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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47화 (47/325)

제47화. 영길리(英吉利)와의 충돌

“조 행수의 긴급 서신이 당도하였습니다. 서반아에서 우리의 조건을 수락하였다 합니다.”

김억수의 말에 광해군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한데 생각보다 반응이 늦었네요.”

이 사안이 거론 된지 거의 1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조선철포를 사반아까지 직접 가지고 간 상인이 서반아의 국왕 앞에서 시험발사를 해보였답니다.”

이당시 조선철포는 당시대 유럽의 포보다 한발 앞서있는 것이다.

당연한 것이 화란(和蘭), 그러니까 네덜란드가 십여 년 후쯤 개발하여 사용하는 포를 원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철포 아닌가.

영국산 철포보다 뛰어난 내구성, 사거리, 파괴력.

펠리페 2세가 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찌 하잡니까?”

“우리 쪽에서 조선 기술자와 항해술을 배울 선원들을 보내주면 자신들도 포를 만들 기술자들과 제철 기술자들을 보내겠답니다.”

“인원을 선발하세요. 장원의 조선 기술자들 말고 다른 기술자들을 선발하고 선원들은 김 대행수가 알아서 모집해 주시고요.”

“예. 마마.”

고개를 숙여 보인 김억수가 광해군에게 말했다.

“조필의 연통에 의하면 명에서도 우리 조선철포를 수입하길 원한답니다.”

“명에서요?”

“예.”

“그들은 어찌 알고요?”

“여진인들을 통해 이야기가 들어간 모양입니다. 처음엔 공물에 넣자는 소리가 나온 모양인데 그것으로는 충분한 수를 채울 수 없다고 판단했던지 다량을 수입하는 것으로 결정을 한 모양입니다.”

“얼마나 원하는 겁니까?”

“백여 문이옵니다.”

“그들이 그렇게 많이 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명도 여진 제부족들과의 충돌이 장기화되고 있습니다. 조선군이 조선철포로 여진과의 전투에서 효과를 보았다니 그것으로 여진을 제압하는 데 쓸 요량인 모양입니다.”

조선군이 여진과의 전투에서 사용한 화기는 조선철포만이 아니다.

더구나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조선철포가 아니라 가형 소총이었다.

그렇다고 그걸 정정해서 명나라에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김억수의 답에 잠시 무언가를 생각해보던 광해군이 말했다.

“조필에게 일러 그냥 주라고 하세요. 황제에게 바치는 조필 상단의 선물로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일입니다.”

“그 선물이 더 많은 돈을 벌어줄 거예요. 그러니 그렇게 해요. 장원엔 내가 언질을 주어 무기고에 있는 것을 반출할 수 있게 해둘 게요.”

조선철포는 장원에 5백문의 비축분이 있었다.

이젠 그걸 줄여도 상관없었다.

이때는 이미 야포가 한창 생산 중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고난도의 제작과정으로 인해 생산 설비를 늘였음에도 한 달에 30문 남짓이 한계였지만 지금은 이미 2백문 가까운 야포가 만들어져 있었다.

광해군의 명을 받은 김억수가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원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철포 1백문이 명으로 넘어갔다.

다른 것도 아니고 무기가 넘어간 것이었기 때문인지 의금부로 해당 첩보가 들어왔다.

하지만 금부도사는 이번에도 해당 사항을 선조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외형적으로는 황제에게 선물로 들어간 것을 문제 삼을 수 없는 마당에 괜한 분란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그는 분명 광해군을 걱정하고 있었다.

*****

선조20년 5월, 명에 있던 조필이 직접 일단의 양이인들을 데리고 제물포를 찾았다.

서반아 사람들일 거라는 예상을 깨고 조필과 함께 제물포에 도착한 사람들은 영길리, 그러니까 잉글랜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광해군과의 만남에서 서반아에 대한 철포 기술과 제철 기술의 판매를 중단할 것을 요청했다.

대신 자신들이 갤리온의 제작기술과 대양항해술을 전수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 대가로 그들은 단지 서반아에 대한 조선의 철포 기술 반출의 중단만을 요구했다.

다시 말해 조선 철포의 기술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상외의 전개였다.

영길리의 상인이라 밝혔으나 그가 원하는 바를 미루어보며 외교관의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의 직함을 물었을 때 돌아온 답변으로 광해군의 예감은 사실로 드러났다.

상인이라 말한 영길리 사람은 영국의회의 의원 자격을 갖춘 베툰 자작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지만 자작이라는 작위와 의원이라는 신분을 감안하면 꽤나 고위직을 파견한 셈이었다.

