기력을 다해 혼절했고, 나머지 반수는 벼락에 맞아 죽었다.
광해가 자철석에 쇠막대를 꽂아둔 곳에서 50보정도 떨어진 곳에 다시 작은 제단을 마련해 기우제를 지낸 것과 다르게 이들은 무슨 소문을 어떻게 들은 건지 허허벌판의 언덕에 높게 쌓은 제단에 쇠막대를 꽂아두고 바로 그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던 것이다.
개중엔 비도 오지 않는 마른하늘에서 떨어진 날벼락에 맞아 죽은 이까지 있었다.
그것을 여진인들은 신인의 저주라 불렀다.
하늘의 뜻을 이은 신인을 모함하고 모방하려 한 이들에게 벌을 내린 것이라고.
휘발 씨족의 제사장이 광해군에게 달려온 것은 그렇게 날벼락을 맞아 죽은 이가 바로 그들의 씨족장이었기 때문이었다.
광해군은 몰랐지만 그렇게 여진인들에게 있어 신인의 소문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 덕인지 새로 합류한 여진족들도 얌전히 광해군의 뜻에 따랐다.
그렇게 호이합 씨족을 비롯해 새롭게 합류한 여진 제부족이 거주하는 지역을 광해군이 제1거주구역이라 이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