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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46화 (46/325)

제46화. 교역의 확대

오랜만에 장원에 찾아온 김에 철포 개량조에 들렸다.

폭발사고에 놀라긴 그들도 마찬가지였던지 상당히 어수선했다.

그런 이들이 광해군의 방문에 철포 하나를 내보였다.

“뭡니까?”

“시제품입니다.”

“완성······, 한 겁니까?”

놀라 묻는 광해군에게 철포 개량조의 조장이 빙긋이 미소 지었다.

“어제 완성되었습니다. 오늘 궐로 연통을 넣으려는 찰라 이 사달이 나서······.”

조장의 말을 뒤로하고 철포로 다가간 광해군이 포구 안을 들여다보았다.

생각보다 가지런한 강선이 우측으로 휘돌아 내려가고 있었다.

“몇 바퀴나 돌아갑니까?”

“아직은 세 바퀴가 한계입니다.”

“포신의 길이가 얼마죠?”

“6척 반입니다.”

현대 도량형으로는 2M가 살짝 안 된다.

그러니 70Cm가 조금 안 되는 전진거리에 포탄이 한 바퀴를 도는 셈이다. 이 시대로써는 상당한 기술이었다.

물레방아와 광해군이 전해준 기초적인 기어방식의 톱니바퀴들을 이용한 수차식(水車式) 드릴로 만들어낸 결과로는 차고 넘쳤다.

“구경(口徑)은요?”

“미리 언질을 주셨던 대로 3치(寸)로 맞추었습니다.”

9Cm 남짓이다.

이장손에게 만들라고 지시한 폭발탄의 구경과 같았다.

“발사······, 가능해요?”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조장의 답에 광해군이 면포로 온몸을 감싸고 있던 이장손에게 달려갔다.

완성된 폭발탄이 있는지 묻기 위해서였다.

조선철포용 폭발탄은 다수가 시험발사용으로 만들어져 있었지만 아쉽게도 야포용은 만들어져 있지 않았다.

그걸 아쉬워하는 광해군의 모습에 이장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 만들 수 있습니다. 외피는 만들어진 것이 있으니 내부만 채우면 됩니다.”

“얼마나 걸릴까요?”

“촌각이면 됩니다, 마마.”

부상당한 사람을 부려먹자니 미안했지만 광해군은 곧바로 준비를 명했다.

이후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이장손이 일꾼들과 3발의 야포용 폭발탄을 만들어 왔다.

광해군이 그림으로 그려주었던 것과 비슷하게 길쭉한 형태였다.

그것으로 포탄의 용적률은 제대로 확보되었다.

구경이 작아져서 안에 담기는 양이 적어진 부분을 길어진 몸체로 만회했다는 소리다.

그럼에도 같은 구경의 통자쇠로 만들어진 철환보다 무게가 가벼웠다.

그걸 가지고 철포 개량조와 함께 시험 발사를 시행했다.

처음엔 최소 장약을 넣어 발사했다.

쾅-!

거센 폭음과 함께 야포가 뒤로 밀려나며 포탄이 날았다.

그리고 떨어진 포탄은 조용했다.

실패인가 싶었던 그 순간.

쾅!

다시금 폭음이 일어나며 포탄이 폭발했다.

안전을 이유로 쇳조각이나 인화물질은 넣지 않은 공탄(空彈)이었기에 그 폭발반경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성공임엔 분명했다.

광해군이 이장손을 비롯해 철포 개량조원들과 기쁨으로 겅중겅중 뛰었다.

이후 장약을 늘여 최대 사거리를 시험했다.

놀랍게도 도달 거리는 2천보가 넘었다.

3번째 사격에선 정확도를 시험했다.

수많은 시험사력으로 능숙한 포수와 비등한 사격술을 갖춘 철포 개량조의 조장이 지휘하는 야포는 2천보나 떨어진 목표에서 겨우 2보 어긋난 지역에 정확히 포탄을 꽂아 넣는 기염을 토했다.

광해군의 기쁨이 대단했다.

물론 발사 충격이 기존의 조선철포보다 심해서 한번 쏘면 1~2보는 뒤로 물러난 포를 제 위치로 다시 끌어다 놔야 하는 수고로움이 생겼지만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발사 충격의 경우엔 광해군의 언질을 받은 일부 야장들이 주퇴복좌기를 연구는 하고 있는데 아직 개발은 하지는 못했다.

현대 지식을 몇 가지 전수했지만 그걸 실현시키는 것은 결국 조선의 기술자들 손에 달린 일이니 그걸 뭐라 할 수는 없었다.

