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48화 (48/325)

제48화. 정해양변(丁亥攘變)

선조20년 8월.

관할 수역을 어기고 있다는 충청수영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제물포 앞바다까지 배를 보내 정찰 활동을 벌이던 전라우수영의 탐망선(探望船)이 조선쪽으로 접근하던 양이의 범선 3척을 발견했다.

선미에 휘날리는 국기는 잉글랜드, 그러니까 영길리의 것이었다.

곧바로 이순신이 지휘하는 전라우수영에 비상이 걸렸다.

전라우수영 곳곳에 대기하던 판옥전선들이 출동했다.

아울러 유사시를 대비해 강화도를 임시 기착지로 삼아 대기하고 있던 전라우수영의 판옥전선 5척도 출항했다.

야포로 무장되어 있던 이 판옥전선들은 전라우수사 이순신이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

양측의 함선은 강화도 인근 해역에서 마주쳤다.

평저선인 판옥전선의 특징을 감안한 이순신이 원해(遠海)로 나가지 않고 근해에서 기다린 까닭이었다.

다가오는 영길리의 함대에 접근 목적을 확인하기 위해 우수영의 탐망선이 다가가자 그쪽에서 탐망선에 포를 쏘았다.

탐망선은 급히 선수를 돌려 도주해왔다.

다행히 영길리의 함포는 도주하는 조선수군의 탐망선을 맞추지 못했다.

멀리서 보이는 양이의 범선이 판옥전선보다 훨씬 커 보였다.

이순신은 그 배들을 향해 좌측으로 판옥전선을 돌려 대기시켰다.

양측의 거리가 1천보로 줄어들었을 때, 이순신의 명을 받은 대장선의 좌현 야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조선 수군과 유럽 해군의 최초 해전이 그렇게 발발했다.

이당시 유럽의 함포가 가진 최대사거리는 대략 6백 미터내외.

하지만 만족할 만한 파괴력을 얻기 위해서는 1백 미터, 심하게는 수십 미터 안으로 접근해야만 했다.

그런 것에 익숙해져 있던 영길리의 해군들은 조선수군의 발포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맞을 리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함대의 함열을 흩뜨릴 필요도, 함선을 포탄을 피해 운항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직선으로 달려들던 영길리 함대의 선두에 섰던 함선에 10발의 화염포탄 중 5발이 명중했다.

평소의 포격전 교리대로 일렬종대로 서서 직선으로 다가오던 영길리의 함대의 선두함선 뱃머리를 조선수군의 화염포탄들이 뚫고 들어갔다.

함선의 정면은 피탄 면적이 가장 작다.

그렇기에 이시대 유럽의 함선들은 피탄 면적이 작은 일렬종대로 접근하여 사거리에서 선회하며 포탄을 주고받는 전열포격전을 선호한다.

그러다 적의 돛대가 부러지거나 파손되어 운항능력을 상실하면 상대방의 함선에 배를 붙여 병력을 적함에 올려 보내 선상전투를 벌이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깨고 원거리 포격전으로만 유도하여 전투를 끝내는 방법을 최근 영길리의 해군이 선호하고 있었다.

그것에 애를 먹고 있는 것이 영길리의 해군에 비해 철포의 성능과 수가 떨어지는 서반아의 해군이었다.

한데 그렇게 포격전을 특기로 삼아가는 영길리의 함선들이 조선 수군의 포격전에 휘말렸다.

특히 피탄 면적이 작은 선두 함선의 정면에 조선수군의 야포가 절반이나 명중탄을 꽂아 넣었다.

일렁이는 파도로 끊임없이 흔들리는 선상에서, 그것은 굉장한 명중률이었다.

조선 수군이 그러한 명중률을 보인 것은 그동안 이순신이 끊임없이 사격 훈련을 시킨 덕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콰과과과광!

선두 함선을 뚫고 들어갔던 5발의 화염포탄이 거의 동시에 폭발했다.

언뜻 포구로 불길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보였지만 그뿐, 배위로 불길이 솟구치거나 하진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콰쾅!

곧바로 무시무시한 폭음과 함께 범선의 중간이 폭발해 버렸다.

