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첫 수출
떠나가는 이들이 있을 것을 걱정했지만 면천된 노비들은 모두가 무산에 머물길 원했다.
아무리 면천되었다고는 하나 당장 조선으로 가서 먹고 살길이 막막했던 이들은 무산에 남길 원했던 것이다.
하긴 무산에선 일하면 일하는 대로 대가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미 일전에 면천되었던 노비군의 가족들이 광해군의 약속대로 면천되어 무산으로 이주한 것을 목격한 이들은 돈을 벌어 자신들의 가족도 면천시켜 무산으로 데려올 것을 꿈꿨다.
그렇게 배후 단지의 안정화가 이루어지자 본격적으로 무산 철광에 대한 개발이 시작되었다.
겉의 흙을 조금만 걷어내도 철광석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들을 수레 두 대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게 만든 도로를 따라 철산 제철단지로 보냈다.
그러면 그것을 물레방아로 구성된 쇄석단이 부수고, 그렇게 부순 철광석을 선광기들로 이루어진 선광단이 골라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한성 장원에서 가져온 선광 설비로는 그 양을 모두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에 대비하고자 처음부터 선조의 지원 하에 궁에 보관되어있던 자철석이란 자철석은 모조리 실어왔지만 그래도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광해군이 자철석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본디 자철석은 철광석에서 나온다.
쇠의 함량이 높고, 자성을 띄는 돌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성을 띈다고 모두가 자석의 능력을 가진 자철석이 되는 건 아니다.
자연 상태에서 벼락이나 기타 불특정한 원인으로 이 자철석이 일정방향의 자력을 띄게 되어야 비로소 자석의 능력을 가진 자철석이 되는 것이다.
그 기초 과학 지식에 기대어 광해군이 무산 철광의 채굴 과정에서 나온 자철석들을 높은 언덕에 쌓고 가운데에 쇠막대를 꽂았다.
그리고는 기우제를 지냈다.
솔직히 이런 과정은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미신을 신봉하는 여진인과 조선인들이었다.
그들에게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이 여전히 겉돌고 있는 두 부류를 통합하고, 통솔하는데 작은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판단에 의해서 벌인 일이었다.
하긴 비가 안 오면 왕이 부덕해 그런 것이라며 대궐에서 왕이 직접 기우제를 지내는 것이 이 시대의 조선이었으니까.
물론 무작정 나선 것은 아니었다.
비가 오기 쉬운 봄이었고, 하늘이 꾸물꾸물 거리는 날들이 많아진 때였다.
제단처럼 높게 쌓은 자철석에 기다란 쇠막대를 꽂아둔 곳에서 50보 정도 떨어진 곳에 쌓은 제단에서 광해군이 천제를 지내길 사흘. 드디어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졌다.
꽈르르르릉 꽈광.
무섭게 내리친 번개가 자철석을 쌓아두고 꽂아둔 철심으로 내리 꽂혔다.
허허벌판 높은 언덕에 쇠 성분이 많은 자철석을 쌓고, 거기다 그 꼭대기에 쇠막대기까지 꽂아 두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걸 지켜보는 조선인들과 여진인들은 달리 받아들였다.
<천둥군을 부리는 조선의 왕자가 번개도 마음대로 부른다.>
철산 배후단지의 모든 여진인들과 주변의 조선인들이 목격한 그 일이 주변으로 퍼져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첫날을 시작으로 비가 오는 사흘 동안 내리 계속된 작업이었다.
광해군이 꽂아둔 곳에 여지없이 벼락이 내리쳤고, 그 벼락을 맞은 돌은 쇠가 달라붙는 신성한 돌이 되었다.
구경 온 여진족들은 물론이고, 조선인들도 놀람을 금치 못했다.
여진족은 이전보다 훨씬 고분고분해졌다.
여진족의 제사장들이 몰려와 광해군에게 절을 하고 신으로 떠받들었다.
투삼구와 니탕개, 호정이, 내음타방까지도 광해군의 얼굴을 제대로 처다 보지 못했다.
광해군으로써는 필요한 자철석을 얻으며 여진인들을 다루는데 조금 도움이 되길 바라며 벌인 일의 결과가 너무 크게 일어났다.