광해군이 전수한 현대지식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 있다’ 정도이지 그걸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세세히 알려준 건 드물었으니까.

지금까지 따라온 것만 해도 충분히 놀라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보니 단순히 용수철만 가지고 주퇴복좌기를 만든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역시 유압실린더가 만들어져야 하는 거 같은데 그게 상당히 어려웠다.

특히 고무의 부재가 아쉬웠다.

아직 천연고무를 조선은 확보하지 못했다.

물론 그걸 확보했다고 해도 공업용으로 쓰기엔 문제가 있겠지만, 연구조차 진행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조필이 신세계 항로를 운영하는 서반아의 상인들과 접촉 중이었지만 종자를 들여오는 것엔 성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종자를 들여온다고 바로 심어 재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은 중요했다.

그렇게 주퇴복좌기의 아쉬움을 뒤로한 광해군이 이장손에게 야포용 폭발탄의 제작을 서두르라 명했다.

그것을 가지고 추가적인 발사 시험들을 지속적으로 진행하여 수정사항을 찾아내라고 철포 개량조에게도 지시한 광해군이 궐로 돌아왔다.

직후 광해군이 선조와의 독대를 청했다.

그간 문안인사조차 받아주지 않던 선조가 그 청을 허락했다.

다만 독대는 아니었다.

도승지가 배석한 가운데 선조와 마주한 광해군이 장원의 일을 설명했다.

큰 사달이 아니라는 것에 선조는 안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뿐, 야포와 폭발탄의 개발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선조는 왕자가 무기의 개발에 열을 올리는 것이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는 말로 탐탁지 않음을 드러냈다.

혹, 그것으로 새로운 무기의 개발이 막힐까 광해군이 두려워했으나 다행히 금지시키지는 않았다.

그나마 다행은 이번 일로 광해군의 장원 출입이 다시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가 관리하지 않아 사고가 났다는 생각을 가졌던 모양인지 선조는 그것을 먼저 입에 담았다.

<그곳의 관리를 철저히 하여 다시금 사고가 없게 하라.>

화가 복이 되는 순간이었다.

*****

선조19년 9월.

동인과 서인들이 ‘희사’한 노비 2만이 무산으로 출발했다.

그들의 소유권은 모두 철물전으로 넘어왔다.

희사인 이상 대가는 없었다.

물론 그 수를 기록해 차후 증산에 필요한 노비수를 정해주기로 했다.

그래서인지 미리 준비를 갖췄던 이산해가 7백, 성혼이 5백의 노비를 바쳤다.

예상외였던 것은 그들보다 더 많은 노비를 바친 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이들 중 가장 높은 곳에 눈에 익은 이름이 올라있었다.

최목중.

전 공부상서 최산지의 증손자였던 바로 그다.

그는 무려 9백에 달하는 노비를 희사했다.

들리는 말에는 그것을 위해 가지고 있던 땅을 많이 팔았다고 했다.

무리를 했다는 뜻이다.

하긴 그는 훈구파의 자손이다.

당금의 조당을 장악하고 있는 사림의 손에 의해 정리된 훈구파의 자손인 이상 출사는 어렵다.

살아남자면 돈이라도 벌어야 했을 것이다.

애초에 철제 농기구로 장난을 쳤던 이들 모두가 비슷한 입장이라는 것에서 최목중과 그들의 생각을 광해군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이 그들이 벌인 행동에 정당성을 가져다주진 않겠지만, 살아남고자 발버둥치는 이들을 벼랑으로 몰 필요까지는 없을 터였다.

그것이 광해군이 최목중의 노비를 그대로 받아들인 이유였다.

이전에 마주했던 최목중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던 광해군이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즉시 김억수에게 사람을 보내 앞으로 지주들이 내놓는 토지가 나오면 무조건 사들이라고 전했다.

여전히 조선에서 생산되어 남아도는 쌀을 무작위로 사들이고 있던 김억수는 광해군의 말을 두말없이 수긍했다.

광해군의 말을 따라서 돈이 되지 않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왜와 철 교역을 시작하면서 명에서 거두었던 이익은 아무것도 아닐 만큼의 소득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겨우 명에 팔았던 철의 삼분지 일을 넘겼음에도 명이 대가로 지불한 것보다 많은 은이 들어왔다.

더구나 명과 왜의 은 교역을 조필의 상단이 독점한 뒤로 거기에서도 수익이 쏟아지고 있었다.

무산에서 생산된 철과 왜의 은을 독점한 조필의 상단이 명나라 최고, 최대의 상단이란 평가가 나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명나라 조정에서는 아무런 압박도 없었다.

