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철산 예비군
선조20년 12월, 드디어 철물전에서 무산 철산 제철단지의 증산 계획을 공표했다.
모집인원은 5만.
이미 작년 9월에 희사한 노비들의 수에 따라 투자 가능한 노비들의 수를 배정받은 이들이 철물전으로 노비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이 많은 수의 노비를 확보하기 위해 대다수의 권문세가들이 땅을 팔았다.
그 땅들은 기다리고 있던 김억수가 모조리 사들였다.
나중엔 철물전 한편에 땅을 사주는 창구를 마련했을 정도였다.
일련의 일들로 조선 사대부들이 가지고 있던 토지의 칠할 이상이 철물전으로 넘어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이미 대세가 땅과 소작농으로 대변되는 농사에서 철물전에 대한 투자라는 사업으로 무게중심이 옮겨진 조선에선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확보한 대규모 농지를 철물전은 소작을 주었다.
소작료는 겨우 일할이었다.
그 획기적인 소작료의 조건은 하나였다.
철물전이 지정하는 작물을 철물전이 원하는 방법으로 키울 것.
그 조건만 따르면 토지는 감당할 수 있는 최대치만큼 주어졌다.
뿐인가, 염초밭에서 나온 퇴비와 철제농기구가 함께 지급되었다.
더구나 그건 무료였다.
소작농들이 몰렸다.
원하는 이들이 줄 땅보다 많아 결국 제비뽑기를 해야 할 정도였다.
그것에서 당첨된 이들의 환호성으로 한성을 비롯한 각지의 철물전들이 소란스러웠다.
이제 봄이 오면 그 땅에 재배에 성공한 감자와 고추가 넓게 재배될 것이었다.
또한 일대의 농지에 물을 대는 논 농법과 모내기를 통한 이앙법이 시작될 것이었다.
사실 모내기를 통한 이앙법은 고려 말부터 시행되었다.
하지만 조선 초기, 가뭄에 약하다는 이유로 직파법으로 바뀌고 이앙법은 금지되었다.
그걸 다시 돌려놓았다.
그렇다고 그냥 무턱대고 이앙법으로 돌아가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걸 시행하게 될 농지 주변에 저수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농한기의 백성들을 동원해 철물전이 대가를 치르고 만들었다.
수많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농한기에 돈벌이가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곡창지역인 삼남이 아니라 경기 일부지역에서만 시행해 보겠다는 광해군의 설득에 선조가 동의했던 것은 왜에서 들어온 이득을 일부 나누어 받기로 한 까닭이었다.
그렇게 이득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는지 그 다음날, 선조는 경복궁을 중건(重建) 하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중건 비용은 전액 왕실의 내탕금으로 충당하겠다는 선조의 선언에 반대할 수 있는 신하는 아무도 없었다.
그날부로 왕실이 창덕궁으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
서기1588년, 선조21년 1월 초하루.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서 무자년 정조하례가 열렸다.
경복궁의 중건 비용 절반을 광해군이 김억수를 통해 내놓은 덕이었는지 이날 정조하례에는 광해군도 선조의 부름을 받았다.
이전의 그 어떤 정조하례보다 크게 열린 행사엔 문무백관만이 아니라 부사급 이상의 지방 수령들까지 모두 불려 올라왔다
그들의 하례를 받은 선조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연회를 열었다.
내탕금을 쌓아두는 창고가 모자라 다른 창고를 내탕고로 만들었다는 소리가 들려올 지경이었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의 재산이 쌓이고 있었지만 왕도, 고관들도 백성을 위해 사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김억수를 통해 철산 배후단지를 포함한 각지의 철물전 앞에 대규모 잔치를 열었다.
닭과 돼지를 잡고, 떡을 내어 풍족하게 연 잔치는 모두 왕의 이름으로 개최되었다.
온 조선 팔도 전체에 주상 전하 천세 소리가 메아리쳐 울리는 날이었다.
궐에 앉아 연회를 즐기다 백성들이 외치는 그 천세 소리를 들은 선조가 상황을 알아보고는 크게 웃으며 광해군을 곁으로 불러 술을 주고 ‘내 아들이 여럿이나 아비를 위하는 것은 너뿐이구나’라고 말했다.
