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39화 (39/325)

제39화. 야공별당(冶工別堂)

“원형 말고 이런 형태면 어떨까요?”

그렇게 그려낸 광해군의 그림은 현대시대의 포탄 모양이었다.

그걸 바라보는 이장손에게 광해군이 말했다.

“굳이 그렇게 길게까지는 아니어도 됩니다. 그저 아래를 쉽게 구별할 수 있고, 포신 안에서 장전과 발사되는 동안 두껍게 만든 밑면 부위가 아래쪽에 위치할 정도의 형태면 될 테니까요.”

광해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장손의 표정이 밝았다.

그런 이장손과 헤어진 광해군은 철포 개량조의 별채를 찾았다.

다수의 대장장이가 무산으로 빠져나간 탓에 군기시 출신 야장들만 남아 개발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광해군이 요구했던 야포의 개발을 거의 마무리 지어가고 있었다.

야포의 개발이 늦어졌던 것은 강선 때문이다.

소총 개발조에서 취한 강선제조법은 철포 개량조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다.

미리 강선을 철판에 눌러 만들고, 그 철판을 감아 만드는 총열과 달리 포는 포신 전체를 통짜로 만들어야만 내구성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철포 개량조에서 착안한 방법은 통자로 만든 포신의 가운데를 깎아서 포구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걸 위해 철포 개량조는 수동 드릴을 만들어냈다.

현대의 지식을 전수하지 않았음에도 등장한 그 수동 드릴의 모습에 광해군은 굉장히 놀랐다.

하긴 조선 후기로 가면 조총의 총열을 통자로 만들어 그것을 깎아 파내는 찬혈의 기술을 개발하긴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2백년이나 앞선 시대였다.

그렇게 수동 드릴의 모습에 놀라는 광해군에게 철포 개량조의 조장을 맡고 있던 야장이 다가와 설명했다.

“일전에 소총 개량조 목수들에게 나무에 구멍을 쉽게 파는 방법으로 알려주셨다는 것에서 착안을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났다.

가형 소총의 몸체를 만드는 목수들에게 구멍을 쉽게 뚫기 위한 방법으로 드릴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건 손아귀에 쥐고 힘을 주어 파내는 방식이었고 철포 개량조가 만든 것은 쇠 줄 가운데 드릴 날을 두고 그 것을 박타듯 앞뒤로 당겨 드릴 날이 회전하게 만든 것이었다.

굳이 현대적으로 설명하자면 나무를 활대에 끼어 불을 내는 장비와 비슷한 원리였다.

아무런 언질이 없었음에도 스스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물론 수동으로 통짜 쇠를, 그것도 강철을 깎자니 보통 긴 시간이 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에 애를 먹는 이들을 데리고 광해군이 냇가에 만들어진 물레방아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무산에서 철광석 부수는 자동망치로 만든 것처럼 드릴을 돌릴 수 있게 만드는 것을 논의했다.

철포 개량조 야장들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며 광해군은 가능성을 본 채 궐로 돌아왔다.

무산에서 돌아온 이후, 광해군의 외박은 불허되어있었다.

하긴 나돌아 다니 게 내버려 두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상황이긴 했다.

*****

그렇게 시간이 흘러 새해가 되었다.

선조18년 정조하례에 광해군은 참석하지 못했다.

군신간의 자리이니 나오지 말라는 선조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임해군과 신성군은 선조의 부름을 받고 정조하례에 참석했다.

그것에서 선조가 광해군을 얼마나 견제하고 있는지 여실히 엿볼 수 있었다.

정조하례의 연회가 끝난 후, 정철과 이산해가 차례로 다녀갔다.

선조의 눈치를 보던 다른 대신들은 오지 못했지만 그 둘은 서인과 동인 양 파벌의 대표자격으로 광해군을 찾아 인사를 한 것이다.

하긴 명으로 수출되는 철정의 양이 연일 폭증하는 와중이었다.