압박은커녕 그들을 위해 수도 없는 일들을 해주었다.

막대한 뒷돈이 조필과 홍순언, 그리고 석성으로 이루어진 라인을 통해 명나라 조정으로 흘러들어갔기 때문이다.

종래엔 파벌을 망론하고 조필이 경영하는 상단의 돈을 받지 않는 명나라 고관이 없을 지경이었다.

위기를 느끼는 명나라 상단들이 늘어났다.

한데 그들에게 조필이 자금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은 홀로 살아남아 명나라 상계를 다 차지할 생각이 없다면서······. 명의 물건을 조선에 팔수 있다면 다 사주겠는데 교역이 제한되니 그럴 수 없어 안타깝다는 말도 곁들여 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명나라 상단들이 너나할 것 없이 자신들의 인맥을 총동원하여 명나라 조정을 흔들어댔다.

홍순언의 부탁을 받은 석성과 많은 명나라 대신들이 그런 상인들 편에 섰다.

결국 명나라 황제인 만력제가 조선과의 교역을 확대하라는 황명을 내렸다.

해당 내용을 적어 넣은 황제의 교지를 가진 명나라의 사신과 함께 종계변무가 해결된 대명회전을 가진 홍순언이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선조19년이 저물어가는 11월의 일이었다.

왕이 서대문 밖의 모화관 까지 나아가 사신을 맡는다는 관례까지 깨고 그보다 더 멀리 나와 명나라 사신을 맞았다.

선조가 종계변무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얼마나 기쁘게 생각했는지 여실히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선조는 다시 궐에서 절을 올리고 황제의 교지를 받았다.

그곳엔 명과 조선의 교역을 무한정으로 확대하라는 황제의 황명이 담겨있었다.

사대를 기조로 삼던 조선에서 반대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스운 것은 황제가 그 교역의 중심에 명에선 조필의 상단을, 조선에선 철물전을 콕 짚어 거명했다는 점이었다.

돈의 위력이었다.

선조와 조당의 대소신료들은 마치 지상과제라도 받아든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해금령은 그대로였지만 명과의 모든 해상 무역에 대한 통제가 풀렸다.

배를 짓겠다고 나서도 모두 허가해주라는 어명이 떨어졌다.

철물전을 대신한 광해군이 제물포에 대규모 선거의 조성을 요청해 선조의 재가를 얻었다.

장원에서 철선을 만드느라 분주했던 이들이 모두 그 선거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의 책임자로 선조는 광해군을 임명해 내려 보냈다.

견제는 여전했지만 황명을 수행하자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고, 당금 조선에서 그럴 수 있는 이는 철물전과 선이 닿아있는 광해가 유일했기에 선조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제물포에 임시 거처를 마련한 광해군이 우선은 판옥선으로 배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일엔 장원에서 철선 연구에 매진하던 조선 기술자들은 제외되었다.

왕이 명령하고 온 조당이 서두르는 일이었다.

조선에 있는 거의 모든 조선 기술자가 제물포로 이동되어왔다.

그들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그 덕에 장원의 조선 기술자들은 여전히 철선 연구에 매달릴 수 있었다.

잠수함을 만들어 보고 있던 이창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광해군은 이창의 초보적인 잠수함이 성공하더라도 당 시대의 기술로는 괄목할 만한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연구를 지속시키는 것은 기술 개발에 목적이 있었다.

미리 생각하고, 미리 발전시키는 기술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당장 소용이 없다고 멈추면 따라잡히고 곧 추월당한다.

광해군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대가 아닐지라도 훗날 조선이 그 어떤 나라보다 먼저 잠수함을 가질 수만 있다면 광해군은 이 연구를 지속시킬 가치가 충분하다도 믿고 있었던 것이다.

*****

선조20년 3월, 드디어 제물포 선거에서 교역선으로 만들어진 판옥선 20척이 동시에 진수되었다.

애초에 전투선을 목적으로 개발된 판옥선으로 화물수송을 담당하는 교역선을 만드는 것은 지극히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그걸 광해군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진행한 것은 그에게 숨겨진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사시 그 배들을 모조리 군선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장을 갖추기 전까지는 누구도 조선의 교역선들을 전선(戰船)으로 생각하지 못할 테니까.

그것은 조선 수군의 증대에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 분명한 명나라 군부에 대한 일종의 대비책이었다.

그렇게 진수된 판옥선들이 항행시험을 마치고 최초로 의주에서 화물을 싣던 4월 초, 김억수가 광해군을 찾아 제물포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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