오락가락 어떤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할지 광해군으로써는 알 길이 없었다.
그날의 기분이 얼마나 좋았던지 며칠 후, 광해군의 혼처를 알아보라는 왕명이 떨어졌다.
간택령이다.
실제역사보다 늦어진 일이었지만 규모는 더 커졌다.
차기 국왕을 뜻하는 세자로 정해진 왕자의 간택이 아니었음에도 온 나라가 들썩거렸다.
조당의 신료들이나 조선의 그 어떤 권문세가의 눈으로도 차기 군왕은 광해군이었다.
선조의 변덕이 아무리 심해도 그걸 뒤집기엔 철물전을 앞세운 광해군의 재력과 영향력이 너무 컸다.
더구나 백성들 사이에 인심이 크게 기울어있었다.
철물전이 아무리 왕의 이름으로 잔치를 열어도 그것이 광해군의 돈으로 이루어진 것을 모르는 조선 백성이 없었다.
더구나 광해군이 벌인 철제농기구 보급 사업으로 조선에 쌀이 풍족해지고, 최근에 대규모 농지를 싼 소작료로 풀었기에 인심은 크게 쏠려있었다.
그걸 뒤집을 수 있는 왕자는 아무도 없었다.
온 조선의 권문세가들과 정치에서 멀리 떨어져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하여 고고하다 평판을 듣던 사림의 유수가문에서까지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움직였다.
나라를 뛰어넘어 명의 고관대작들이 보낸 매파가 국경을 넘어 조선에 당도했다.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이 만력제가 황제의 여동생을 보낼 의향이 있다는 뜻을 사신을 통해 피력하면서 무력화되었다.
명나라 황실의 청혼이었다.
신하의 나라를 표방하는 조선의 입장에서는 거부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난데없이 국제결혼을 하게 된 광해군의 난감함이 깊었다.
거리 때문인지 명황실과 조선 왕실간의 혼담은 긴 시간이 걸렸다.
거리도 문제였지만 선조가 일부러 시간을 끈다는 소리가 궐내에서 조심스럽게 흘러 다녔다.
황제의 여동생과 결혼하면 광해군은 황제의 매부가 된다.
신하의 자세를 취하는 조선의 임금보다 그 아들인 광해군의 위치가 더 높아지는 것이다.
그것을 저어하는 선조가 고의적으로 시간을 끌고 있다는 뜻이었다.
정말 그래서인지 아니면 단지 거리 때문인지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 시기 선조의 침전으로 사림에 의해 밀려났던 훈구의 인물들이 자주 방문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힘을 잃은 그들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살피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조당을 장악한 사림도, 이런저런 일로 정신없이 바빴던 광해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선조21년 3월, 광해군의 밀지를 품은 김억수가 무산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보름 후,
철산 배후단지 외곽에 살던 여진인들의 준동이 벌어졌다.
그 중심엔 해서 여진의 최대부족인 휘발 씨의 영역에서 돌아온 호이합 씨족이 있었다.
그들과 야진 여진의 제부족 수십 곳이 연합하여 병사를 내고 소란을 떨었다.
그 수가 물경 십만에 육박했다.
아직까진 직접적으로 조선의 영토나 철산 배후단지를 침탈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엄청난 수에 조선의 조당은 큰 난리가 났다.
특히 북위별시위 별장과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겸직하고 있던 신립의 놀람이 컸다.
그는 휘하의 함경도 병력을 총동원하고 한성의 조당에 협조를 얻어 경군의 일부까지 불러올려 방어를 다졌다.
그 시기 광해군이 선조를 독대했다.
“무엇을 하겠다고?”
놀람이 담긴 선조의 물음에 광해군이 답했다.
“이이제이. 그것을 실제해보이려 하옵니다.”
“어찌 말이더냐?”
“전향한 여진족들과 탄광에서 일하고 있는 노비들로 철산 예비군을 만들고자 하옵니다.”
“철산 예비군?”
“예. 평상시는 탄광과 철광의 일에 종사하다 이번과 같은 유사시엔 군역을 지는 것입니다.”
“저들이 따르겠느냐?”