영길리의 입장에서는 이름도 생소한 아시아의 소국에 말이다.

그것으로 그들이 조선철포 기술이 서반아로 넘어가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에서 광해군은 의아함을 느꼈다.

단지 10문을 서반아의 왕실로 직접 보냈다.

다른 곳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을 조선철포의 위용을 어찌 알고?

그걸 조필과 함께 온 명나라 역관을 통해 물었다.

조선말을 조필이 중국말로 바꾸고, 그것을 다시 명나라 역관이 영어로 바꾸는 과정을 지켜보는 광해군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간간히 알아듣는 영어가 나왔지만 능숙하게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던 현대시대의 능력미비가 아쉽기만 했다.

‘영어공부를 조금 더 열심히 해둘걸.’

아쉬움 속에서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아무래도 조선에도 영어나 기타 외국어를 할 수 있는 역관들을 키워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다시 영어 답을 중국말을 거쳐 조선말로 들은 광해군은 어이가 없었다.

애초에 10문의 조선철포가 중국에서 구입한 물건을 싣고 에스파냐로 향하던 상선 3척에 나뉘어 이송되었는데 그 배들 중 한척을 잉글랜드의 사략선이 나포했다는 것이다.

결국 잉글랜드가 뜻하지 않게 조선철포를 손에 넣게 되었던 것이다.

해당 답을 들은 광해군이 다시 물었다.

영길리의 철포보다 조선철포가 더 나을 텐데 왜 제작법을 알려달라지 않는가에 관한 물음이었다.

그 물음에 베툰 자작이 답했다.

영국은 자국에서 철포를 만든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믿는다.

단, 에스파냐가 조선철포를 가지지 않는다면.

어차피 자국보다 나은 철포를 상대가 가지지만 못하면 된다는 이상한 논리였지만 반박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거절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주고받는 것이 명확하지 않는 거래는 언제나 사달을 부른다.

몇 년을 공을 들여 받아든 결과가 시원치 않다면 서운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시간을 잃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고받는 것이 명확한 서반아가 조선의 거래 대상으로는 더 좋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광해군의 거절에 베툰 자작은 영길리가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 말하고 돌아갔다.

무력시위로 자신들의 뜻을 관철해 왔던 이시기 유럽 열강의 못된 버릇을 그대로 벌일 모양새였다.

그것에 대비하기 위해 광해군은 전라우수영의 이순신에게 야포1백문과 조선철포 2백문을 급히 내려 보냈다.

우수영의 판옥전선들에 포들을 설치하라는 의미에서였다.

이미 천자와 지자총통들로 포함을 구성하고 있던 이순신은 광해군이 보낸 야포와 조선철포로 바꾸기 시작했다.

1척의 판옥전선에 실리는 총통의 수는 대략 20문 가량이었다.

당시 전라우수영에 있던 판옥전선의 수는 모두 20척.

1년이 넘는 시간을 이순신이 노력해서 만들어낸 전력이었다.

그 중 5척을 야포로, 15척을 조선철포와 천자총통을 섞어 무장시켰다.

조선철포가 너무 무거워서 그것만으로 무장시킬 경우 한척에 실을 수 있는 화포의 수가 줄어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취한 조처였다.

사거리는 오히려 개량된 화약을 사용하는 천자총통이 조선철포보다 멀리 날았다.

천자총통이 1천3백보까지 날아간데 반해 조선철포는 1천보 언저리가 최대 사격거리였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철포도 개량된 화약을 사용함으로써 훈용진 전투 때보다 사거리가 2백보가량 늘어난 것이었지만 화약 사용량이 더 많았던 천자총통이 보다 더 멀리 포탄을 날려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순신이 조선철포를 포기하지 못했던 것은 정확도와 파괴력 때문이었다.

천자총통에 비해 조선철포의 정확도와 내구성이 더 좋았던 것이다.

거기다 폭발탄의 사용이 결정적이었다.

함상 시험발사에서 조선철포가 발사한 화염포탄은 목표물로 사용된 폐 판옥선의 선체를 뚫고 들어가 안에서 폭발했다.

겨우 화염포탄 5발을 얻어맞은 판옥선이 화염에 휩싸여 가라앉는 광경은 이순신도 전율을 금치 못했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구경이 큰 조선철포에서 발사한 화염포탄 안에 든 인화물질의 양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이 이순신이 조선철포를 중용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물론 야포는 조선철포보다 다소 구경이 작다.

