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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37화 (37/325)

제37화. 엎어진 김에 일어나 달릴 준비를 하다 (1)

광해군이 한성의 궁궐로 돌아 온지 보름이 지났다.

선조 17년 11월.

율곡 이이가 사가에서 숨을 거뒀다.

실제 역사보다는 10개월을 더 살았고, 광해군의 든든한 지지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이이의 죽음이 알려진 그 날, 광해군의 귀궐 인사를 선조가 받았다.

들리는 소리에는 이이가 자손들에게 맡긴 상소를 선조가 받은 직후의 일이라 하였다.

“큰 신하가 죽음으로 너를 보증하였다. 그것의 의미를 잃지 말고 자중하고, 또 자중하여라.”

자신을 앞에 두고 선조가 처음 들어보는 차가운 음성으로 내린 말이었다.

그것이 1년 넘게 북방을 전전하며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 노력하다 돌아온 10살짜리 아들에게 한 선조의 첫마디였다.

섬뜩한 느낌을 받은 광해군은 공손히 절을 하고 조심히 물러나왔다.

“결국 좋은 아버지는 아니라는 소린가?”

왕의 침전인 강녕전을 바라보는 광해군의 음성이 씁쓸했다.

솔직히 억울했다.

왕의 권위에 도전하기 위해 무언가를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1년 만에 만난 선조는 광해군을 견제했다.

길지 않은 음성 마디마디마다 선조의 불안감과 분노가 알알이 묻어날 지경이었다.

무엇이 그렇게 선조를 자극했는지 광해군은 알지 못했다.

다음 날 찾아온 이항복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제 29살이 된 이항복은 장년의 테가 본격적으로 나고 있었다.

시대가 그래서인지 겨우 이십대의 청년이 사십대 아저씨의 느낌을 풀풀 풍기고 있었다.

그런 이항복이 광해군에게 서신 하나를 전했다.

“무엇입니까?”

“숙헌 대감이 군 마마께 남긴 것입니다.”

이이가 남긴 서신이라는 말에 광해군이 그것을 펼쳐보았다.

<광해군 마마.

미신이 감히 범접치 못할 기백과 기개를 가지신 마마이시기에 이렇다 저렇다 남길 말은 따로 없으나 걱정 하나가 남아 그것을 아뢰고자 마지막 숨결로 붓을 들었나이다.

무릇 때가 아닌 뒷물이 앞 물을 밀치면 물결이 높게 일어 수많은 이들이 다치고, 뒷물도 흘러넘쳐 결국 흩어져 사라집니다.

때를 기다리시고, 순리를 저버리지 마소서.

미신 저 하늘에서도 마마의 기개가 조선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지켜보겠나이다.

끝까지 믿고 따르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미신을 용서하소서.>

그저 이용해 먹자고 들었던 노신이 남긴 서신이 먹먹하게 가슴을 조여 왔다.

광해군 자신은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삼았던 사람이었건만 그는 진심으로 광해군을 대했던 것이다.

그것에 먹먹해 하는 광해군을 향해 이항복이 말했다.

“걱정이 크셨습니다.”

“왜······? 아바마마도 그러시고 ,숙헌 대감도 그러하고 왜 그런 것입니까?”

“저자에 소문이 파다합니다. 마마를 일컬어 수백만 여진 전사들이 따르고, 하늘의 벼락을 마음대로 부리는 하늘이 내리신 분이라고 말입니다.”

“설마!”

“증인들도 가득하더군요. 북방에서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관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두 눈으로 벼락을 부리시는 것을 보았노라고······.”

“아바마마도 들으신 겁니까?”

“직접 불러 하문하여 답을 들으신 것으로 압니다.”

“흠······.”

광해군의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수만에 불과한 여진인들이 수백만으로 둔갑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일수 없다는 것을 어지간한 조정의 신료들은 알 것이니 그건 큰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이 시대 군왕들이 제일 싫어하고 경계하는 것.

<하늘의 뜻을 이은자.>

군왕은 하늘의 뜻을 이은자여야 했다. 오죽하면 중국의 역대 황제를 모두 천자, 하늘의 아들이라 칭할까.

조선이라고 다를까.

왕은 하늘의 뜻을 타고 태어나 그 뜻을 이어 통치하는 자이다.