“다른 여진족의 준동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아도 가능성은 충분하다 사료되옵니다.”
“흠······. 군역을 지으면 나라가 먹이고 입혀야 한다. 무장 또한 마찬가지고.”
“소자가 하겠나이다. 아바마마께 근심을 끼쳐드리는 일이 없이 처리할 것이옵니다.”
“모든 것을 네가 하겠다라······?”
“예. 아바마마의 나라이옵니다. 그 나라를 지키는 것에 소용되는 비용이옵니다. 소자의 것이 아바마마의 것이 아닌 것이 없사온데 무엇이 아깝겠나이까?”
아부도 하다보면 는다.
그걸 절절하게 느끼며 바짝 엎드린 광해군을 선조가 가늘게 뜬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대세는 광해군으로 기울었다는 것을 그도 안다.
조금 더 두고 보자, 조금 더 두고 보자 하는 사이 조선의 세상은 어느새 광해군을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용납하기 어려웠지만 그걸 뒤집기엔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걸 인정하고 광해군을 국본으로 내세울 생각이 아직 선조는 없었다.
그리 되는 순간, 자신은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될 것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이니 큰돈을 쓰게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만큼 힘이 빠져나갈 테니까.
“그리하라.”
선조의 허락을 얻은 광해군이 곧바로 무산으로 향했다.
한양을 떠나는 광해군을 장원에 비축해 두었던 무기를 바리바리 실은 수레 수백 대가 따랐다.
무산 철산 배후단지의 경비는 철산영이 맡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무장을 한 채 나루를 건너 조선 땅에는 들어올 수 없었다.
신립이 주창했던 무장 여진인의 조선 영토 출입금지는 여전히 적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철산 배후단지 강 건너편에 조성된 철산 제철단지의 경비는 조필이 고용한 수십 명의 조선인 호위무사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이 난감하게 변했다.
왕명으로 그들조차 철산 예비군에 포함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들만이 아니다. 그간 철산 배후단지를 방어해온 철산영도 포함되었다.
철산 제철단지의 가동률이 최소로 낮춰졌다.
전사나 군역에 동원될 정도의 나이가 지난 이들만 남고 장정들은 모두 배를 타고 두만강을 건너 배후단지에 있는 과거 북위별시위의 주둔지로 모였다.
조선인 1만, 조선 노비 10만, 전향 여진 전사 5만.
도합 16만이 5만 마리가 훌쩍 넘는 말과 함께 도열했다.
철광과 탄광에서 일하느라 말을 달릴 여유가 없어진 여진 전사들이 많았지만 그들의 기마술은 여전했다.
그들에게 다수의 창칼과 가형 소총 10만정, 그리고 야포 5백문이 풀렸다.
개량된 신기전 100문과 사전총통화차 50문도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 앞에 수백 대의 마차에서 군장이 풀어졌다.
이전 조선군이 사용하던 갑주도, 여진족이 사용하던 가죽옷도 아니었다.
군복이라 이름 붙여진 검은색 무명옷에 대나무로 만든 검은 색 방립, 그리고 짚신으로 바닥을 두텁게 덧댄 가죽신이 주어졌다.
각자의 몸치수에 맞춰 얼추 비슷한 것을 받아 입은 이들이 길게 늘어선 모습은 나름 봐줄만 했다.
물론 삐뚤빼뚤 엉성한 군열을 보면 혀부터 차게 되겠지만.
철산 예비군의 초대 군장은 이순신의 추천과 광해군의 동의로 전(前) 경원부사 김수가 맡았다.
그는 여전히 전라우수영으로 나가있던 이순신의 군영에서 백의종군 중이었다.
그의 백의종군 의무는 일전의 여진 준동을 막아낸 공로를 인정받아 끝이 났다.
물론 다시 벼슬길이 열린 것은 아니었으나 억지로 군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김수는 이순신 휘하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 이유에 대해 김수는 이순신에게 진 빚을 갚는 중이라 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구명을 위해 애를 쓴 이순신에게 모두를 건 것 같았다.
그런 의기를 광해군 높이 샀다.
그것이 이순신의 제의에 광해군이 동의한 이유였다.
그런 김수가 이번일로 광해군을 따라 무산에 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