도대체 그 많은 철을 어디다 쓰는 것인지 명은 조선이 생산한 철을 무한정 소비하는 중이었다.

그로인한 이득이 날이 지날수록 커지는 상황이었다.

당금에 와서는 일대의 광활한 농지를 소유한 대지주보다 수백의 노비를 광해군에게 보낸 이들의 수익이 더 많아지는 실정에 까지 달하고 있었다.

겨우 반년만의 변화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큰 변화였다.

그래서인지 그 둘은 광해군을 향한 동인과 서인의 지지가 여전히 확고하다는 것을 알리고 갔다.

동인과 서인의 지지.

이익에 기반한 것이니 그게 무너지면 언제라도 뒤바뀔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그들의 힘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광해군은 그 얄팍한 지지에 감사의 답례를 했다.

그렇게 이산해와 정철이 다녀간 직후, 이항복이 광해군을 찾았다.

“내일 개소합니다만 어찌... 나와 보실 요량이십니까?”

이항복의 물음에 광해군이 미소를 지었다.

“이번 것은 그저 철물전이 진행하고 필운 대감이 지원한 것으로 하죠.”

“주상 전하 때문이시군요.”

“백성들에게서 더 이상 제 이름이 거론 되는 것은 당분간 피해볼까 합니다.”

광해군의 답에 이항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면 소신이 그리 알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광해군에게 반례한 이항복이 돌아갔다.

그리고 그 다음 날.

한성에 야공별당(冶工別堂)이 문을 열었다.

이름 그대로 대장장이 기술을 가르치는 곳이었다.

이것을 위해 광해군은 무산의 철산 단지에서 숙달된 대장장이들 중 일부를 불러 내리기도 했다.

대장장이들이 있기는 했지만 조선 중기처럼 활발하게 모든 마을마다 있는 건 아니었다.

하긴 대장장이가 조선 전체에 활성화되어 퍼진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였으니까.

광해군은 그 시기를 앞당기기로 했다.

그 방편으로 대장장이 학교를 세운 것이다.

간단한 산수와 언문교육도 함께 이루어지는 이곳의 첫 당장(黨長)은 이항복이 맡았다.

맨 처음 그곳에서 가르친 이들은 철물전이 사들인 노비였다.

제법 손재주가 있고,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평을 받는 이들만 추려 사들인 철물전은 그들을 교육시켜 전국적인 대장간 사업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물론 그것은 광해군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아직 대장장이 사업의 이점을 대중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초기엔 대단위 사업으로 운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설립된 대장간들이 제자리를 찾고 수익을 내기 시작하면 스스로 대장간을 여는 이들이 많아지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야공별당이 문을 연 이후, 김억수가 선전의 대행수에서 물러났다.

그렇다고 이전의 걱정처럼 그가 쫓겨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직접 철물전을 챙기기 위해 철물전의 대행수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그만큼 철물전의 크기가 커졌다.

뿐인가, 선전이 철물전을 지원했던 것에서 철물전이 선전을 지원하는 형태로 상황이 바뀌었다.

그로인해 철물전의 위상도 크게 높아졌다.

돈 잡아먹는 하마에서 황금알을 낳은 거위가 된 셈이다.

그렇게 규모가 커지고 철산 제철단지가 완벽하게 자리를 잡아 돌아가기 시작하자 확대가 불가피 했던 것이다.

기존에 철물전을 맡아왔던 나석을 수석행수로 삼아 무산에 상주시키고 김억수는 한성에서 철물전의 모든 일을 관장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선전에서 아주 손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나석과 조필만큼이나 그를 따랐던 행수 중 한명인 한소를 선전의 대행수로 밀어 올렸던 것이다.

김억수는 그를 통해 여전히 선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물론 이미 선전의 거래규모를 철물전의 그것이 훨씬 추월한 상태였지만 말이다.