여진인들만 아니라 조선인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무성했다.
광해군이 하늘의 뜻을 이은 사람이라고.
그 덕분인지 일의 진척은 막힘이 없었다.
당황은 이내 기쁨이 되고 하나의 촌극이 되어 광해군의 기억 저편으로 잊혀졌다.
운송되는 철광석의 양이 많아지자 도로를 넓혔다.
비가 오면 질척거려 수레가 잘 빠진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철을 얻고 남은 돌 부스러기로 그 도로를 포장했다.
수백 대의 수레가 철광과 제철단지를 오고갔다.
또한 수십 대가 물레방아에서 부순 철광석을 자철석을 이용한 선광기가 즐비하게 서 있는 선광단으로 옮겼고, 그곳에서 선광된 정철이 쇠를 만드는 로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다량의 숯과 정철이 넣어져 쇳물이 되었다.
그 과정에는 석회석도 상당량이 쓰였다.
이것은 광해군이 사전에 장원에 전했던 지식에 기반 했다.
광해군이 전한 현대의 지식에 대장장이들의 오랜 경험과 노력이 결합되어 완성된 무산의 제철과정은 이 당시 그 어떠한 나라의 제철과정보다 발전해 있었다.
당연히 생산되는 철의 순도와 상태도 최상의 것이었다.
하긴 순도라는 것은 필요에 의해 결정되는 것.
그래서 무산 철산 단지의 제철과정도 용도에 맞는 여러 가지 철을 생산하고 있었다.
대장간에서 사용할 것과 포를 만들 것의 차이가 있었고, 또 소총의 총열을 만드는 철도 차이가 났다.
모두가 탄소를 포함한 불순물의 함유율에 의해 결정되거나 여타 다른 물질을 섞어 만든 합금이었다.
솔직히 합금을 만들어내는 것은 광해군이 전한 기술은 아니었다.
그런 방법도 몰랐고.
하지만 조선의 대장장이들은 수천, 수만 번의 실험 과정에서 몇 가지 합금을 만들어냈다.
청동에 주석을 섞는 것에서 힌트를 얻었다니 광해군으로써는 놀라울 뿐이었다.
그런 저런 과정을 통해 무산 철산 단지에서 생산하는 철정의 가짓수는 모두 여섯 개나 되었다.
그중 포나 소총의 총열용으로 사용되는 철은 소량 생산되어 전량 광해군의 장원으로 보내졌다.
합금은 여전히 실험 생산에 불과했다.
당연히 가장 많이 생산된 철은 대장간 용도로 사용되는 선철이었다.
그렇게 생산된 모든 철은 철정형태로 만들어 쌓았다.
그 철정들을 명으로 실어 나르기 위한 대규모의 토목 사업이 조선 왕실의 주도로 지난 3월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
조선 안쪽으로 파고드는 도로가 아니라 조선의 변경을 따라 동(東)에서 서(西)로 가는 도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광해군이 처음 도로 이야기를 꺼냈을 때 보인 선조와 한성 조당의 반응은 거의 경기에 가까울 정도로 부정적이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도로를 위험한 것으로 치부했다.
조선을 침탈한 야인들이 무서운 속도로 이동할 수 있는 길을 닦아주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을 상대로 광해군은 한성의 선조에게 여러 차례 서신을 보냈다.
거기에 더해 이이는 물론이고 정철과, 이산해 등, 움직일 수 있는 모든 이들을 활용하여 벌인 노력 끝에 간신히 조당의 대소신료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도로 사업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노역을 일으켜 공짜로 백성을 부려먹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 달에 면포 10필이 지급되었다.
왕실의 사업이긴 했으나 그 대가로 지급하는 면포는 선전이 책임졌다.
그 과중한 지출에 선전이 휘청거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인지 선전의 대행수 선출이 예정보다 이르게 열릴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
걱정하는 광해군에게 김억수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답신을 보내왔다.
여하간 그런 김억수의 노력 덕에 무산과 의주를 잇는 도로가 선조17년 9월에 개통되었다.
기존의 도로를 확장하거나 연결하는 구간들이 많아서 긴 거리에 비해 빠르게 완공이 된 것이었다.
무산 철산단지에서 철을 생산하고 남은 돌 부스러기들로 포장까지 마친 도로였다.