폭발이 얼마나 컸던지 배의 중간이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배안에 보관되어있던 화약이 폭발탄의 불길에 유폭을 일으킨 것이다.

그로인해 두 동강이로 나뉘어져버린 영길리의 선두 함선이 그대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선두에 섰던 범선의 사고로 진로가 막힌 영길리의 함선들이 급히 선회하며 옆구리를 드러냈다.

기다리던 이순신의 깃발명령에 나머지 판옥전선들이 사전에 배정된 목표에 차례차례 야포를 퍼부었다.

발견에서 조우까지 3시진, 조우에서 전투 개시까지 1시진, 전투시작 2각 만에 영길리의 범선 3척이 서해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날, 조선수군이 탐망선을 보내 구출한 영길리 선원들의 수는 겨우 서른 남짓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서해의 바다 속으로 두 동강이가 난 그들의 배와 함께 가라앉았다.

소식을 들은 한성 조당의 사관들은 이날의 해전을 정해년에 일어난 양인들과의 변란이라 하여 정해양변(丁亥攘變)이라 기술하였다.

기술된 내용은 길지 않았다.

<정해년 팔월 양이의 배가 조선의 강역을 침범하여 수군이 나아가 싸워 이겼다.>

사관의 기록이 부실한 것만큼이나 한성의 조당은 그 사건을 크게 다루지 않았다.

너무 싱겁게 끝난 탓에 이순신 함대의 야포가 가진 성능과 영길리 함대의 무서움에 대해서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이들이 가진 포와 함선들의 능력을 어렴풋이 알고 있던 명의 조정은 그 사건을 달리 받아들였다.

특히 명나라 군부에서 관심을 크게 가졌다.

명나라 군부 안에서 조선 수군을 감찰하여 살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될 정도였다.

조선과 서해를 마주하고 있던 명군의 입장에서는 꽤나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그 논의가 벌어진다는 소식에 광해군의 지시를 받은 조필이 어마어마한 돈을 명군 장수들에게 풀었다.

아직은 명나라의 관심을 받아서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명군 장수들의 문제제기가 흐지부지 흩어지고 사안은 별 볼일 없던 영길리의 상선무리가 조선수군을 위협하다 격침된 사건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하지만 정예 해군 함정을 파견했던 영길리의 입장에서는 그리 간단하게 넘어갈 수 없는 사태였다.

더구나 이번 사태로 조선이란 나라가 가진 화포기술이 자국의 것을 월등히 뛰어넘는다는 것이 명확해 졌기에 그 충격은 더했다.

그 기술을 습득하게 될 에스파냐와 잉글랜드가 한창 충돌 중이었기에 사안은 더 심각했다.

천진에 머물고 있던 벤투 자작의 급보가 쾌속선을 통해 말레이로, 다시 인도를 거쳐 잉글랜드로 전해졌다.

마찬가지로 해당 해전의 결과는 서반아 상인들을 통해서도 곧바로 자국으로 전해졌다.

또한 천진에 와있던 화란, 그러니까 네덜란드의 상인들을 통해서 전 유럽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

소란스럽던 8월말.

선발된 조선 기술자들과 선원들이 천진항에서 에스파냐로 출발하는 배편을 타기 위해 제물포를 떠났다.

그들은 노비가 아니라 양인들이었다.

철물전에서 제대로 된 조선 기술자들과 선원들을 노비에서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 저들은 높은 품삯을 약속받았다.

그 절반을 출발 전에, 나머지 절반은 조선으로 돌아와서 받기로 하였다.

제물포에서 천진으로 가는 배에 오르던 이들의 얼굴엔 불안감이 가득했다.

그들을 마중 나온 몇몇 가족들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가족을 먹여 살릴 돈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면 저들은 결코 떠나지 않았을 터였다.

그들이 그렇게 제물포를 떠났다.

천진에서 조선 기술자들과 선원들을 태운 에스파냐의 상선들은 잉글랜드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8척이 선단을 구성해 움직였다.

그리고 그해 10월.

에스파냐의 철포기술자들과 제철기술자들이 천진항에 도착했다.