한데 그런 왕이 버젓이 살아있는데 또 다른 하늘의 뜻을 이은자가 나타난 셈이니.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자가.

괜한 짓을 벌여 화를 자초했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이젠 선조의 경고대로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수밖에.

“그렇다고 철산 단지에 무슨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요?”

“모르겠습니다. 조만간 권률을 불러 내릴 것이란 소문이 파다하니까요.”

“왜 그를 불러 내린단 말입니까?”

“말을 잘 안 듣는다더군요.”

“말이요?”

“무산 철광의 일에 발을 들이지 않았던 이들이 철정을 빼돌리려는 시도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걸 북위별시위의 권률 별장이 거부했고요.”

“이 빌어먹을 인간들이!”

무산 철산 단지에서 생산되는 철정들은 정확히 말해 사유 재산이다.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이 철물전의 것이다.

물론 노비와 여러 재화를 댄 동인과 서인들도 지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뿐이다.

어디까지나 철물전은 광해군과 김억수 개인의 것이었으니까.

오죽하면 무산에서 의주를 잇는 도로를 나라에서 만들었다고 왕실에 이용료를 납부한다.

그것에 소요된 면포를 모조리 선전의 김억수가 대었음에도 말이다.

뿐인가, 왕실의 땅인 무산에 철광을 열었다는 이유만으로 또 돈을 바친다.

그럼에도 욕심을 내는 인간들과 그걸 방치하는 선조에게 광해는 분노했다.

그런 광해군에게 이항복이 말했다.

“그리 분해하실 것은 없으십니다.”

“어찌 분해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익은 그것을 지켜줄 수 있는 이들과 함께 지키면 됩니다.”

“함께 지키는 이들이요?”

“동인에서는 이산해 대감이, 서인에서는 정철 대감이 가장 크게 투자한 것으로 압니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을 그냥 두고 볼 리는 없겠지요.”

이항복의 말에 광해군의 눈이 반짝였다.

이미 정철도 함경도 관찰사에서 예조판서로 돌아온 상황이고, 이산해는 올해 탈상이다.

그들을 움직이면 무산 철산단지가 욕심 많은 이들에게 휘둘리는 일은 막을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길을 찾은 듯 보이는 광해군에게 이항복이 물었다.

“한 가지 여쭙고자 합니다.”

“무엇입니까?”

“그저 철산의 이익만을 원하시는 겁니까? 그것이 군 마마께서 말씀하시던 개혁인 것인지 여쭙고자 합니다.”

흔들리는 것이다.

이이라는 기둥이 사라진 지금, 이항복이 계속 광해군을 지지해도 좋을지 확신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이항복에게 광해군이 답했다.

“시작입니다. 철산의 이익은 조선의 힘을 키우기 위한 첫 걸음이니까요.”

“하면 다음에 무엇을 시작하실 요량이십니까?”

“물산을 키워야지요.”

“물산이요?”

“예. 물산이 풍족해져야만 조선의 힘이 강해집니다.”

“그야 그렇긴 하겠지만 조선은 그리 물산이 풍부한 나라가 아닙니다.”

“조선에서 나지 않으면 교역을 통해 유통이 되게 해야겠지요.”

“하나 교역은······.”

“관에서 철저하게 통제하지요. 하나 황제가 명한 교역까지 그리할 수 있을까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제를 흔들어 조선과의 교역을 확대시킬 생각입니다.”

황제를 흔들 방법도 생각해 두었다.

철을 사가기만 하고 명의 물건을 팔수 없으면 결국 명의 손해다.

철정을 사들이며 명이 대가로 내놓은 것은 은이다.

고래로부터 은을 주요 화폐 수단의 하나로 삼았던 중원이었고, 그 역사를 이어받은 명이었다.

은이 무한정 나오는 자원이 아닌 이상, 명으로써는 그것이 계속해서 조선으로 흘러들게 그냥 수는 없을 터였다.

그 말은 그만큼의 물건을 조선에 팔아 다시 그 은을 되가져가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 상황에서 황제는 결코 상인들의 요청을 무시하지 못한다.

명의 부가 조선으로만 흘러들어가는 것을 묵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선과 명의 교역을 확대하라는 황제의 결정이 떨어진다면······. 작금의 시대 상황 상 절대로 조선은 거부하지 못한다.