하지만 야포용 포탄은 조선철포용 포탄보다 조금 더 길쭉했다.

작아진 구경으로 인한 포탄 내부의 적재량을 길이를 키워 만회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조선철포용 폭발탄만큼의 인화물질을 담을 수는 없었다.

크기를 무한정 키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야포로 사격한 화염포단은 7발을 맞추고서야 목표로 만들어진 폐 판옥선을 침몰시킬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순신을 포함한 전라우수영의 장수들과 장병들은 조선철포 보다는 야포의 성능에 더 큰 놀라움을 가졌다.

조선철포는 만들어 낼 수 없는 정확도와 사거리를 야포가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2천보를 가뿐하게 넘나드는 사거리와 포수들조차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의 정확도를 보여줬던 것이다.

물론 야포의 포탄이 제대로 판옥선의 선체를 뚫고 들어가자면 1천보 안에 들어와야 했다.

1천5백보에선 뚫고 들어가는 것과 튕겨나가는 것이 반반 섞인다.

2천보를 날아가긴 하지만 그 거리에선 모든 포탄이 판옥선의 선체는 뚫지 못했다.

다시 말해 적선의 선체를 뚫고 들어가자면 최소 1천5백보 안으로는 접근을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결과였다.

천자총통의 경우 5백보 이내 로 들어가야 판옥선의 선체를 뚫을 정도의 힘을 내기 때문이다.

물론 그 보다 더 큰 차이는 정확도다.

양측 모두 숙련된 포수가 쐈을 때 야포는 2천보에서 2보정도 빗나간다.

바람의 영향이다.

1천5백보 안에 들어가면 오차가 1보 이내로 줄어든다.

1천보 안에서는 전탄이 명중탄으로 나올 정도였다.

그에 반해 총통류의 명중률은 극히 저조했다.

천자총통의 경우 최대사거리인 1천3백보에선 무엇을 맞춘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다.

유효사거리인 5백보 거리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함대가 포격선을 맞추고 대량 포격함으로써 탄막을 구성해 적 함선, 또는 함대를 타격할 수는 있지만 개개의 함정이, 개개의 함포가 적선을 타격할 경우엔 2백보 안으로 들어가야 명중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 증거로 선조 시절보다 2백년 후인 정조 때 편찬된 수조규식(水操規式, 수군 훈련규범)에 따르면 총통은 2백보, 조총은 1백보, 활은 90보 앞에서 쏘라고 되어있다.

2백년 후이니, 발전은 못해도 퇴보할리는 없다.

그럼에도 총통을 2백보 안에서 쏘라 했을 만큼 총통의 명중률이 좋지 못했다는 뜻이다.

야포와 총통은 명중률만이 아니라 파괴력에서도 명확히 차이가 난다.

물론 포 자체의 발사력도 차이가 나지만 사용하는 포탄의 차이가 컸다.

총통의 포탄으로 사용되는 철환은 아주 드물게 적선의 하부를 정확히 깨부수는 경우가 아니라면 몇 발이 선체를 뚫고 들어갔다고 적선을 침몰시키지 못한다.

하지만 뚫고 들어만 가면 폭발탄의 파괴력은 명확했다.

명중률과 파괴력, 거기다 사거리까지.

이순신과 휘하 제장들이 반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야포는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단 몇 발 만으로 판옥선을 불태워버리는 위력에 주목한 이순신은 구경이 조선철포보다 더 큰 천자총통용 폭발탄 생산을 요청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요청은 광해군에 의해 거부되었다.

천자총통용 폭발탄이라는 추가 제품이 생길경우 생산과정이 복잡해짐으로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또한 어차피 야포로 모든 조선의 포를 갈아치울 생각인 광해군의 입장에서 아직 전쟁의 위험도 없는 와중에 굳이 자원을 이중으로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아무리 화약의 생산에 이전보다 제한이 적어졌다지만 그렇게 펑펑 쓸 정도로 화약이 남아도는 것은 여전히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철포용 폭발탄의 생산도 사실은 고육지책이었다.

어쨌건 폭발탄은 야포용으로 개발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광해군은 이순신에게 개량된 동거에 얹혀진 포와 선체를 밧줄로 연결하여 손쉽게 반동으로 밀려난 포를 제 위치로 가져갈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라 전했다.

물론 도르래를 사용하라는 전언도 잊지 않았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전라우수영의 수군이 만반의 준비를 갖춘 것은 선조20년 7월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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