광해군은 그들을 의주 포구를 통해 무산 철산 단지로 옮겼다.

그것에 맞춰 장원의 화포 야장들 몇을 무산으로 보냈다.

조선철포 제작기술을 알려줄 인원이었다.

****

선조20년 11월 코크스의 개발이 완료되었다.

강철은 여전히 숯을 이용해야 했지만 가장 많이 생산되는 선철의 제작과정에선 충분히 사용이 가능한 코크스가 개발된 것이다.

이것에도 무수한 뒷이야기가 있었다.

사실 코크스는 역청탄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광해군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조선의 기술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에서 전례 된 초보적인 코크스 제조기술은 있었지만 그것이 역청탄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은 몰랐다.

사실 조선에는 제대로 된 역청탄 매장지가 없다.

있어도 경제성이 없거나 간혹 기존 석탄에 섞여 나오는 정도일 뿐이다.

당연히 조선의 석탄으로 코크스를 만들면 한 가마에서도 되는 것, 안 되는 것이 섞여 나왔다.

물론 안 되는 것이 훨씬 더 많았지만.

이전에는 그것이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쓰는 곳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철산단지의 코크스 개발진을 오판에 빠지게 만든 것도 바로 그 부분이다.

아예 안 되면 무언가 다른 원인을 찾았을 텐데 일부가 만들어지니 계속 방법을 바꾸어가기만 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조필이 불이 굉장히 잘 붙는 석탄이라며 중국의 석탄을 보내준 적이 있었다.

연기는 훨씬 심했지만 조필의 말대로 조선의 석탄보다 불이 잘 붙었다.

하지만 이미 준비된 광산에서 석탄이 많이 나고 있어 크게 필요가 없었던 철산단지에선 열 포대 남짓 남은 그 중국 석탄이 방치되었다.

그걸 한 숯쟁이가 코크스 가마에 넣은 것은 정말이지 우연이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조필이 보내왔던 석탄이 바로 역청탄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조필 상단을 통해 역청탄을 추가로 조달한 개발진은 결국 원료인 석탄이 문제였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것이 확인 된 이후, 코크스 재료가 되는 역청탄은 모두 중국에서 수입되고 있었다.

원활한 수입을 위해 조필의 상단이 명나라 조정의 허가를 받아 기존의 역청탄 광산을 직접 사들여 수출하고, 또 다른 역청탄 광산을 개발하고 있었다.

수급처가 안정되자 대량의 명나라 역청탄이 조선으로 보내졌다.

그에 맞춰 다수의 숯가마들이 코크스 생산설비로 바뀌었고, 다량의 코크스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생산된 코크스는 숯을 대신해 선철의 생산과정에 투입되었다.

물론 전체 생산량을 코크스가 대체한 건 아니었다.

아직은 생산하는 코크스의 양이 사용량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청탄을 활용한 코크스 개발이 성공하긴 했지만 아직까지 그 기술은 대량 생산에는 다소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용되는 숯을 절반이나 줄였다는 것에 의의가 있었다.

이젠 명나라도 대량의 숯용 나무의 수출이 가져다주는 폐해를 알아차리고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하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 그 시기에 조선이 숯용 나무의 수입을 줄였다.

대신 역청탄의 수입량이 늘었다.

그렇다고 철산 제철단지가 수입에만 의존할 생각은 아니었다.

조선 땅에서도 역청탄을 찾기 위한 노력이 진행 중이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그로인해 애석하게도 대규모 인원과 자금을 들여 개발한 함경도 일원의 석탄광산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석탄광산을 그대로 둘 수 없었던 광해군은 석탄을 활용할 방법을 개발하도록 시켰다.

그걸 위해 구공탄의 개략적인 그림과 용도를 장원의 기술자들에게 설명했다.

또한 같은 내용을 기술한 서신을 철산단지의 개발자들에게도 보내놓았다.

석탄을 활용한 보일러 개발도 개시되었다.

큰 공사 없이 나무로 화력을 공급하는 아궁이를 개조하여 쓸 수 있는 보일러를 개발하는 것이 1차 목표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