조선의 왕과 대소신료들을 설득하느니 그게 훨씬 빠르게 교역을 확대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더구나 앞으로 철의 교역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인 바, 그 반대급부로 일어나는 교역량도 확대될 것은 명약관화였다.

광해군은 그것을 통해 조선의 물산을 키울 생각이었다.

광해군의 설명에 놀란 표정의 이항복이 물었다.

“그러면 결국 명에 귀속되지 않겠습니까?”

“저들의 배에 저들의 물건일 경우에는 그렇겠지요.”

“그럼······?”

“우리의 배로 우리의 물건을 교역할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좀처럼 알아 듣지를 못하겠습니다.”

이항복의 말에 광해군이 설명을 이었다.

“선전의 대행수가 행수들 중 조필이라는 자를 보내 명에 상단을 하나 세웠습니다.”

“명나라에요?”

“예. 그가 세운 상단이 조선의 철물전과 철정의 교역을 전담하게 되었지요.”

“그러면······?”

“맞습니다. 앞으로 명의 상인들은 그 상단을 통해 조선의 철정을 구입하게 될 겁니다. 당연히 이익이 생기지요. 그것으로 조선이 필요한 물건을 사서 보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자면 배가 필요한 게 아닙니까? 조선은 수군의 전선과 세곡선을 제외하고는 사사로이 배를 만들지 못합니다.”

작은 나루의 배나 고깃배는 논외였지만 바다를 건너 명을 왕래할 정도의 배는 나라의 허락이 필요한 일이었다.

물론 그 정도의 배를 만들어도 좋다는 허락을 민간이 받은 전례는 없었다.

그래서 밀무역이 큰 이득을 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배를 만들 생각입니다.”

“주상 전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이기(異機)로 승부를 보려합니다.”

“이기요?”

“쇠로 배를 만들까 합니다.”

사실 광해군도 이것이 가능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소용이 있을 것이기에 무산 천산단지에서 철판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했고, 일정한 성과도 얻었다.

하지만 그것은 철선을 건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목표가 아니었다는 소리다.

역사적으로 봐도 기술이 발전하는 1800년대 정확히는 1818년에 등장한 발칸호가 철선의 시초다.

그러니까 19세기에 들어서나 철선이 등장하기 시작한다는 소리다.

이때에도 수많은 시행착오들을 겪고 전반적인 기술이 발전하고서야 본격적인 철선 시대로 접어든다.

그랬던 철선을 아무리 현대적 지식이 가미된다 해도 실제역사보다 2백년을 넘게 앞당긴 다는 것이 가능하긴 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쇠로 배를 만든다는 건 그냥 재료가 바뀌는 것보다 수많은 과정과 난제의 해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철선의 개발을 결심하게 된 것은 진짜로 선조와 조정 신료들 때문은 아니다.

명을 어버이로 생각하고 사대를 철칙으로 믿고 있는 이들에게 명이 정한 해금령을 위반해 배를 내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황제의 교지 한 장이면 손쉽게 무너진다.

그러니 별도로 이기임에 분명한 철선으로 선조를 현혹하여 배를 만들 빌미를 삼을 필요까지는 없다.

그럼에도 철선을 만들려는 이유는 기술이다.

다른 이들보다 먼저 시작해야 했다.

밥을 먹자면 쌀을 씻고, 불을 때서 일단 지어야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린다고 누가 밥을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이다.

태울 수도 있고, 죽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얻는 지식과 기술은 고스란히 조선의 것이 될 테니까.

그렇게 습득한 지식과 기술들은 조선이 다른 나라를 앞서는 바탕이 될 것이다.

광해군은 그렇게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 이후의 조선을 위해서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든 것을 다 시도할 생각이었다.

물론 철선 개발에 실패하더라도 임진왜란에서 제몫을 해낸 판옥선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선택지가 남아 있기에 가능한 결정이었다.

그런 복잡한 광해군의 결심 과정은 알길 없는 이항복은 철선이란 그 말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 물에 가라앉는 쇠로 어찌 배를 만드신단 말씀입니까?”

“그러니 이기일 수밖에요. 그만한 일이라면 아바마마도 궁금증을 참으실 수 없으실 겁니다.”

“실제로 만들 수만 있다면야······.”

그 말을 하는 이항복의 음성은 하지만 불신으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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