그로인해 당금 조선에서 가장 큰 거래를 하는 곳은 선전이 아니라 철물전이었다.

조선의 상계가 그런 철물전을 중심으로 재편되어가고 있었다.

*****

선조 18년 5월.

여느 때처럼 장원에 나가 기술자들과 수많은 것들을 만들어 내고 연구하느라 분주했던 광해군에게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서둘러 귀궐 하셔야겠습니다, 마마.”

당황한 표정인 알지의 말에 광해군이 물었다.

“왜?”

“방금 전 궐에서 주상 전하의 교지가 내려졌다 하옵니다.”

“무슨 교지?”

“내용까지는······. 도승지 영감의 전갈로는 곧바로 환궐하여 교지를 받들라는 주상 전하의 명이 떨어졌다 하옵니다.”

알지의 말에 광해군은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선조가 갑자기 자신에게 교지를 내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머뭇거리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견제를 시작한 선조에게 트집을 잡혀봐야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대궐로 돌아간 광해를 기다리는 것은 이항복이었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걱정스러운 광해군의 물음에 이항복이 답했다.

“국본에 대한 이야기가 조정에서 나왔습니다. 대신들이 주상 전하 앞에서 군 마마의 이름을 거론하였습니다.”

비로소 갑자기 교지가 내려온 상황을 이해한 광해군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국본, 그러니까 세자를 정하는데 있어 선조는 굉장히 망설였다.

정실에게서 왕자가 나길 기다렸다는 후대의 평가도 있지만 대부분은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서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오죽하면 광해군이 세자가 된 후에도 그를 흔들어댔을까.

죽기 직전까지 차기 왕위에 대해 확답을 미룬 인사가 바로 선조였다.

그런 인사의 앞에서 국본을 세우라 말했으니.

실제 역사에서는 정철이 주청했다가 트집을 잡혀 파직당하고 조정에서 쫓겨나는 이유가 되기도 했던 일이다.

그게 임진왜란 직전 해였기에 아직 시간이 있다고 방심했었다.

그래, 방심했다.

선조의 경고가 있었음에도 그저 자신만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실제 역사와 달리 무산 철산단지에서 발생하는 이익으로 인해 자신에게 대신들이 잘 보여야 한다는 상황 변화가 발생했음에도 그것에 무감각 했다.

실제역사에선 정철이 광해군을 국본으로 추대한 일 이후, 광해군에 대한 선조의 미움이 폭발한다.

아니나 다를까.

자신의 전각 앞에서 무릎을 꿇고 받은 선조의 교지엔 밖으로 나돌며 대신들과 부화뇌동하지 말고 자숙하여 자애하라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한마디로 외출금지령이다.

할일은 산더미고 가야할 길을 먼데 발이 묶였다.

급한 대로 김억수를 불러들여 원하는 바와 가야할 길을 일러 일을 진행해 나갔다.

조정에서 도와야 하는 일은 이항복을 통했다.

서인과 동인을 움직여야 할 때는 이산해와 정철에게 연통을 보내 협조를 구했다.

장원에서 진행 중인 기술 개발의 경우엔 알지를 수시로 보내 어려움을 파악하고 해결 가능한 현대의 지식을 보내는 선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권률이 북위별시위 별장에서 예조좌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의 북위별시위는 조선인 보군 1천, 전향 여진족 기마대 1천으로 이루어진 부대로 축소되어있었다.

북위별시위가 쓰던 철포와 가형 소총 등 무기들은 여전히 북위별시위의 무기고에 소장되어 있었지만 운영 병력은 줄어든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광해군과 김억수가 모든 지출을 감당했던 노비군과 대다수 여진족 전사들의 해산이었다.

면천된 노비군과 해산된 여진족 전사들은 모두 철산 제철단지에서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맞춰 경군과 오위 등에서 차출되었던 관군도 모두 원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대신 채운 1천의 조선군은 모두가 함경도의 병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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