현대의 콘크리트나 아스팔트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비가와도 수레가 빠지지 않을 정도의 단단함을 도로에 부여할 정도는 되었다.
그저 수레 두 대 정도가 간신히 교차할 수 있을 정도의 넓지 않은 길이었지만 순수 인력으로 만들어진 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과였다.
산을 돌아 구비 구비 지나가고, 하천을 건너기 위해 수많은 다리가 놓여졌다.
그 긴 거리를 따라 철산 제철단지에 쌓여있던 철정들이 운반되기 시작했다.
왕이 동의하고 동인과 서인의 중요인사들이 노비로써 투자한 사업이었다.
누가 지시할 것도 없이 길목에 있는 관아의 관리들이 스스로 나서 관병들을 보내 그렇게 지나가는 수레들을 호송했다.
첫 철정 3백관(1.125 톤)이 명의 상선에 실려 바다로 나아갔다.
그들의 목적지는 천진항이었다.
선적이 마무리되고 수령한 첫 이익이 철물전을 통해 선전을 비롯한 동인과 서인 등 투자자들에게 배분이 되기 시작했다.
과다한 지출로 아우성치던 선전의 행수들이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돈 맛을 본 동인들과 서인들이 광해군에게 줄을 서기 위해 애를 썼다.
특히 초기 투자에 참여하지 않았던 이들에게서 그러한 성향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광해군에게 한성으로 돌아오라는 선조의 명은 그때 내려졌다.
갑작스러운 명이었지만 왕명이었다. 거부는 있을 수 없었다.
불안해하며 떨어지지 않으려하는 여진족을 설득하는데 굉장한 노력을 기울였다.
광해군은 이순신을 곁에 세우고 그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것을 조상과 신께 맹세하고,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약속까지 하고서야 무산을 떠날 수 있었다.
북위별시위와 무산 철산단지 전체의 관장을 이순신에게 맡기고 제철단지의 실무는 대장장이들 중 가장 연장자였던 막고란 노인에게 맡겼다.
그렇게 산적한 일들을 어느 정도 정리한 광해군이 무산을 떠나 한성으로 향했다.
*****
9살에 떠났다가 10살에 돌아온 한성은 변한 것이 별로 없었다.
이전과 다름없이 한가한 한성에 들어서고 이내 대궐에 닿았다.
귀환소식을 전하고 선조를 알현하길 청했으나 허락은 내려오지 않았다.
언제 부를지 몰라 의관을 정제한 채 기다리다 밤이 되었다.
한성에 돌아온 첫날을 그렇게 흘려보냈다.
날이 밝자 내관들과 상궁들이 쉴 새 없이 광해군의 전각을 들락거렸다.
자신들이 모시는 비빈마마들이 광해군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뜻을 전하기 위한 행보였다.
아마도 그들의 배후에 있는 이들이 선을 대기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것일 터였다.
하지만 광해군은 그 누구도 만날 수 없었다.
선조에게 귀궐 문안도 드리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이를 만나는 것은 불효였고, 그것은 조선에서는 용납되지 않았다.
그 상태로 하루, 이틀, 시간이 흘러갔다.
결국 무산에서 돌아 온지 닷새.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전각의 문지방이 달도록 찾아오던 내관과 상궁들의 방문이 뚝 끊겼다.
그리고 북위별시위 별장 이순신이 전라우수사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대신 그 자리는 권률이 앉았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나마 권률이 그 자리에 앉았다는 것에 광해군은 안도했다.
광해가 직접 겪어본 권율은 침착했고, 사리의 분별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라면 왕과 대소신료들의 의도가 어디에 있든 쉽게 휘둘릴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일련의 일들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이이는 광해군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것이 의아해 알지를 시켜 소식을 알아본 광해군은 심각해졌다.
이이가 병으로 앓아누웠다는 소식을 받아든 까닭이었다.
불현듯 떠오른 이이의 사망 시기.
명확히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그는 실제역사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해 탄핵받은 다음 해 병사했다.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던 것이······. 선조16년!
“맙소사!”
놀라 벌떡 일어선 광해군의 심중으로 자신의 가장 강력한 우군의 죽음을 직감했다.